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하고 시 쓰는 농촌 마을', 꿈이 아닙니다

농민인문학, 농민운동의 새 길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얻은 깨달음

등록 2012.06.22 14:10수정 2012.06.22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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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곡마을 주민들이 농민인문학 강좌에서 강사의 강의를 귀담아 듣고 있다. 한 여름 더위를 피해 농민도서관에 모인 농민들이 강사의 강의를 들으며 농민의 삶에 대한 새로운 상상을 키운다. 죽곡농민열린도서관의 농민인문학 강좌는 여름과 겨울 농한기를 이용해서 공부하는 방식으로 지식과 농민운동을 결합한 모델을 만들어 보고 있다. ⓒ 김재형


2004년 여름에 죽곡농민열린도서관은 주민들의 자발적인 의지로 개관했습니다. 자기 집에 있던 책을 들고 나오고 만 원, 2만 원 후원금도 내고 시간을 내어 청소하고 정리하고, 어떻게 운영해야 할지 지혜를 모으는 과정까지 우리 사회에서 보기 드문 자발성에 기초한 문화 운동을 시작한 것입니다.


안에서 스스로 나오는 에너지가 고갈된 농촌 사회에서 이런 자발성이 오래 가기는 힘들었습니다. 어딘가 외부에서 오는 지원이 없으면, 어떤 사건을 일으키지 않으면 이런 자발성이 오래가지 못한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꼈고, '희망의 작은 도서관 공모'에 응모했습니다. 운이 좋았던 거죠. 한 번도 상상해 보지 못했던 상금을 받았습니다. 그 돈으로 건물을 새로 짓고 자발성이 모이면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지 확인할 수 있었던 게 이후에도 이어지는 힘이 되었습니다.

농촌에서 농민운동을 하면서 늘 고민하는 게 '어떻게 하면 자발성을 일으키는가?'입니다. 자발성은 '스스로 일어나는 힘'인데 이것을 일으켜야 하는 게 이 고민의 모순입니다. 도시였으면 좋은 생각과 가치, 활동이 있으면 사람들은 서로 모여들고 마음과 힘을 나눌 수 있지만 농촌은 그게 쉬운 게 아닙니다. 새로운 생각은 기존에 형성된 단단한 고정관념과 사회적 벽에 부딪치고, 도움을 받을 사람을 얻는 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런 사회에서 변화를 불러오기 위해서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오랫동안 해서 조금씩 조금씩 변화를 일으키고 저항감없이 받아들이도록 하는 겁니다. 작은 변화 하나도 대부분 오랜 시간의 결과입니다.

농민에게서 희망의 싹 터야 오래가는 변화 시작돼

지난해 죽곡마을시집을 만들었습니다. 이 생각을 한 지 8년만에 현실이 되게 한 겁니다. 제가 중고등학교 학생이었을 때 학교, 교회, 마을 등등 다양한 단위로 연말이면 문집을 만들었던 기억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양한 문집을 모아서 전시하고 서로 선물하는 것이 연말의 자연스런 문화 중 하나였습니다. 그런 문집을 만들어 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문집을 만드는 사회적 흐름은 이미 없어졌고, 농촌의 농민들 대부분은 글을 쓰지 않은 지가 너무 오래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문집을 만들기 위해서는 노력이 많이 들어가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이런 노력을 지원할 수 있는 재정 후원이 필요했습니다. 또 한번 운이 좋았습니다. 많진 않지만 곡성군에서 결정해 준 '청소년 공부방' 사업이 힘이 되었습니다. 노력을 집중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었고 전남문화예술재단의 '마을시집 지원 사업'을 마중물로 활용하였습니다.


건물을 짓거나, 책을 만드는 일도 어떻게 보면 단기적 변화일 수 있습니다. 이런 일은 돈이 있거나 기획을 잘하면 되는 일입니다. 변화는 더 근원적인 지점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우리를 둘러싼 외부를 바꾸고 가시적인 성과를 내는 것보다 더 근원적인 일은 자신을 바꾸는 일입니다.

공부를 해야 겠다는 생각을 한 이유는 근원적 변화를 일으키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한 사회에서 일어나야 할 가장 근원적인 변화는 농업, 농촌, 농민에게서 시작해야 한다는 느낌도 들었습니다. 땅에 뿌리박고 있는 농민에게서 희망의 싹이 움터나야 큰 나무처럼 오래가는 변화가 시작됩니다. 도시에서 일으키는 많은 희망의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뿌리가 얕은 편입니다. 오래가지 못하고 시들어 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왜냐면 도시에서 희망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비용과 노력이 너무 많이 듭니다. 농촌은 돈이 조금만 있어도 유지할 수 있고, 어떤 경우에는 돈없이 할 수 있는 일도 많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대부분의 일을 돈없이 해왔습니다.


처음 공부를 해야 겠다고 마음먹었을 때에도 서로 돌아가면서 책읽고 생각을 나누는 것에서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정도로는 힘이 모이지 않는 걸 느낄 수 있었습니다. 욕심을 부린 건데 규모가 큰 공부 모임을 조직해 보고 싶었습니다. 곡성군에서 기획했던 건데 매달 한 번씩 '심청 강좌'라는 이름으로 지명도가 있는 지식인을 초대해서 공부하는 일을 몇 년간 한 적이 있습니다. 군수가 바뀌면서 중단되었는데, 한두 번 하는 게 아니라 오랫동안 하나의 가치에 기반을 두고 공부를 꾸준히 이어가는 규모있는 강좌를 읍내가 아니라 면소재지 마을에서 할 수 있으면 그 사실 자체만으로도 사회적 의미를 가지고 새로운 상상을 불러올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매달 한 명 기준으로 지명도가 있는 지식인을 초대하는 농민이 중심이 된 자발적인 강좌 기획' 이것이 농민인문학의 기본 개념입니다. 농촌의 특성을 살려 매달 한 번이 아니라 여름과 겨울 농한기를 이용한 집중 강좌라는 현실적 판단을 하였고, 여름과 겨울 각각 여섯 분 일년 열 두분의 선생님을 모시는 농민인문학 강좌는 이제 3년째 하고 있습니다. 2010년 여름에 시작한 이 강좌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강사 추천을 운영위원과 지역 주민에게 개방해 두고 있습니다. 지역주민들이 자유롭게 추천하고 운영위원회에서 평가하고 저는 실무적 섭외를 담당합니다.

이런 과정을 거치다 보니 강사의 폭이 정치적으로는 새누리당에서부터 진보신당까지 펼쳐지고, 하는 일로 봐도 농민에서 국회의원까지 다양합니다. 지역 주민들로서는 내가 추천한 사람이 공개적인 강의를 하는 것도 의미있고, 언론에서 보던 사람을 눈 앞에서 만나는 재미도 있습니다. 책으로 읽었던 저자를 만나 싸인을 받기도 하고, 청소년들은 멘토를 얻는 기회이기도 합니다. 농민인문학 강좌는 공부라기 보다는 지식을 기반으로 하는 하나의 문화 행사처럼 즐거움과 교양을 동시에 얻는 축제의 성격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물론 이런 민주적 과정과 축제라고 해서 다들 좋아하는 건 아닙니다. 변화는 늘 견제에 시달려야 하는 것이 운명입니다. 그러나, 수비없이 혼자하는 축구가 재미없듯 이런 견제를 잘 피하고 지혜롭게 상황을 읽으면서 새로운 가능성을 열게 되면 그동안의 견제가 오히려 일을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 도움이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지식'을 거점으로 한 새로운 농민 운동 필요

농촌에서 알게 된 것이 꼭 돕는 것만이 도움을 받는 것이 아니라 어떨 때는 적당히 견제받는 것도 생각을 더 깊이 하게 되고 지나치게 과잉하지 않게 된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어차피 지나치게 한다고 해서 성과가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적당한 선에서 그치는 것이 알맞은 노력으로 알맞은 성과를 얻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동안 농민인문학 강좌에는 도법스님, 오연호 <오마이뉴스> 대표, 국회의원 되기 전 이학영 와이엠씨에이 총무, 김규항 <고래가 그랬어> 발행인, 김민해 풍경소리 발행인, 이석형 전 함평군수, 김효석 국회의원, 이정현 국회의원, 백무산 시인, 김성범 도깨비마을 촌장, 한원식 자연농업 농부, 민승규 농촌진흥청장, 김상봉 전남대 교수 등 우리 사회에서 이슈를 만들어 내는 쟁쟁한 지식인과 실천가들이 참여해 왔습니다.

한국의 면단위 농촌 마을에서 이런 분들을 초대해서 꾸준히 강좌를 개설한 사례 자체가 없을 겁니다. 이번 여름 강좌에도 안도현 시인, 배병삼 영산대 철학교수, 백현기 전 한겨레신문 편집국장, 강위원 여민동락 대표, 김선동 국회의원, 기덕문 선생님 등 훌륭한 지식인과 실천가들이 강의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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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여름 죽곡농민열린도서관 농민인문학 강좌 안내 2010년 여름에 시작해서 이번에 5번째 진행하는 죽곡농민열린도서관의 여름 강좌에는 안도현 시인, 배병삼 영산대 교수 등이 강의한다. ⓒ 김재형

제가 가진 개인적인 소원은 이 강좌를 10년 동안 유지하는 일입니다. 고현석 전 곡성군수님이 기획했던 심청 강좌도 5년 정도 했던 것 같은데, 10년을 하게 되면 정치적 권력없이 돈없이 기획하고 유지해낸 농촌 마을 단위의 평생 교육으로는 최초가 될 겁니다. 이미 3년을 해왔기 때문에 앞으로 7년만 더하면 됩니다. 오래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가능한 조심하고 여러 사람의 지혜를 모으고 있습니다. 10년이라는 시간은 많은 것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정성스러움의 단위이기도 하고, 한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 도약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10년 동안 정성을 들이고 나면 그 사회는 다른 단계로 도약하는 변화가 시작됩니다. 그 전에 살았던 삶을 살지 않아도 됩니다.

101번째 원숭이와 비슷한 이야기인데 원숭이 한 마리가 고구마를 씻어 먹기 시작했는데, 101번째 원숭이가 씻어 먹기 시작하면서 그 이후에는 모든 원숭이들이 고구마를 씻어 먹기 시작했다는 사례에서 시작한 이 이야기는 변화의 질적 도약을 상징하는 이야기입니다. 비폭력 직접 행동의 이론가와 실천가들도 대부분 이 이론을 따르고 있습니다. 지금 내가 하는 행동을 정성스럽게 오래 하기만 하면 사회는 질적 도약을 한다는 신념이 그들을 희망없어 보이는 일에 매진하게 합니다. 

이 강좌가 10년간 유지하는 데 성공하게 되면 죽곡 사회의 변화는 말할 것도 없고, 곡성 전체에 상당한 변화를 몰고 오게 됩니다. 홍성 홍동에서 시작된 유기농업 운동과 마을 공동체 운동이 홍동의 변화만 불러 온 것이 아니라 홍성을 비롯한 우리 사회 전역에 상상력의 변화를 일으키듯이, 죽곡에서 일어나는 일도 그런 변화의 계기가 될 겁니다.

'공부하고 시를 쓰는 농촌 마을.' 이게 현실이 된다면 한국 사회의 지식 구조가 바뀌게 됩니다. 지식인들은 대학을 자기 기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농촌을 자기 기반으로 하게 될 겁니다. 세계적인 생태 운동가인 사티쉬 쿠마르가 영국 하트랜드의 마을을 기반으로 활동하듯이, 강수돌 교수가 조치원 신안마을을 배경에 두듯이 지식인의 농촌 마을 기반 지식 활동이 활성화될 겁니다. 누군들 시를 쓰는 시인들과 함께 농촌 마을에서 살면서, 그 속에서 농사짓고 시를 짓고 삶을 나누면서 살고 싶지 않겠습니까?

사회적 변화는 이런 지식 사회의 변화가 반드시 동반되어야 합니다. 지식인들이 서울과 대도시에 자기 기반을 두게 되면 그 사회는 도시화됩니다. 동일한 논리로 지식인이 농촌 마을을 기반에 두게 되면 그 사회는 생태적 사회로 전환됩니다. 그걸 앞당기기 위해서는 누군가 그 사회를 먼저 실현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동안 농민 운동은 농민회가 상징하는 정치적 영향력 확대와 농협과 농업경영인회가 상징하는 농업 생산자 조직과 경영 운동이 주축이었습니다. '농민의 힘을 키우고, 농사지어서 살 수 있는 기반을 만들자' 이 길이었습니다. 오랫동안 이 운동을 해오면서 성과가 많았지만 크게 봐서는 신자유주의 흐름에 밀렸다는 건 인정할 수 밖에 없습니다. 어차피 이런 형태의 농민운동을 계속한다고 해도 성과를 얻는 게 쉬운 일은 아닙니다. 새로운 전략이 필요하고 '힘과 돈'을 넘어 '지식'을 농민 운동의 전략적 지점으로 상상하는 게 손해볼 게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농민운동 초기의 '농촌 계몽 운동'으로 다시 돌아가는 의미도 있는데, 운동이 벽에 부딪치면 이렇게 돌아서 다시 가보는 것도 지혜입니다.

그동안 농민인문학 강좌를 죽곡농민열린도서관(cafe.daum.net/jooknong) 카페에다만 기록하고 있었습니다. 이번에 <오마이뉴스>에서 기회를 주셔서 이 강좌를 꾸준히 연재할 생각입니다. 재미있는 하나의 연재 기사가 아니라 생태적 사회로 전환하는 큰 기획 속에서 이 연재를 이어가고 싶습니다. 
#농민인문학 #죽곡농민열린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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