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다지 공들이지 않았지만 베스트셀러에 진입

[서평] <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를 읽고

등록 2012.07.16 16:35수정 2012.07.16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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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패션잡지 <앙앙>은 여고시절에 어느 누구나 흔히 보던 잡지다. 반에 멋 좀 부린다는 아이들은 죄다 끼고 다니던 책이었기에 그런 애들의 어깨너머로 그 잡지를 보는 일은 너무나 쉬운 일이었다. 그저 일본 최신의 유행 패션을 보여주던 잡지라는 고정관념이 있었기에 일어를 유창하게 읽고 쓸 줄 알아서 내용이나마 읽어봤으면 하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볼 필요가 없는 책이기도 했다. 그런데 무라카미 하루키의 최신작 <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가 이 잡지 <앙앙>에 실렸던 일 년 치 에세이를 묶은 것이라 한다.

하루키가 소녀들의 패션 잡지에 글을 썼다니 하고 의아한 기분으로 훌훌 넘겨 읽다보니 한 시간 정도면 뚝딱 해치울 만큼 단순한 글들이란 느낌도 동시에 다가왔다. 그런 불평을 막고 싶었던 것일까? '맥주 회사에서 만드는 우롱차'라 생각하고 이 에세이를 읽어달라고 하루키는 독자들에게 주문했다. 어쩐지 이전의 에세이에 비해 그다지 공들이지 않았다는 느낌도 조금은 들지만, 급속도로 베스트셀러 자리에 진입하고 있는 걸 보면 그의 인기는 어떤 글에서건 굳건한 것 같다.


<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란 제목은 책 안에 담긴 에세이 두 편의 제목을 각각 이어붙인 것이다. 특히 <채소의 기분>은 어느 영화 안의 대사인 '꿈을 좇지 않는 인생은 채소나 다름없다'를 마음에 두고 이와 연관해서 풀어나간 글이다.

채소를 가지고 들뜬 두근거림의 식사준비를 하는 것에 관해 이야기하며, 그 김에 채소에도 여러 사정이 있다고 말한다. 채소의 관점에서 인생을 생각해 본다는 발상은 조금 신선하다. 한편 <바다표범의 키스>는 건강을 위해 바다표범 오일을 챙겨먹는 것의 고역을 이야기하며, 비린내가 심한 이것을 먹는 동안 바다표범의 딥키스를 받는 것 같다고 한 유머러스한 내용이다.

이전의 그의 에세이들에서 볼 수 있던 아름다운 문장들은 이 책에서 찾기 어렵다. 이를 테면 생물책을 집에 두고 온 날에 그것을 가지러 집에까지 뛰어갔다가 오는 도중의 서정을 매우 아름답고 낭만적으로 이야기한 <랑겔한스섬의 오후> 같은 느낌은 기대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에세이 쓰기에 공을 들이느라 정작 소설 쓰기를 등한시 한다는 작가도 있다지만 자신은 소설을 쓰다가 기력이 떨어지면 어깨에 힘을 빼고 에세이를 쓴다고 말한다.

스포츠 의류회사 나이키에 기고를 하기 위해 미국 본사를 취재하고, 섬세한 감수성 덕분에 광고 카피도 쓰고, 소설가가 되기 전에 카페를 했던 이유로 음식도 잘 만들고, 재즈와 클래식 그리고 영화에도 깊은 취미를 가진 하루키. 예순이 넘은 지금도 여전히 젊은 감수성을 가질 수 있는 것에는 그 같은 환경적 바탕들 때문 아닌가 싶어진다.

소설가가 될 줄은 몰랐다고 하는 그가 소년시절에 도서관으로 배달돼 온 책상자의 냄새마저도 좋아할 만큼 책에 빠져 있었다는 구절에서는 섬세한 소년 하루키의 면면을 읽을 수가 있었다. 소설가란 마음속에 수많은 서랍이 들어있는 사람이고, 너무 많은 에세이를 쓰면 마음속의 그 서랍들을 너무 많이 열어버리는 셈이 되어 정작 소설을 쓸 거리가 부족해진다고 하면서도 자신에게는 몇 개의 서랍은 남아있다고 말한다.


타인의 험담은 구체적으로 쓰지 않을 것, 변명이나 자랑은 되도록 하지 않을 것, 시사적인 화제는 가능한 한 피할 것. 이것이 하루키식으로 에세이를 쓰는 법이다. 그리고 이 책 <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는 딱 적당히 소녀들의 주간 패션지에 어울릴 법한 쉽고 간단한 읽을거리다. 오하시 아유미의 간결한 일러스트도 잡지에 실린 그대로 엮었다.

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 - 두번째 무라카미 라디오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남희 옮김, 오하시 아유미 그림,
비채, 2012


#하루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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