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석사, 소수서원을 돌아 풍기인견을 사다.

김수종의 영주 여행기, 3

등록 2012.05.21 09:24수정 2012.05.21 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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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를 대표하는 관광지는 단연 부석면에 위치한 부석사다. 시간이 별로 없는 우리 일행은 무량수전과 조사당 정도만 보기로 했다. 부석사 '무량수전의 배흘림기둥'은 역사와 문화를 조금이라도 안다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설명이 필요 없는 곳이다.

부석사는 원래 화엄 종찰(宗刹)이니 세상을 두루 밝힌다는 비로자나불을 모신 대적광전을 세워야 했으나, 삼국 통합의 의미와 극락을 염원하는 대중에게 쉽게 다가가기 위해 극락을 주지하는 아미타불을 주불로 모신 무량수전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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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석사 무량수전 영주 부석사 ⓒ 김수종


무량수전은 신라 형식으로 보이는 석기단 위에 초석을 다듬어 놓고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배치하였다. 기둥은 배흘림이 많은 두리기둥을 세웠고, 지붕 네 모서리를 활주로 받쳤다. 처마 밑에 걸린 현판은 홍건적의 난을 피해 몽진 온 공민왕의 친필이란다.

비록 676년 신라 문무왕의 명을 받고 의상대사가 창건한 건물은 불타 없어졌다고는 해도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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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석사 삼층석탑에서 바라본 무량수전 ⓒ 김수종


단청을 칠하지 않아 더욱 고풍스러움을 자아내는 법당으로 들어서자 특이하게도 부처가 서쪽에 모셔져 있었다. 남향하는 건물의 서편에 불단을 만들고, 아미타여래상을 동향으로 안치한 것이다. 그 이유로 세 가지 설이 등장한다.

첫째로 부처님은 원래 서방정토에 계시며 중생을 구제한다는 의미에서, 둘째는 동쪽에서 쳐들어오는 왜구를 막아보겠다는 호국의지의 발로로 해석하기도 하며, 셋째는 건축구조 특성상 긴 직사각형의 터가 나와 공간 활용 측면에서 부처님을 한쪽으로 모셨다는 설이다. 

무량수전을 본 다음, 일행은 조사당으로 향했다. 조사당은 무량수전 뒷산에 있는 건물로, 처마 밑에는 작은 나무 한 그루가 철장 속에 갇혀 있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선비화이다. 의상이 인도로 떠나면서 석단 위에 지팡이를 꽂으며 "이 지팡이가 살아 있음은 내가 살아 있음을 알라"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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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석사의 조사당과 우측의 선비화 조사당 ⓒ 김수종


그런데 선비화는 처마 밑에서 비나 이슬을 맞지 못하면서도 지금까지 작고 노란 빛의 꽃을 피워내며 신비롭게 살아서 의상의 영험함을 보여주고 있다. 조사당 건물이나 선비화도 선비화지만, 조사당을 진짜 유명하게 만든 것은 조사당 벽화가 아닌가 싶다.

조사당 벽화는 현존하는 사찰 벽화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회화사에서 가장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조사당 건물이 완성될 무렵인 1377년 그 내벽에 그린 6폭짜리 그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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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석사 조사당 벽화 조사당 벽화, 걸작이다 ⓒ 김수종


길이 205㎝, 폭 75㎝ 정도의 크기로, 흙벽 위에 녹색으로 바탕을 칠하고 붉은색, 백색, 금색 등으로 채색하였다. 양쪽의 범천(梵天)과 제석천(帝釋天)은 풍만하고 우아한 귀부인의 모습이며, 가운데 사천왕은 악귀를 밟고 서서 무섭게 노려보는 건장한 모습이다.

부석사를 주마간산으로 본 일행은 '영주선비문화축제'가 열리고 있는 순흥면의 소수서원과 선비촌으로 향했다. 조선 최초의 사액서원인 소수서원을 먼저 둘러보았다. 소수서원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곳은 사실 스승의 숙소 왼쪽에 있는 유생들의 숙소인 학구재(學求齋)와 지락재(至樂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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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서원 지락재 학생들의 숙소다 ⓒ 김수종


스승의 그림자까지 피한다 하여 스승들의 숙소와 나란히 짓지 않고 두 칸 물려 지었으며, 스승의 숙소보다 방 높이를 한 자 낮추어 지었다고 한다.

구조적 특징을 살피자면, 예로부터 '천지인(天地人)'이라 하여 완전한 숫자로 여겨왔던 3을 상징하여 세 칸으로 꾸미고, 공부 잘하란 뜻으로 건물 입면을 工자 형으로 지었다. 공교육이 많이 붕괴된 요즘 사람들에게 언제나 귀감을 주는 곳이다. 

학구재와 지락재를 보고 나서 국보로 지정된 안향 영정을 비롯하여 보물로 지정된 주세붕의 영정을 포함한 다섯 분의 영정을 봉안했다는 영정각을 지나면, 서원의 유물을 전시한 사료관이 나온다.

사료관 오른쪽으로 난 문을 나서면, 임진왜란 전후 풍기군수였던 겸엄 류운용이 연못을 파고 대를 쌓았다던 탁영대(濯纓臺)와 탁청지가 눈에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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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계천 소수서원 뒷편의 죽계천, 안축의 죽계별곡에 나오는 작은 실개천이다 ⓒ 김수종


바람에 흩어진 꽃잎들이 모여 앉는 작은 연못을 바라보며 젊은 유생들은 어떻게 마음을 다스렸을까. 그리워 설운 마음이 연못을 넘어 죽계천으로 흘러가진 않았을까. 죽계천을 가로지른 나무다리에 기대어 한없이 멀리 있는 진리를 바라본다.

이어 영주선비문화축제가 열리는 선비촌이다. 소학(小學)에 나오는 선비의 생애를 살펴보면, 열 살이 되면 선생을 찾아가 배우고, 스무 살이 되면 관례를 하며, 서른 살에는 아내를 맞아 살림을 하고, 마흔 살에는 벼슬에 나가며, 일흔 살에는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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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선비문화축제가 열리고 있는 선비촌 선비촌 ⓒ 김수종


또한 선비란 모름지기 한평생 학업을 중단해서는 안 되며, 선비는 타고난 신분이 아니라 학문과 수련을 통해 형성되는 것이라 했다. 이런 의미에서 선비는 독서인이요, 학자이다. 선비는 지식의 양을 쌓기 위해서가 아니라, 일상생활 속에서 부딪히는 마땅한 도리를 확인하고 실천하는 것을 학문의 목표로 했다.

대학(大學)에서도 자신의 내면에 주어진 '밝은 덕을 밝히는 일'과 '백성과 친애하는 일'의 사회적 과제를 가르친다. 선비는 항상 자신의 인격을 닦아야 하지만 동시에 그 인격성을 사회적으로 실현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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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촌 영주의 고가를 복원한 곳이다 ⓒ 김수종


이러한 선비의 삶을 그대로 재현해 놓은 곳이 바로 선비촌이다. 영주의 여러 곳에 흩어져 있는 고가들을 그대로 재현하여 한자리에 모아놓은 것인데, 언뜻 생각하면 서울 남산의 한옥마을이나 다른 곳의 집성촌 전통 가옥과 다를 바 없이 여겨지지만, 그 규모와 짜임새는 전혀 다르다.

물론 우리 민족의 생활철학이 담긴 선비 정신을 드높이고 사라져가는 전통문화를 재조명하여 윤리도덕의 붕괴와 인간성 상실의 사회적 괴리 현상을 해소시켜 보고자 충효의 현장에 조성했다는 영주시의 거창한 뜻도 한 몫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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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촌 선비촌 입구의 선비상이다 ⓒ 김수종


선비촌은 네 공간으로 나누어 구성되어 있는데, 수신제가(修身齊家), 입신양명(立身揚名), 거무구안(居求無安), 우도불우빈(憂道不憂貧)이 그것이다. 이는 여러 문중의 대표 건물만 한 채씩 선별하여(총 12채) 영주 지역 선비 가문의 특성을 살펴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영주시에서는 5년 전부터 영주문화축제를 통하여 지역의 선비문화를 알리고 전파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있는 듯했다. 선비촌과 한국선비문화수련원 내에 마련된 행사장을 둘러 본 우리들은 다시 버스를 타고 풍기읍에 있는 인견판매장으로 갔다. 나는 인견이불을 하나 샀다.

인견(人絹)이란 목재 펄프에서 추출한 식물성 자연섬유로, 유럽에서는 '비스코스'라고도 불리며 여름용 옷감으로 사랑받는 원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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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기인견 판매장 풍기인견, 최고의 여름 옷이다 ⓒ 김수종


풍기인견은 1930년대 명주의 본고장인 평안도 영변과 덕천에서 몇몇 직물 기술자들이 정감록에 난세의 피난처라고 기재한 '양백'이라는 뜻을 소백과 태백 두 산맥으로 해석하여 남하하면서 족답기(인견을 짜는 수동기계)를 가져와서 인견 직물을 짜기 시작한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특히 1942년 일제강점기 말엽에는 중앙선 개통으로 인하여 서울과 부산 등 대도시 소비시장에 접근이 용이해져 인견 직물공업은 성황을 이루며 발전하게 된다.

한국전쟁 이후에는 이북에서 직물공장을 경영하던 피난민들이 대거 풍기로 이주함으로써 본격적인 가내공업으로 발전한다. 이후 인견은 영주를 대표하는 전통 산업으로 자리 잡았고, 영주는 현재 우리나라 인견직 최대 생산지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그렇다고는 해도 2000년대 이전까지 인견은 나무가 원료여서 세탁하면 구김이 많이 가고 줄어드는 단점 때문에 주로 안감이나 속옷용으로만 이용될 뿐이었다. 그러나 생산자들의 끊임없는 노력으로 제직 기술과 가공 처리 기법이 개발되어 내의, 잠옷, 남방, 원피스는 물론 넥타이, 이불 등 다양한 완제품을 출시하면서 인기가 높아졌다.

인견 제품을 오래 입으려면 손빨래를 하는 것이 좋은데, 이때 섬유린스를 사용하지 않는 것이 자연스런 천연섬유의 질감을 느낄 수 있으며, 다려 입으면 더욱 부드러운 촉감을 느낄 수 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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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기인견 판매장 풍기인견은 이제는 옷, 이불을 포함하여 모자, 양산, 가방, 손수건 등도 만들어 내고 있다 ⓒ 김수종


풍기 인견은 지역특산품 가운데 공산품으로는 전국 처음으로 한국 능률협회 인증원에서 '특산명품 웰빙 인증'을 받았다. 이에 힘입어 영주시는 적극적 마케팅 전략의 한 방법으로 영주시 봉현면에 전시 공간과 공동 판매장을 갖춘 '풍기 인견 홍보 전시관'을 건립하였다.

또한 서울 등지에서 매년 여름 홍보 및 판매행사를 대규모로 실시하고 있으면, 유럽 등지의 패션쇼에도 참가하여 풍기인견의 우수성을 알리고 있다.

정말 바쁘게 영주를 둘러보았다. 당일치기 일정으로 나는 감기까지 걸린 몸으로 무리하게 돌았더니, 서울로 돌아와서 일주일을 고생했다. 하지만 친구들에게 영주의 진면목을 짧은 시간이지만, 많이 보여주어 기분은 좋았다.
#부석사 #소수서원 #영주선비문화축제 #선비촌 #풍기인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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榴林 김수종입니다. 사람 이야기를 주로 쓰고 있으며, 간혹 독후감(서평), 여행기도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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