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보 들고 뒷산에 올라 독립만세 부르자"

의성여행 (43) 경북지역 최초로 3·1운동을 일으킨 비안 '읍내'

등록 2012.05.30 14:14수정 2012.05.30 1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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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리원에서 비안으로 가는 도로변에 세워진 장승들이 '옛고을 비안'을 자랑하며 '날마다 좋은 날 되소서' 하고 덕담을 건네고 있다. ⓒ 정만진


경상북도 의성군 구천면 청산리에서 비안면으로 가려면 청화산 동남쪽 비탈을 넘어야 한다. 군위군 소보면의 땅을 잠깐 지나면 도로는 이내 비안면 '읍내'에 닿는다. 비안이 '면'이니 '읍내'가 있을 수 없지만 그래도 사람들은 그곳을 그렇게 부른다. 

비안은 본래 아화옥현이었는데,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비옥현으로 이름이 바뀐다. 같은 해에 안현현으로 바뀌었던 비안 북쪽의 아시혜현은 1018년(고려 현종 9) 안정현이 된다. 그리고 1421년(세종 3), 비옥현과 안정현은 합해져 안비현이 되고, 1423년 다시 비안현으로 이름이 바뀐다.


1885년(고종 32) 비안현은 비안군이 된다. 그렇게 바뀌어가는 역사 속에서 비안군의 중심지는 지금의 동부동과 서부동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지금도 예전의 그 이름 '읍내'를 아직도 사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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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안 사람들은 3.1운동 경북 시발지 기념공원 입구에 세운 마을 안내 빗돌에도 '옛고을 비안'이라 선명하게 새겨 전통과 역사에 대한 자부심을 드러내고 있다. ⓒ 정만진

하지만 비안군은 1914년 땅의 일부를 예천군에 넘겨주면서 폐지되어 의성군에 통합된다. '군'의 지위를 잃고 다시 '현(면)'으로 돌아가고 말았으니, 이곳 사람들의 마음은 참으로 허망해지고 말았다.

사람들은 그 허망한 마음을 곳곳에 남겼다. 서부동 입구에 '比安(비안)' 두 글자를 새긴 커다란 돌비석을 세우면서 '옛고을' 세 글자를 함께 넣은 것도 그 결과이다. 대구와 안동을 잇는 5번 국도를 가다가 도리원에서 28번 국도로 좌회전하면 금세 비안 땅에 들어서는데, 바로 그 지점에 '옛고을, 비안입니다'라는 장승을 세워둔 것 또한 마찬가지이다.  

비안은 병옥(屛屋), 병산(屛山)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산이 병풍처럼 에워싼 마을이라는 뜻의 이름이다. 지금도 병천(屛川)을 굽어보는 서부동의 넓은 언덕 위에는 병산정이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병산정은 고려 때 문하시중(지금의 국무총리)을 지낸 병산군 박우를 기리는 재실이다.

1428년 일본에 가는 초대 통신사를 지낸 박서생(朴瑞生) 선생이 박우의 후손이다. 길재의 뛰어난 제자로 개혁 정치가였던 그는 구천서원에 모셔졌다.


하지만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따라 구천서원은 사라지고 말았다. 지금 서원이 있던 그 장소에는 선생의 이름과 돌아가신 날짜를 적은 위패만 묻혀 있을 뿐이다. 구천서원의 현장에 가도 서원 건물은 볼 수가 없고, 다만 '구천서원 육선생 매판소'라는 작은 비석만 있을 뿐이다.

병산정은 그 사실을 안타까워 한 공의 후손들이 힘을 합쳐 1989년에 다시 지은 건물이다. '병산군 박우지단(朴瑀之壇)' 비석 옆에는 20년간 '비안(병산)박씨' 종친회장으로 일한 '屛岩(병암) 朴汀洙(박정수) 회장 사적비'도 세워져 있다.

3·1독립운동 경상북도 시발지 '동부동과 서부동'

박우와 박서생의 후손들을 비롯, 많은 비안 사람들이 대를 이어 살아온 '옛 고을' 동부동과 서부동은 경북 전역에서 가장 먼저 1919년의 3·1운동을 펼친 지역이다. 그래서 마을 뒷산에 '기미 3·1독립운동 경상북도 시발지(始發地) 기념탑'이 굳건히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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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우 선생을 기리는 재실 '병산정' ⓒ 정만진

탑으로 가는 길 좌우로는 태극기들이 줄을 지어 바람에 휘날리고 있다. 마을 입구인 '옛 고을 比安' 돌비석 앞에서 바라보아도 태극기들은 너무나 선명하다. 이곳에 와서 탑을 찾지 못할 일은 없다.

태극기가 끝나면, 눈앞에 시원한 풍경이 벌어진다. 비탈진 언덕에 꽃과 나무들이 넓게 심어져 있고, 여기저기 기념탑과 비석들이 알맞게 서 있어 그저 잘 가꾸어진 공원처럼 느껴진다.

이 공원에는 시발지 기념탑 외에도 많은 비석들이 있다. '3·1 독립 운동 기념탑', '순의사 두곡 박공 유허비', '순국지사 현호 박석홍 기념비', '3·1 독립투사 기념비', '임란 의병장 백계 김희공 충의비' 등이다.

역사유적이나 문화재를 답사했을 때 그 앞의 안내판부터 읽어보아야 하듯이, 이곳 역시 가슴 아프게 서려 있는 역사를 먼저 알고 참배하는 것이 도리이다. 따라서 1919년의 만세운동을 일으켰던 당시 사람들이 살았던 집들, 다녔던 학교와 교회, 일했던 들판을 모두 굽어 내려보는 곳, 그것도 실제로 "대한독립만세"를 목이 터져라 외친 현장이기도 한 바로 그 자리에 세워져 있는 '기미 3·1독립운동 경상북도 시발지 기념탑'의 내용을 꼼꼼하게 읽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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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경북 시발지 기념탑과 만세를 부르는 선열들이 비를 맞으며 비안 '읍내'를 바라보고 있다. ⓒ 정만진

➳ 경상북도 3·1 만세운동 시발지
- 우리 고장의 3·1운동사

∘ 3월 1일 서울 탑골공원에서 독립 만세운동 33인 대표 손병희

∘ 3월 3일 김원휘(쌍계교회 조사) 평양신학교 입학하러 갔다가 3·1독립만세운동 목격 귀향하다.

∘ 3월 7일 쌍계리 박영화 박영달 박영신 배중엽 배달근에게 감격적인 소식을 전달하고 의거를 권유하였다.

∘ 3월 8일 박상동(계성학교 재학) 박우완 등 대구 서문시장 의거에 참가한 뒤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와서 의거 소식을 전파하였다.

∘ 3월 9일 비안 공립보통학교 상급 학생 중 급장 우희원 정인성 박만녕 등이 박기근 집에 모여 3월 11일 비안 장날 거사를 계획하다.

∘ 3월 10일 밀회를 거듭 3월 13일 쌍계교회 신도들 주축이 되어 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하고 박영화 배중엽 배달근 박영달 등이 박영신 집에서 태극기 200여 개를 제작하였다.

∘ 3월 11일 오전 11시 비안 공립보통학교 전교생을 아카시 나무 밑에 모아놓고 방과후 비안시장에서 일어날 만세운동에 참가하도록 알렸다.

"오늘 비안시장에서 독립만세를 부를테니 수업을 마친 후 비안시장에 모여라."

비안주재소 경찰이 정보를 입수하고 시장에서 삼엄한 경계를 펴는 바람에 실패했고 일본인 교장은 급장들에게 퇴학시킨다고 위협하였다. 주동인 급장들은 내일 다시 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하고 해산했다.

∘ 3월 12일 일찍 등교한 주동 학생들은 등교하는 학생들에게 수업이 시작되는 준비종이 울리면 뒷산에 모여 거사하자고 연락하였다.

"지금부터 뒷산에 올라가 독립만세를 부를 테니 모두 책보를 들고 목단봉에 모여라."

전교생 150여 명은 책보자기를 들고 준비종이 울리자 일제히 목단봉에 올라 "독립 만세" 소리 높여 외쳤다. 교장의 훈시를 듣던 4명의 급장도 학생들의 만세 함성을 듣자 교장의 설교를 뿌리치고 전교생과 합류하여 목이 터져라 "대한독립만세"를 연호 고창하게 되었다.

주재소 일본놈 경찰들과 교사들이 달려와 학생들을 강제 해산시키고 주동자 우희원 박기근 정인성은 현장에서 검거되어 혹독한 고문을 치르고 징역 8월의 형을 언도받아 투옥되었으며 박만녕은 탈출했다가 뒤에 검거되어 옥고를 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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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경북 시발지 기념탑 앞에서 바라본 비안 '읍내'의 풍경. ⓒ 정만진



∘ 3월 12일 정오 쌍계동에서 기독교 신도들과 학생 주민 등 200여 명이 태극기를 들고 마을을 누비며 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위하다가 뒷산에 올라가 다시 "독립만세"를 부른 뒤 해산하였다.

급보를 받은 의성경찰서 경찰부장은 오후 4시 비안주재소 경찰을 지휘하여 주동인물 5명과 추가로 13명이 검거되어 옥고를 치렀다.

주동자 박영화는 끌려가면서도 "오금을 끊을 놈들! 의인의 나라는 망하지 않는다!"면서 일본놈 경찰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고 전해오고 있다. 

∘ 3월 12일 전국 각지에서 요원의 불길처럼 일어나는 독립만세운동에 발맞추어 동부동 서부동에서 의거를 단행하고자 나선 애국청년 김석근 임재호 박후도 박홍섭 등이 김석근 집에 모여 만세운동을 일으켜 독립을 쟁취할 것을 맹약하고 태극기 120여 개를 제작하였다.

∘ 3월 13일 밤 8시경 비안 시장에 50여 명의 농민들이 태극기를 나누어 가지고 동부동과 서부동을 오가며 선창에 따라 "대한 독립 만세"를 부르며 시위를 전개하니 군중들은 100여 명이 넘게 되었고 24명이 검거되어 옥고를 치렀다.

∘ 3월 16일 오후 3시경 비안 장날 김석근 손동일 임재호 박후도 박홍섭은 모인 군중 50여명과 태극기를 들고 "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위를 전개하다가 경찰의 출동으로 해산했으나 그후 주동인물을 포함한 22명이 검거되어 옥고를 치렀다.

오후 9시 이두동과 장춘동에서도 아동들이 주동하여 농민들과 150여 명이 함께 만세 시위를 일으켰으나 경찰들의 출동으로 해산되었다.

➳ 인근 지역으로 확산

안평면 대사동, 3월 15일 오후 7시 100여 명
안평면 석탑동, 3월 16일 밤 50여 명
봉양면 사부동, 3월 17일 저녁 100여 명
봉양면 도리원, 3월 19일 장날 수천 명, 권해운 현장에서 순국
점곡면 사촌동, 3월 18일 10일 수백 명
의성읍, 3월 18일 오후 4시 시장에서 수천 명
신평면 덕봉동, 3월 25일 오후 9시 50여 명
춘산면 금오동 4월 3일 모의 누설 실패
가음면 귀천시장에서도 만세운동이 일어나게 되었으며 다른 지역 시군으로 확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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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에서 바라본 비안 읍내의 '3.1운동 경북도 시발지 기념탑'의 모습 ⓒ 정만진


➳ 서기 1919년 3월 12일 비안보통학교 만세의거

우희원 징역 8월     박기근 징역 8월
정인성 징역 6월     박만영 징역 3월

➳ 서기 1919년 3월 12일 쌍계교회 만세의거

박영화 징역 2년     김원휘 징역 1년 6월   박영신 징역 1년    
배중엽 징역 1년     박영달 징역 1년       배달근 징역 1년
이일만 징역 6월     김명출 징역 6월       배도근 징역 6월    
박인욱 징역 6월     박세길 징역 6월       배용석 징역 6월
배용도 징역 6월     서금이 태형 90         박충식 태형 90     
최점문 태형  90      배용운 태형 90        이복근 투옥

➳ 서기 1919년 3월 13일 비안시장 만세의거

박준도 징역 10년    임재호 징역 10년     박홍섭 징역 11년   
김석근 징역 10년    손동일 징역 6년      김길도 징역 6년
김성수 징역  6월     조말동 징역 2월      박말수 태형 90     
신석이 태형  90      황돌이 태형 90        김성근 태형 90
김명강 태형  90      김삭불 태형 90        변용이 태형 90     
김치산 태형  90      김성한 태형 90        박술이 태형 90
최성우 태형  90      홍석이 태형 90        배만조 태형 90     
최용이 태형  90      김차이 태형 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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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안 '읍내'의 3.1운동 경북 시발지 기념탑 앞의 만세 조형 ⓒ 정만진

강조하자면, 내용을 모두 적어보는 것이 교육적이다. 특히 자녀와 함께 이곳을 답사하였다면 부모가 먼저 그 일을 실천해야 한다. 그래야 아이들이 본을 받는다.

죽고, 다치고, 감옥에 갇히고, 매질을 당한 독립운동가들의 고난에 견주면, 이 정도 기록하는 정도야 그 분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에도 미치지 못할 것이다. (그런 뜻에서 '탑'에 새겨져 있는 글의 전문을 위에 실었다. 독립운동 선열들의 정신이 널리 전파되는 데에 기자의 작은 노고가 보탬이 되기를 소망하면서.)

기념탑의 동상은 다섯 명의 열사들이 피끓는 독립 의지를 불태우는 모습을 보여준다. 세 분의 어른들이 한복을 입고 서서 태극기를 휘날리며 횃불을 치켜들고 있다. 주먹을 불끈 쥔 채 "대한독립만세"를 부르짖고 있다. 그 앞에는 두 아이가 있다. 남자 아이는 굳게 주먹을 치켜올리며 앞을 노려보고 있다. 오른손으로는 여자아이의 어깨를 감싸고 있다. 여자아이는 분노를 참을 수 없어 울음을 터뜨린 듯, 머리를 남자아이의 왼 주먹에 기대고 있다.

마침 비가 왔다. 빗물이 흘러내려 독립열사들을 적시고 있었다. 얼굴 위로는 빗물이 흘러내렸다. 눈물이었다. 식민지의 서러움에 북받쳐 흘리는 원통한 눈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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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읍내'에서 경북 지역 최초의 3.1운동이 일어나는 데에 크게 이바지했던 이곳 교회의 첨탑에 초저녁을 맞아 붉게 불이 들어왔다. ⓒ 정만진


빗물은 얼굴을 적시고, 흘러내려 목에 물줄기를 만들고, 다시 옷 위에 짙고 커다란 강을 만들고 있었다. 그렇게 흘러흘러 땅을 물들이고 있었다. 그것은 피(!)였다. 죽음과 고문, 감옥살이와 폭행이 우리의 독립열사들을 짓눌러 붉은 피로 이 땅이 젖고 있었다.

1919년 그 날을 떠올리며 탑 앞에서 잠깐 묵념을 한다. 일제가 난사하는 총소리, 쓰러지는 열사들, 감옥, 무자비한 폭행이 떠오른다. 어린 학생들이 바로 이 자리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장면도 꿈결인 양 눈앞에 떠오른다.

고개를 드니, 독립열사들은 여전히 멈추지 않고 "대한독립만세!!"를 줄기차게 부르짖고 있다. 그 분들 덕분인지, 이제 비가 그치고, 위천 넘어 저 멀리 화장산 아래까지 들판은 어느 샌가 제 얼굴빛을 찾아가고 있고, 가로로 길게 이어지는 산능선 위 의 하늘도 파랗게 바뀌어가고 있다.

문득 초저녁, 마을 안 교회의 첨탑 위 십자가에는 발그레 불이 들어와 있다. 첨탑 위 붉은 십자가는 마치 1919년을 피와 땀으로 장식했던 어린 학생들의 상기된 얼굴빛만큼이나 선명하다.
#의성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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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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