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슬비' 권오순 선생, 편지가 맺어준 인연

아동문학가 고 권오순 선생님

등록 2012.05.21 17:42수정 2012.05.21 1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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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히 30년은 넘었으리라. 고등학교 재학 때 아니면 졸업한 직후 즈음이 될 것이다. 나는 그때 부모님을 잃고 홀로 살아가고 있었다. 고아의 삶이란 늘 팍팍하게 마련이지만 어버이날이 낀 5월은 더 했다. 그때 겪어야 하는 정신적 빈핍함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주위 친구들은 부모님께 달아드린다며 붉은 카네니션을 장만해서 모처럼의 효심을 발휘할 때, 나는 그럴 수도 없었다.


그때 한 신문 기사가 눈에 번쩍 띄었다. 부모가 계시지 않는 사람은 붉은 카네이션 대신 하얀 꽃을 자신의 옷에 달면 된다는 기사였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것도 안 될 말이었다. 부모님 유고(有故)의 사실을 만천하에 알리고 다니는 격밖에 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부모님께 효도 한 번 못한 몸이 흰 꽃을 달고 다닌다고 불효가 상쇄되지 않을 것이다. 이래 저래 고아는 외롭게 마련인가.

내가 권오순 선생님을 만난 것은 정확히 언젠가 기억나지 않는다. 하여튼 1970년 대 중후반 쯤 되지 않을까 싶다. 우연이었다. 모 여성 월간지를 통해 권오순 선생님에 대한 기사를 읽은 것이 인연을 맺게 된 계기가 되었으니까.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 있는 것은 그분이 '송알송알 싸리잎에 은구슬~'로 시작하는 '구슬비'의 작자라는 것과 그분이 지체 장애인으로 거동이 불편하다는 것, 독신으로 어렵게 살고 있다는 것 등의 내용이다.

동요 '구슬비'는 초등학교 국어 교과서에도 실려 있었고, 또 아름다운 곡이 붙어 음악책에도 수록되어 있는 꽤 유명한 작품이었다. 그럼에도 그것을 지은 작가를 나는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 당시 나는 신문 잡지에 이름이 오르내리는 사람을 내심 유명인 취급을 했다. 평범한 사람과는 어딘가 다른 특별한 신분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감성이 풍부했던 청소년기 나는 그런 사람들에게 편지를 보냈던 적이 있다. 유명 정치인, 재벌회사 회장, 문인, 잘 나가는 연예인 등을 수신인으로 한 나의 편지에 답장을 주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 여성 월간지에 몇 쪽에 걸쳐 취재 기사가 실린 아동문학가 권오순 선생님은 좀 다를 것 같았다. 그분을 만나보고 싶었다. 나는 먼저 여성 월간지 담당 기자에게 권오순 선생님께 편지를 올리고 싶은데 연락 주소 좀 알려 달라는 사연을 담아 편지를 보냈다. 그런데 이것도 답장이 오리라는 것을 장담할 수 없었다. 속된 말로 '밑져봤자 본전'이란 마음으로 편지를 보냈던 것이다. 담당 기자는 녹색 선이 그어진 200자 원고지에 만년필로 일필휘지(一筆揮之)해 답장을 보내 온 것이다. 원고지에 세로로 써내려간 글도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은 그때 처음 발견했다. 권오순 선생님 주소뿐만 아니라 기자가 나에게 주는 격려의 글까지 덧붙여져 있었다.

마음이 콩닥거렸다. 금단의 구역을 침범하는 악동이라도 되는 듯 마음이 들떴다. 나는 바로 그 주소로 편지를 보냈다. 장문의 글이었던 것 같다. 보나마나 나의 인생 여정이 담겨 있었을 것이고, 문학에 관심이 많은 청소년이라는 내용도 있었을 것이며, 예의 그 어버이날 흰 꽃 사연도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여러 이야기 중 핵심은 사정이 허락되면 찾아뵙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건강이 좋지 않으신 권 선생님께서 내 편지를 읽기 힘들지도 모른다는 노파심에 조금씩 시간 여유 있을 때 쉬면서 읽으시라고 썼었다.


편지 받아서 읽고 쓴 기일을 생각해도 답장은 생각보다 빨리 왔다. '명재 님은 나의 건강을 염려해서 무리하지 말고 여유를 갖고 천천히 편지를 읽으라고 했지만 편지의 내용이 그렇게 할 수 없게 만들었다'며 편지를 보내고 답장 받고 싶은 심정을 권 선생도 너무나 잘 안다고 했다. 그분은 그때 서울 정릉에 살고 있었다. 한옥의 문간방을 빌려 살고 있었는데, 내가 처음 권 선생을 뵈러 갔을 때는 이웃한 동생네 집에서 만났다. 지금 추측해보니 나를 손님으로 생각하고 그래도 응접실이 있는 동생 집에서 맞고 싶었던 것이다. 바로 밑 동생이라고 알고 있는데, 동생은 모 중학교 교장 선생님을 남편으로 두고 어렵지 않게 살고 있었다.

같은 하늘 아래 살면서도 자주 방문할 수는 없었다. 독신으로 혼자 사시는 분이, 그것도 지체 장애로 거동이 몹시 불편한 분이 갈 때마다 이것저것 챙겨 주시느라 많은 신경을 쓰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그가 살던 방은 매우 단촐했다. 좁은 단칸방에서 단박에 눈에 들어오는 물건은 재봉틀이었다. 그는 삯바느질로 근근이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러니 재봉틀은 수입원의 제일가는 도구가 되는 셈이다. 그리고 그분이 아동문학을 하는 분이라는 사실을 눈치 채고 있는 사람들은 책꽂이도 없이 책 모서리에 세워두고 있는 <소파 방정환 전집>도 눈에 들어왔을 것이다.


권 선생님이 '구슬비'를 써서 아동문예잡지사에 보낸 것은 1936년이었다. 하지만 일제의 문화 말살 정책에 영향 받아 잡지사가 폐간되는 바람에 발표가 되지 못했다. 그런데 어떤 연유에서인지 이듬해에 만주 용정에서 발행되던 <가톨릭 소년> 지에 실리게 되었다. 권 선생님은 그 후 40여 년이 경과한 1976년에 새싹회에서 수여하는 새싹문학상을 받았다. 작품 활동을 시작한 후 40년이 지났고, 그의 나이는 60을 문 앞에 두고 있던 때였다.

새싹문학상을 수상하고 그의 문학이 인정을 받게 되자  아동문학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 권 선생님의 이름이 오르내리게 되었다. 마침 소파 방정환 선생의 아드님이 소식을 듣고 축하하는 뜻에서 선친의 전집을 선물로 가져왔다고 한다. 권 선생님과 나와의 편지 왕래는 지속되었다. 그분의 편지에는 손수 정한 법도(法度)가 있었다. 편지지는 늘 양면괘지를 사용했다. 값이 쌀 뿐만 아니라 잉크 흡수가 빠르기 때문이라고 했다. 편지 봉투는 꼭 지난 달력을 규격에 맞게 잘라 붙여서 만들었다. 그의 편지를 받으면 정성과 사랑이 진하게 느껴졌다.

내가 대학에 진학하고 혼란한 시국에 휘말리는 일이 잦아 권 선생님과의 연락도 더 이어지지 못하고 말았다. 하지만 늘 그분의 맑은 이미지가 뇌리에 남아 있어 내 삶에 청량제가 되었다. 전화가 귀한 시절이라 그분과 나를 간간히 연결시켜주는 고리는 그가 선물로 준 동시집이 유일했다. 그래도 세월은 꾸역꾸역 흘러갔다. 대학을 졸업하고 많은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아동문학가 권오순 선생님과의 추억이 새삼 떠올랐다. 나는 그분이 살던 집으로 찾아갔다. 이사를 갔다고 했다. 하지만 어디로 갔는지는 모른다고 했다. 나는 이웃에 살던 교장 선생님 댁, 즉 권 선생님의 동생 집을 찾아갔다. 다행이 동생이 권 선생님의 계신 곳을 알려 주었다.

어느 공휴일이었던 것 같다. 나는 제천으로 가는 시외버스에 몸을 실었다. 권 선생은 제천 백운면에 있는 한 천주교회에 거주하신다고 했다. 프란치스꼬 재속 수녀회에 소속되어 집에서 수도의 길을 걷고 있다고 했다. 시외버스로 제천 터미널에 내려 다시 시내 버스를 타고 백운면 천주교회에 닿으니 저녁 시간이 다 되었다. 권 선생님은 모든 게 불편할 시골에 와 계시지만 마음만은 매우 화평하게 보였다. 손님 용 빈방이 있으니 하루 푹 묵고 가라며 마음의 안정을 다독거려 주었다. 권 선생님이 손수 만든 저녁 음식은 내 입에 딱 맞았다. 마치 오랜만에 만난 어머니가 아들을 위해 정성껏 마련한 식사처럼….

그때 아이를 시켜 한 사람을 불렀다. 천주교회에서 운영하는 유치원 교사라고 했다. 첫 눈에 매우 청순하게 들어왔다. 유행에 민감한 도회지 아가씨들과는 다른 풋풋함이 느껴졌다. 쑥색 스웨터에 짙은 청색 주름치마를 입고 있었던 것 같다. 심훈의 상록수에 나오는 채영신이 갑자기 떠올랐다. 그는 사람을 대하는 자세도 또 식사를 하는 태도도 아주 다소곳해서 금세 친근감을 갖게 했다. 우리는 식사 뒤에도 짧지 않은 시간을 문학과 역사 그리고 신앙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아가씨와는 여러 부분에서 공통점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지금도 그때 권 선생님이 유치원 교사인 그 아가씨를 저녁 식사에 동석시킨 이유를 모르겠다. 처녀 총각을 자연스럽게 만나게 해 긴 연분을 맺어주고 싶어서였을까. 서울에 올라와서 생활하면서도 권 선생을 떠올릴 때면 그 아가씨도 함께 떠올랐다.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 여인상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몰래 해 보았다. 하지만 권 선생님에게 그 아가씨에 대한 안부는 더 이상 물어보지 못했다. 때 묻지 않은 청순한 여성을 그리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그리고 또 세월이 많이 흘렀다.

나도 결혼이라는 것을 했다. 아이들을 낳고 자동차도 한 대 장만하고 그래도 조금은 여유가 있다고 생각될 때, 제천 백운 천주교회에 가고 싶었다. 권 선생님이 보고 싶었다. 그날 저녁 식사를 함께 하고 차를 들면서 오랜 시간 함께 상상의 나래를 펼쳤던 그 아가씨는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어느 국경일이었던 것 같다. 아내와 두 아이를 차에 태워 제천을 향했다. 가족과 동승해서 여행을 할 때는 몇 가지 마음이 겹치기 마련이다. 그 때 제천행 여행이 그랬다. 마음이 가볍지 않았다. 모두가 가시권 밖에 있었다. 권 선생님이 그곳에 아직껏 계시는지, 건강은 어떠신지, 작품 활동은 계속 하시는지, 유치원 교사였던 그 아가씨는 지금도 그곳을 지키고 있는지….

직접 차를 몰고 가면 목적지가 더 가깝게 느껴져야 할 텐데, 영 그렇지가 않았다. 몇 년 전, 버스를 몇 번 갈아타고 올 때보다 더 멀고 힘든 길 같았다. 왜 그럴까? 권 선생님께 아내를 며느리로 그리고 아이들을 손주로 소개 올리겠다는 다짐까지 했는데 말이다. 제천 백운 천주교회에 당도하니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평화로운 분위기에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권 선생님은 거동하시기가 더 힘들어져 수원에 있는 한 노인요양원으로 옮겼다고 했다. 주소와 전화번호를 적어 주며 올라가는 길이니 혹 방문하실 의향이 있으시면 연락을 취해 놓겠다고 했다. 나는 그러겠노라고 응답했다. 내 뇌리에 아리땁게 남아 있는 그 유치원 교사에 대한 안부를 물어볼까 하다가 나는 묻지 않았다.

우리는 올라오면서 수원 평화의 모후원을 방문했다. 권 선생님은 많이 쇠약해져 있었다. 젊었을 때도 몸이 약했던 분인데, 연세와 함께 몰려오는 노쇠현상으로 몸집이 더욱 가벼워져 있었다. 우리는 과일을 내려놓고 휠췌어를 밀고 확 트인 베란다로 나왔다. 몇 가지 소식들을 전해 주었다. 책을 한 권 냈는데 이것이 마지막이 될 것 같다는 이야기, 젊은이들이 타야할 아동문학상을 노인인 당신이 타서 미안하다는 이야기, 그리고 교장으로 일하다가 은퇴한 제부가 갑자기 쓰러져 세상을 떴다는 이야기 등을 알려 주었다. 권 선생님은 내가 결혼을 하고 아이들까지 가진 것에 대해 무척 좋아하셨다. 말로 표현은 하지 않지만 마치 며느리와 손주들을 대하는 기쁨을 느끼는 것 같았다.

권오순 선생님은 소녀 같은 마음을 잃지 않고 사시다가 가셨다. 주위에선 그분을 영원한 소녀라고들 말한다. 그런 마음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이 동시(童詩)이다. 동시는 순수한 마음 맑은 마음을 갖고 있지 않으면 나오지 않는 글이다. 그분의 대표 작품은 '구슬비'이다. 부슬비는 있어도 구슬비는 사전에 없다. 이것은 권 선생님이 만들어 낸 단어이다. 은구슬 옥구슬 등이 모여 구슬 묶음이 된다. 구슬비가 싸리잎에 맺혀 은구슬이 되고, 거미줄에 맺혀 옥구슬이 되었다. 참으로 아름다운 발상이다. 이런 문학적 상징은 그 청정함 때문에 오랜 세월 생명력을 잃지 않는 것 같다.

세살 때 소아마비에 걸려 평생 장애의 몸을 이끌고 오면서도 마음만은 깨끗함을 잃지 않았던 분, 학교라곤 문 앞에도 가보지 못한 사람, 혈혈단신 월남해서 삯바느질로 생계를 이어간 일, 그런 와중에도 성모원이라는 고아원에 가서 부모 없는 아이들에게 사랑을 베푼 일, 재속 수녀의 길을 걸으면서 주님께 충성하며 산 일평생, 권 선생은 마지막 거주 처인 수원 평화의 모후원에서 1995년 7월 11일 생을 마감하고 하나님의 품에 안겼다. 이런 생이 참으로 아름다운 삶이 아닐까?
#권오순 #아동문학가 #새싹문학상 #재속수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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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 향기 그윽한 김천 외곽 봉산면에서 농촌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세상과 분리된 교회가 아닌 아웃과 아픔 기쁨을 함께 하는 목회를 하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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