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에서 잠만 자는 그의 소원은?

[학생부장 일기 15] 없던 자존감을 일깨워주는 게 교육!

등록 2012.06.08 19:29수정 2012.08.24 16:25
0
원고료로 응원
엊그제(6월 6일) 초등학생 아이들이 참가하는 풋살대회가 열렸다. 열 살 바기 아들 녀석이 참가한다며 밤잠 못자고 설레어 하기에 응원도 할 겸 함께 참여했다. 모두가 울긋불긋 축구화에다 근사한 유니폼까지 맞춰 입어 모양새만큼은 국가대표 못지않다. 참가팀 면면을 보니, 가까이는 대회가 열리는 동네에 사는 아이들부터 멀리는 배와 차를 갈아타고 두세 시간은 족히 걸려 와야 하는 도서벽지의 팀도 있었다.

학년별로 나뉘어 리그전을 치러야하니 아침부터 해질 때까지 종일 뛰어야 하는 강행군이지만 아이들의 표정에는 전혀 지친 기색이 없다. 헛발질은 예사, 자기 몸뚱이만 한 공에 걸려 넘어지기도 하고, 두 다리 사이로 '알 까는' 게 다반사지만, 자기 사는 고장과 학교를 대표한다는 자긍심 때문인지 승부에 대한 집착은 여느 대회 저리가라다.

그런데, 경기가 열리는 운동장 구석 언저리에서 데면데면하게 혼자 공을 가지고 노는 아이가 있었다. 유니폼도 입지 않은데다 덩치가 산만한 것이 초등학생은 아닌 것 같았다. 공을 다루는 실력이 예사롭지 않아 무작정 다가가 말을 걸었다.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이 대회에 참가해 우승 경험이 있다는 'OB'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중학생이 되어 더 이상 참가할 수는 없지만, 후배들 공차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 집에서 20킬로미터가 넘는 거리를 버스를 두 번이나 갈아타고 왔다고 했다. 얼마나 공을 차고 싶었으면, 손에 공을 든 채 오십 리 길을 마다 않고 왔을까 하는 생각에 어째 좀 짠했다. 그러면서 엄마는 자기가 학원에 간 줄로 아신다며 천진난만하게 말했다.

작년 그를 데리고 대회에 참가했다는 코치의 말씀에 따르면, 그는 애초 공부에는 별 관심이 없는 아이라고 했다. 학교에 결석하는 일은 없지만, 수업시간 종일 엎드려 잠만 자는 문제아라는 거다. 공부뿐 아니라 학교생활 그 어디에도 마음 붙이지는 못하지만, 축구 얘기만 나오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축구광이란다.

초등학생 후배들 경기를 먼 발치에서 부러운 눈으로 물끄러미 쳐다보는 그의 모습이 안쓰럽다. 그러나 함께 뛰고 싶어 안절부절 못하는 그의 눈빛만큼은 무더운 날씨에도 초롱초롱 빛났다. 따가운 햇살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온몸이 땀에 범벅이 돼도 뛰고 또 뛰는 아이들이 한두 해 전 그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골키퍼가 되어 그가 찬 공을 받아주노라니, 얼마 전 동네 도서관에서 만난 제자가 떠올랐다. 그처럼 유난히 공차는 걸 좋아하고 또 잘 하는 아이다. 가방 속에 교과서와 필통은 없어도 어딜 가든 공과 축구화는 넣고 다니며, 시간표는 못 외워도 프리미어 리그의 웬만한 팀과 선수 이름 정도는 줄줄 꿰고 있는 친구다.


그 역시 수업시간엔 주로 잠을 잔다. 밤늦은 시간까지 학원이나 독서실을 다녀서도 아니고, 그렇다고 밤새 게임을 해서 피곤한 탓도 아니다. 그저 공부에 흥미가 없다보니, 잠을 자면서 시간을 때우고, 시간을 때우기 위해서 잠을 잔다. 일과 내내 잠에 취해있다 식사시간과 체육시간에만 '맨 정신'이 돌아오는 그런 아이다.

그런데, 그가 다른 반 친구와 크게 싸운 일로 그의 부모까지 학교로 소환된 적이 있었다. 딱히 누구의 잘못이라 하기 어려운 다툼이었지만, 코피가 나고 옷이 찢기는 등 상대방의 피해가 더 커서 졸지에 가해자로 지목된 탓이다. 당사자와 보호자들끼리는 화해했지만, 정작 그는 그의 부모로부터 용서받지는 못했다.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누굴 닮아 그 모양이냐. 학원도 빼먹고 허구헌날 밖으로 싸돌아다니며 축구만 하더니 결국엔 쌈박질이냐?"

그는 머리를 숙인 채 연신 잘못을 빌었고, 그날 이후 죗값으로 평일과 주말 가리지 않고 방과 후 학원가는 시간 외에는 무조건 도서관에서 살아야 했다. 그것도 '쉬어도 좋다'는 부모의 승낙이 떨어질 때까지라니 사실상 무기한인 셈이다. 그를 만난 그날이 도서관에 '감금'된 지 한 달째였다니 그의 수업시간 모습을 알고 있는 교사로서 대견해보이기까지 했다.

휴일, 아내에게 두 아이를 맡겨놓고, 말하자면 휴가를 얻어 하루 종일 조용히 책이나 읽을 요량으로 찾은 '유토피아' 같은 도서관이 적어도 그에겐 '감옥'과 같은 곳이었다. 도서관에서 힘겹게 죗값을 치르고 있는 그를 위로해주고 싶었다. 도서관 바로 옆 인조잔디가 깔린 근린공원에 나가 어스름 해질녘까지 함께 공을 찼다. 2년 동안 그를 만났지만, 그의 생기 넘치는 얼굴은 처음 봤다.

내친 김에 학원도 빠지고 싶다고 해서, 부모도 아닌데 대뜸 그러라고 했다. 한 발 물러나 그래도 책임은 못 지겠다고 했더니, 외려 쫄지 마시라며 괄괄한 웃음을 건넸다. 학원에서 엄마한테 전화를 걸어 결석했다고 하면 혼쭐나겠지만, 그래도 괜찮다면서 이렇게 너스레를 떨었다.

"선생님 이름을 팔아 보려고요. 진로와 적성에 대해 밤늦게까지 진지한 대화를 나눴다고 하면 이해해주실 것 같은데요."

같이 저녁도 먹고, 열람실에 가방을 내팽개쳐둔 채 로비에 죽치고 앉아, 마치 서로 축구 해설가인 양 조만간 열리게 될 유로-2012에서 어느 나라가 우승하게 될지, 8강과 4강은 누가 오르게 될지 분석해 가며 재미있는 시간을 보냈다. 10시간 넘도록 함께 보냈지만, 그에게서 단 한 순간도 폭력성향은커녕 잠에 취한 눈빛을 찾아볼 수 없었다.

밤 9시가 넘어서야 하이파이브를 나누며 헤어졌다. 자판기에서 뽑은 캔커피를 건네며 던진 그의 말이 아직도 귓전을 때린다.

"오늘 하루 정말 재밌었어요. 학교생활이 오늘만 같았으면 좋겠어요. 그래도, 수업 시간에 잠 안 잘 거라는 다짐은 솔직히 못하겠어요. 알아듣지도 못하는 수업시간 가만히 앉아있는 게 너무 힘들어요. 노력은 해 보겠는데..."

부모가 벌로 보낸 도서관만이 아니다. 교사가 알아듣지도 못할 말을 쏟아내는 학교도 그에겐 '감옥'이다. 재능을 키워주고 넘치는 끼를 받아주기는커녕 단지 공부에 별 관심이 없다는 이유로 문제아로 낙인찍는 학교라면 적어도 그에게 있어서 존재할 이유가 없다. 남들 다 하는 공부고, 참고 견디는 것도 공부라고 충고하는 건 그들에게 결코 위로가 될 수 없다.

거칠게 말해서, 그들에게 밤이고 낮이고 공부만 하라고 을러대는 기성세대의 요구는 시나브로 그들을 벼랑으로 내모는 짓이다. 기실 그들은 공부만 아니라면 그 어떤 누구보다 자신감에 충만했을 아이들이다. 없던 자존감을 일깨워주는 게 교육의 본령일진대, 학교가 되레 그들의 자존감을 훼손하고 있는 꼴이다.

어제(6월 7일) 교실에서 수험생과 감독교사로 그를 다시 만났다. 전국적으로 동시에 치러진 수능 모의고사를 치르는 중이었다. 역시나 10분을 채 버티지 못했다. 깨웠더니 죄송하다며 다시 엎드려버렸다. 100분 시험이니 90분 넘게 책상에 엎드린 채 시간을 때워야 한다. 그에게 모의고사란 수능을 준비하는 과정이 아니라 인내력의 한계를 테스트하는 시간일 뿐이다.

그래도 그는 모의고사를 자주 봤으면 좋겠단다. 학교가 일찍 끝나니 뜻 맞는 얘들끼리 공을 찰 수 있어서란다. 그런 아이에게 부모가 득달같이 보내려는 학원은 무슨 소용이고, 야자는 무슨 목적일까. 어차피 모든 아이들 다 건사하지 못할 바에야 학교가 공부 잘 하는 일부라도 제대로 챙기자는 현실일진대 그들은 영원한 '아웃사이더'일 수밖에 없다.

수능 모의고사를 보는 내내 엎드려 잠자며 시간을 때우는 그 아이의 안타까운 모습은 바로 초등학생 풋살대회를 찾은 그 중학생의 미래다. 학교는 여전히 그런 아이들은 소수에 불과하다며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전가의 보도처럼 현실적 여건 상 학생들의 다양한 욕구를 학교가 개별적으로 수용하기는 어렵다고 하소연하기 일쑤다.

책상에 엎드려 눈만 껌뻑거리고 있는 그에게 다가가, 어차피 시험 포기하고 시간만 때울 거라면 재미삼아 학교에 바라는 소원 열 가지만 여분 답안지에 낙서하듯 적어보라고 했다. 일개 교사 주제에 그의 소원을 들어주지는 못하겠지만, 맞장구 쳐주며 힘이 돼줄 수는 있을 것 같았다. 학교는, 우리 사회는 정녕 그의 소원을 들어줄 수 없는 것일까.

"하루에 한 시간 이상 체육수업 하기, 동아리활동 시간 늘리기, 점심시간 연장하기, 국영수 수업 줄이기, 숙제와 수행평가 없애기, 등교시간 늦추기, 석차표 없애기..."
#학교교육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라면 한 봉지 10원'... 익산이 발칵 뒤집어졌다
  2. 2 "이러다간 몰살"... 낙동강 해평습지에서 벌어지는 기막힌 일
  3. 3 기아타이거즈는 북한군? KBS 유튜브 영상에 '발칵'
  4. 4 한밤중 시청역 참사 현장 찾은 김건희 여사에 쏟아진 비판, 왜?
  5. 5 "곧 결혼한다" 웃던 딸, 아버지는 예비사위와 장례를 준비한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