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들이 신문 지면을 메우던 시대는 흘러갔다. 중고등학교에서 배운 유명 장편들은 하나같이 신문에 연재됐던 작품들이지만, 요즘 신문에는 소설이 거의 없다. 소설가들의 소설을 일반인들이 잘 읽지 않는 세상이 됐기 때문이다.
소설은 소설가가 '창의성'을 바탕으로 세상에 '있을 법한' 일을 '허구'로 만들어낸 이야기다. 세상이 요즘처럼 복잡다단하지 않던 산업화 시대까지의 소설가들은 일반인의 상상을 뛰어넘는 천재적 허구력을 발휘해 대중들을 매료시켰다. 과거의 소설은 흥미 만점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소설가가 아무리 머리를 짜내도 세상에서 실제로 벌어지는 기이한 일들을 뛰어넘지 못한다. 소설가 이상의 '창의성'으로 무장한 다양한 인간 군상들이 저질러대는 기상천외의 사건사고 '작품'들이 세상에 널브러져 있다. 소설보다 훨씬 재미있는 일들이 쉬지 않고 벌어지는 사회가 된 것이다. 세상이 더 재미있는데 누가 소설을 읽을 것인가.
소설가는 상상하지도 못했을 '석궁' 사건이 일어났다. 또, 국민 몰래 일본과 군사협정을 체결하려는 사건도 일어났다. 그리고 '法(법)' 자 대신 '正(정)' 자가 새겨진 법복을 입은 판사까지 생겨났다. 게다가 그에게는 '국민 판사'라는 칭호가 따라붙었다. 소설가는 쓰지 못했지만, 대통령에게 임명장을 받은 대법원장이 판사를 임명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이 판사를 임명하는 혁명적 제도가 탄생했다.
<국민판사 서기호입니다>는 소설보다 더 재미있다. 법원의 정치적 독립과 사법 개혁을 위해 열성으로 노력해 온 판사 한 명을 거대언론과 정치권력, 그리고 사법부 수뇌들이 에워싸고 공격하는 전말은 대단한 소설 글감이다. 그들이 생산해낸 '쪼잔한' '이야기'들은 어째서 소설에 '小說'(소설)이라는 이름이 붙었는지를 단숨에 알게 해준다. '쪼잔할 小(소)'에 '이야기 說(설)' 아닌가.
재판 개입한 법원장은 승진, 문제 지적한 판사는 쫓겨나
헌법재판소에서 위헌 여부를 심의 중인 법률과 관계되는 사건이 있으면 판사들은 진행을 미룬다. 헌재의 결정을 봐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떤 법원장은 헌재의 결정이 나기 전에 '촛불' 관련 사건을 빨리 처리하라고 판사들에게 압력을 넣었다. 그 법원장은 대법관으로 승진했다. 하지만 재판에 개입한 정치적 대법관을 징계하라고 요구했던 판사는 '근무 성적 불량'을 이유로 재임용에서 탈락했다.
일반인들은 10년마다 판사가 재임용된다는 사실을 잘 모른다. 재임용 탈락을 한 달쯤 앞둔 판사에게 법원 직원이 '당신은 근무 성적이 현저히 불량해 판사로서 정상적인 직무를 수행할 수 없기 때문에 연임 적격 여부가 문제 되는 판사가 됐다'는 전화를 걸어온다는 사실은 더욱 모른다. 전화를 걸어온 직원은 '법관인사위원회에서 소명할 권리가 있으니 참석 여부를 알려 달라'고 말한다고 한다. 소명해 봐야 헛수고니 미리 사표를 내라는 뜻인가? 더욱이, 당사자에게 근무 성적도 공개하지 않는다 한다. 어찌 소설가가 이런 '쪼잔한' 일들을 감히 상상해 '이야기'로 가공해낼 수 있겠는가.
법 이야기를 하는 책들은 대체로 재미가 없다. 딱딱한 법률 용어부터가 독자들의 동기유발을 가로막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민판사 서기호입니다>는 처음부터 끝까지 "판사들도 1인 미디어를 통해 자유롭게 표현하고 소통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면서 이를 실천한 서기호 전 판사와, 법률을 일반인의 '생활'과 연관시켜 재미있게 풀어쓴 책(<생활법률상식사전> 등)의 저자인 김용국 법조전문 시민기자의 대담으로 구성돼 있다. 글들이 팔딱팔딱 살아숨쉬는 구어체로 적혀 있어 독자는 두 사람과 함께 앉아 이야기를 주고받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저절로 재미가 넘쳐난다는 말이다.
게다가 연애담, 데모담, 가족담, 일탈담 같은 흥미로운 사담들도 많다. 서기호 의원은 판사였으니 대학생활도 줄곧 고시 준비에만 매달렸을 것으로 지레짐작하기 쉽지만, 대학 4년 다니고 군대 갔다 올 때까지 공부는 전혀 하지 않았단다. 고3 입시 직후 그 방면의 '잘 노는' 친구에게 '브레이크댄스랑 여자 꾀는 법 좀 가르쳐달라'고 했다가 '너한테는 안 어울리니 한 우물만 파라'고 '한마디로 거절' 당한 일화도 재미있다.
이렇게 재미있는 책, 다시는 세상에 나오지 않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