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게, 한 걸음만 더 늦게

[공모-여행지에서 생긴 일]

등록 2012.06.27 11:58수정 2012.06.27 1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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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주구천동, 우리나라에서 여름휴가를 보내기에 가장 좋은 계곡이라던가? 원체 사람 많은 곳을 좋아하지 않은 터라 내키지는 않았지만 오래 전 '제대로 놀아보자'는 다수결의 횡포에 의해 친구들에 묻혀 가본 적이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건 가는 길부터 속된 말로 왕짜증이었다. 고속도로는 지속도로(遲速道路)가 되어 TV뉴스에서 흔히 나오는 멘트처럼 '꼬리에 꼬리를 물고', '가다 서다를 반복'하다가 급기야는 '노상 주차장'이 되어버렸다. 머리 위에서는 한 여름의 태양이 이글거리고, 피곤에 지친 사람들은 차창을 열고 담뱃재를 떨어내는가 하면 누구는 차에서 내려 몇 걸음 걷지도 않고 뒤통수로 얼굴을 가린 채 길 가에 오줌을 흘려보냈다.

해가 지고 주위가 이슥해서야 겨우 도착한 무주구천동, 전국 곳곳에서 얼마나 많은 차들이 한꺼번에 몰려왔는지 입구는 견인차량 보관소가 따로 없었다. 계곡은 한술 더 떠 행락객에 잡상인에 애완견들까지, 그 깊고 깊은 덕유산 계곡이 꼭 시골 5일장 같았다. 그러니 물 있는 곳은 어디든 여의도 풀장처럼 바글거려 사람들 틈새를 비집고 발 한쪽 담그기도 여의치 않았다. 아니 틈이 있어도 사람들이 뿜어대는 체온에 미지근히 데워져 있을 것 같아 발도 적시고 싶지 않았다.


밤엔 더 가관이었다. 스텐드바인지 뭔지 커다란 간판에서는 네온사인이 번쩍거렸고, 밤새도록 요란한 음악이 고요한 산중을 흔들어댔다. 가는 곳마다 술판에 노래판에 화투에 넘쳐나는 쓰레기들, 거기다 누구는 옆에서 토하고. 잠깐 동안 도심 유흥가 한복판에 와있는 듯한 착각을 하고 만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모르긴 몰라도 귀 밝은 사람들은 산속 동물들이 투덜대는 소리에 귀깨나 간지러웠으리라. 처음부터 예상 못한 바는 아니었지만 깊은 산중에서 벌어지는 낯설고 황당한 풍경에 '이것 참!'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딱 한번 덕유산 꼭대기에 올라갔다 내려왔을 뿐, 구천동에 있는 2박3일 내내 면벽 수도하는 마음으로 꿋꿋하게 텐트를 지키고 말았다.

이제 6월 말인데 벌써부터 후텁지근 끈적한 바람이 온몸에 얄밉게 들러붙는다. 머지않아 약이 오를 대로 오른 한 여름 태양이 '너희들 다 죽었어'하며 스팀 같은 입김을 훅훅 불어댈 것이다. 그맘때면 사람들은 저마다의 휴가계획에 들뜨고, 마침내 7월말이 되면 약속이나 한 듯 일제히 봇물처럼 집에서 쏟아져 나올 것이다. 그러면 TV와 신문은 으레 아스팔트 한 조각 보이지 않는 고속도로와 콩나물시루가 되어버린 동해바다 풍경을 퍼다 나를 것이고.

가만 생각하면 언제부턴가 우리는 여름휴가하면 사람냄새가 물씬 나는 그런 곳에서 먹고, 마시고, 떠들고, 진탕 놀면서 몸에 남은 에너지를 한 방울까지 죄 짜버리고 와야 제대로 즐겼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래서 교통체증에 바가지 상혼에 이런 저런 불편을 감내하면서까지 기를 쓰고 사람들이 몰리는 피크에, 그것도 굳이 유명한 산과 바다를 찾는 게 아닐까?

휴가(休暇)는 말 그대로 나무 밑, 그러니까 푸른 자연 속에서 느긋하고 여유롭게 쉬는 일이다. 넉넉한 자연 속에서 번잡한 일상에 지친 몸과 마음을 누이고, 더불어 나를 고요히 돌아볼 수 있게 하는 휴가, 이 얼마나 멋진 일인가? 그러기 위해서는 '철'은 피해야 할 것이다. 남들이 다 떠나는 7월말 8월초 휴가철에 휴가다운 휴가를 즐긴다는 것은 사실 어불성설이다. 도시를 떠나 자연을 찾아도 결국 도시적 분위기에 쏠리고, 사람을 떠나 멀리 나서도 결국 그보다 더한 인파에 휩쓸리며, 막상 짐을 풀어도 귀경길 정체 걱정에 마음 편히 쉬지 못하고 정신없이 소비하고 마는 휴가라니! 몸과 마음에 뭔가를 채워오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있는 것까지 다 써버리지는 말아야 할 것 아닌가.

정해진 기간 동안 일제히 휴가를 떠나려다 보니 길이 막히고, 그렇게 아까운 시간을 길에다 버리고 나면 본전 생각에 더욱 신나게 빨리빨리 놀아야지 생각하는 건 어쩌면 당연하리라. 하지만 그런 휴가 뒤엔 사람에 치이고, 바가지에 기분 상하고, 오며 가며 길 막혀 짜증났던 기억이 먼저 떠오르게 마련이다. 생활에 곧바로 적응하지 못하는 '휴가후유증'까지 생겨난 것도 이 때문이지 싶다. 해마다 한여름, 불과 보름여 사이에 온 국민이 전쟁 치루 듯, 의무방어전 치루 듯 정신없이 해치우는 그런 휴가가 달갑지 않다는 얘기다.


일 년에 며칠 안 되는 여름휴가, 그래도 남들 떠날 때 떠나야 제 맛이라고 생각한다면 할 말은 없다. 하지만 눈 딱 감고 이번 휴가만큼은 남들보다 한걸음 일찍, 아니면 한걸음만 늦게 떠나보자. 이제 막 더워지기 시작하는 초여름이거나, 더위가 한 풀 꺾인 늦여름이거나, 쓸쓸한 초가을이면 좀 어떤가? 한적한 시골도 좋고, 풍광은 빼어나지 않더라도 작은 바닷가 마을도 좋으리라. 그런 곳에서 가족과 함께 조용하고 여유롭게 쉬었다 오자. 전쟁 같은 휴가에 익숙해서 '휴가가 뭐 이래?' 푸념하는 우리 아이들에게 진정한 휴가가 주는 꿀맛을 보여주자. 아무렴 기분은 좀 덜할 수도 있겠지만 사람에 치이지 않고 낯선 자연을 마주한 것만으로도 우리의 몸은 더없이 행복하고, 마음은 한없이 풍요로워질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여행사연 쓰고 공정여행 가자!' 응모 글


덧붙이는 글 '여행사연 쓰고 공정여행 가자!' 응모 글
#휴가 #무주구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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