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대사거리와 전남대 정문을 잇는 길. 이곳에 있었던 어느 라면집 아저씨는 계엄군으로부터 나를 숨겨줬다.
소중한
19일 월요일 아침, 안경을 찾기 위해 학교에 가는 버스를 탔다. 당시 집이 농성동이었는데 학교에 가기 위해서는 산수동과 광주교육대학교를 거치는, 꽤 돌아가는 버스를 타야만 했다.
한참 버스를 타고 가는데 광주교대 앞에서 군인들이 버스를 세웠다. 버스에 오른 군인들이 신분증 검사를 하기 시작했다. 학생증을 꺼내 내미려는데 전날 어머니가 "군인들이 학생들이라면 가리지 않고 잡아 가더라"라는 말이 떠올랐다. 걱정되는 마음에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내 학생증을 본 군인은 이어 나를 쳐다보고 나서 학생증을 돌려줬다. 버스에선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전남대를 향해 버스는 계속 달렸다.
지금은 전남대 정문 근처에도 버스정류장이 있지만 당시는 전남대 정문에서 약 300m 떨어진 전남대사거리까지만 버스가 다녔다. 전남대사거리에 내린 나는 학교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그런데 학교 정문이 보일 쯤, 갑자기 누군가 내 팔을 잡아당기더니 자기 집으로 끌고 갔다. 너무 놀라 영문도 모르고 끌려가다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자주 가던 라면집 아저씨였다.
"위층으로 올라가 숨어있어. 지금 학교 쪽으로 가면 위험해서 안 돼."아저씨의 말에 버스에서 신분증 검사를 하던 군인들 생각까지 더해지자 덜컥 겁이 났다. 그래서 아저씨가 시키는 대로 잠자코 숨어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저씨가 나를 불렀다. 아저씨는 "이제 내려와도 된다"며 "왜 학교에 가려 하냐"고 물었다. 나는 학교에 안경을 찾으러 간다고 말했다. 아저씨는 매우 흥분된 어투로 "어차피 지금 학교에 못 들어가니 학교 쪽으로 가지 말고 집에 돌아가라"고 말했다.
꽤 긴 시간이 흘러, 내가 안경을 찾으러 학교에 간 바로 전날, 즉 18일 오전에 전남대 정문에서 큰 충돌이 있었음을 알게 됐다. 17일 24시 계엄령 확대와 함께 대학에 휴교령이 내려지면서 이에 항의하는 학생과 계엄군이 전남대 정문 앞에서 대치했고, 결국 학생들이 무자비한 폭력의 희생양이 된 것이다. 이 사건은 5·18 민중항쟁(이하 5·18)의 도화선이 됐고, 전남대 정문은 5·18 최초 충돌지라 불리며 지금도 기억되고 있다. 당시 전남대 정문 근처에서 라면집을 운영하던 그 아저씨는 18일 오전의 장면을 목격했고, 이후에 비슷한 일이 수차례 일어나 격앙돼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던 중 19일 단골인 내가 아무것도 모른 채 학교를 향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내 팔을 잡아 끈 것이다.
군인과 대치한 시민들... 어느덧 나도 시위대 안으로학교를 뒤로하고 다시 전남대사거리 쪽으로 나갔다. 버스를 타려 했는데 버스가 끊겼다는 말을 들었다. 아마도 계엄군에 의해 버스가 통제된 것 같았다. 이전 정류장을 따라가면 버스를 탈 수 있겠다는 생각에 버스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하지만 몇 정류장을 지나도 버스는 계속 통제된 상황이었다. 버스 타는 것을 반쯤 포기하고 광주고등학교를 지나 대인시장 부근에 이르렀다. 그리고 거기서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했다.
대인시장 쪽으로 군인들이 줄지어 있었고, 광주고등학교 쪽으로 얼마 떨어지지 않아 시민들이 웅성거리며 대치해 있었다. 일부 시민들은 돌을 던지기도 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분노가 치밀었다. 국가를 지키고 국민을 보호해야 할 군인이 왜 저렇게 길을 막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나도 어느 순간 시위대 안에 합류해 있었다.
계엄군이 무섭게 달려들었다. 명령이 떨어졌던 모양이다. 대치해 있던 시민들이 일제히 흩어졌다. 나도 달려드는 계엄군을 보고 달아나는 것 외엔 다른 생각을 하지 못했다. 하천을 따라 한참을 달리는데 어느 아주머니가 자신의 집으로 나를 이끌었다. 전남대 정문의 라면집 아저씨와 마찬가지로 아주머니도 여러 차례 계엄군의 만행을 목격한 듯했다. 그 집엔 나를 포함에 4명(혹은 5명)의 학생이 있었다. 나를 제외하곤 모두 남자였고, 그들은 모두 아는 사이였다. 자신들을 법대생이라 소개한 그들은 나의 학과와 학년을 물었다. 그리고는 서로 '작전 회의'를 하기 시작했다.
아주머니는 나에게 마루에 있는 피아노에 앉아 연주하는 연기를 하라고 했다. 이제 막 대학에 들어간 여학생인데다 그렇게 투쟁심이 있어 보이진 않아서였는지 내가 피아노에 앉아 있으면 계엄군에게 혼란을 줄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나보다. 그 사이 그 법대생들은 자신들의 작전 회의에 따라 화장실과 부엌 한 켠에 매복을 하고 있었다. 버스에서 신분증 검사를 하던 때, 라면집에 숨어 있을 때와는 차원이 다른 공포가 엄습했다.
다행히 계엄군들이 집 안까지 수색을 하진 않았다. 아주머니의 "이제 괜찮겠다"는 말을 듣고 그 집에서 나왔다. 빨리 집으로 가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계엄군이다"라는 외침을 수차례 들었다. 어디서 들리는지 알 순 없었지만 그 소리의 반대 방향으로 도망을 가야하는 것은 그 외침에 대한 분명한 답이었다. 하늘에서는 비행기가 떠돌며 "시민 여러분, 불온 세력에 의해 혼란이 일고 있으니 빨리 집으로 귀가 하십시오"라고 방송을 해댔다. 또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집에 갈 수 있게 해줘야 갈 것 아냐.'"계엄군 오늘 저녁에 들어온다"... 어느날 집 앞에 선 탱크 11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