▲《아무도 편지하지 않다》 겉표지.
문학동네
여기, 전국의 모텔을 전전하는 여행자인 '지훈'이 있다. 그는 매일 잠들기 전에 하루의 일을 편지로 써서 누군가에게 보낸다. 그는 스스로를 '편지 여행자'라 부른다.
돌아가신 조부의 안내견이었고, 지금은 맹견이 돼버린 개 '와조'와 함께 여행하는 그는 여행하는 도중에 만난 이들에게 숫자를 부여한다. 고속버스 안에서 만났다가 휴식 시간에 다시는 돌아오지 않은 412, 편의점의 본질은 컵라면에 있다고 말하던 56처럼. 그는 만난 사람들에게 들은 주소로 수도 없는 편지를 보냈지만, 자신의 집으로 한 통의 편지도 배달되지 않았다는 답만 듣는다. 그는 답장을 받기 전까지 여행을 멈출 수 없다. 이 여행은 '편지여행' 이므로.
책 <아무도 편지하지 않다>는 제목처럼 아무도 편지해주지 않지만, 그럼에도 계속 편지를 보내며 여행을 하는 지훈의 발자취를 따르고 있다. 여행 도중에 만난 소설가 여자가 편리한 이메일을 써보라고 권유해도, 그는 손으로 쓴 편지를 고집한다. 그가 끝끝내 고집하는 이 편지에는 몇 가지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미리 하나로 정리하자면, 사람의 고독을 치유하는 힘 정도가 된다.
도시의 삶을 표현하는 말에는 으레 이런 말들이 섞여있다. 삭막함, 파편화, 스쳐지나감. 소설가 여자와 가게 된 모텔 '달과 6펜스'의 한 객실에서 그는 화가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을 보게 된다. "둘 이상인 경우에도 사람들의 시선은 결코 서로를 바라보지 않고, 늘 똑같은 표정과 자세를 하고 있는"(본문 61~62쪽) 그림 속 사람들은 황량한 도시를 배경으로 서 있다. 이곳은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 또한 호퍼의 그림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지하철이나 버스, 길거리에서 우리는 서로 지나치기 바쁘다. 그런 이들이 누군가를 기억한다는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러나 지훈은 그런 사람들을 쉽게 지나치지 않는다. 모두가 다 소중하고 기억할만한 사람들이다. 만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다 기억하고 그를 바탕으로 편지를 쓴다. 그리고 그들에게 보낸다. 편지를 쓰고 보냄으로써 받는 이와 쓰는 이는 서로의 만남을 기억할 수 있게 된다. 이 때, 편지는 기억의 매개로 작용한다.
그런가 하면 여행 도중에 지훈은 예전에 사귀었던 여자친구와 마주치게 된다. 우편배달부로 일할 때 만났던 그녀는 내용이 몇 줄에 불과한 편지로 이별을 통보했다. 그 여자친구와 하룻밤을 보내면서 회포를 풀고, 아침에 남겨진 그녀의 편지로 또 한번 이별을 깨닫게 된다. 그녀는 이별 이후 있었던 자신의 사연을 진심으로 편지에 담아두었고, 그 편지로 하여금 그는 그녀와의 이별을 제대로 깨닫게 된다.
또, 여행 중 여러 장소를 돌면서 잊고 지냈던, 혹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가족의 이야기도 깨닫게 된다. 예컨대 1등을 놓칠 수 없게끔 압박받던 형, 한 학생의 장래에 장애물이 되어버린 어머니, 발명가였고 장난감 가게의 주인이었던 아버지, 그리고 아름다움을 갈망하던 동생. 그들이 가진 각각의 사연을 여행을 하는 도중 편지를 쓰면서 문득 상기하게 된다. 이해의 과정 속에 편지가 놓여있는 것이다.
편지를 쓰고 기다리는 과정 끝에 결국 한 장의 답장도 받지 못한 채 여행을 끝마친 지훈은 사실 편지들이 모여 있었음을 알고 감격에 젖는다. 가족과 와조마저도 없는 텅 빈 집에서 발작을 일으키곤 하던 그는 그들의 편지를 읽으며 발작이 가라앉는다. 간절히 말을 하기 위해 시작한 여행이자, 만난 모든 사람이 소중한 이 여행은 고독에서부터 출발했다.
결국, 고독으로 돌아온 것은 매한가지지만, 사람들의 편지로 사람의 빈 자리는 천천히 메워진다. 그리고 또, 편지를 쓰기 시작한다. "편지를 받을 사람이 있고 또 답장을 보내줄 사람이 있다면, 생은 견딜 수 있는"(본문 277쪽) 것이므로. "편지를 쓰는 숭고한 밤"(본문 279쪽)을 보내는 지훈에게 편지는 마지막으로 위로를 선사한다. 곁에 아무도 없으나 오히려 충만하기까지 한 위로를 말이다.
고독을 치유하기 위해 편지가 가진 기억, 이해, 위로라는 면면들은 한 가지 속성을 공유한다. 바로 '관계'다. 편지는 두 사람을 필요로 하는 매체다. 바꿔 말하면 편지란 사람들의 관계가 녹아있는 매체다. 받는 이가 있다면 보내는 이가 있다. "편지는 공유되는 것"(20~21쪽)이란 표현처럼, 편지 속 내용은 두 사람에게 상응하는 것이다.
한 사람의 이야기만 있는 것이 아니라 두 사람의 이야기가 함께 들어가 있다. 그렇기에 일기처럼 독점되거나 개인에게 머무르지 않고, 두 사람이 어디에 있든 그들을 향한다. 마치 영화 <왕의 남자>의 유명한 대사, "나 여기 있고, 너 거기 있지!"처럼. 분명 여기에는 나 혼자지만, 당신이 '거기 있음'을 편지로써 알게 되기에, 우리는 외롭지 않다. 편지는 고독을 치유할 수 있는 희망이 되고, 설령 고독하대도 그것은 기쁜 고독으로 남는다.
작가는 이 책 자체를 '편지'라고 불렀다. 기나긴 편지를 우리는 독자라는 이름으로 받았다. 그렇다면 이 책은 작가가 독자에게 보내는 '러브레터'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또한 독자와의 관계를 맺기 위한 전초일 수도 있다. 고독을 씻어낼 수 있는, 혹은 함께 나눌 수 있는 따뜻한 관계. 편지는 도착했고 독자이며 받는 이로서, 기쁘게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