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백호 인왕산. 주산인 북안산에 2미터 낮은 서산. 조선왕조시절에도 민주화된 지금에도 권력안위를 위해 함부로 접근할 수 없는 곳입니다. 감히 임금을 내려다본다해 절을 폐쇄하고 통행을 금했던 조선. 신분의 귀천이 사라진 지금도 거기는 권력을 지키는 보루로 일반인에게 발길을 쉬 내주지 않습니다. 궁궐, 이젠 신무문 밖 청와대를 보호한다면서.
이규호 제공
조금 더, 조금만 더, 부추겨 마침내 오른 인왕산 꼭대기. 한양도성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북악, 인왕, 낙산 그리고 남산을 잇는 한성. 아늑하게 자리한 서울(한양). 무학대사와 정도전이 계룡산을 마다하고 이리로 달려온 이유를 첫눈에 느낄 수 있었습니다.
북악을 주산으로 하느냐, 인왕을 주산(서대문 쪽에 궁전이 들어설 뻔)으로 하느냐를 두고 정도전과 무학대사가 벌였다는 논쟁. 정도전이 이겨 한양도성이 세워진 까닭도 쉬 확인할 수 있고요. 무학대사는 '득수'(得水, 궁궐 아래 한수 확보) 이점을 봤지만, 도성을 차릴 공간이 협소했던 걸 간과했든 것입니다.
성곽여행 세 번째, 볼거리 최고라는 말이 여기저기서 튀어나왔습니다. 궁궐(경복궁)을 중심으로 한 서울 중심부가 한눈에 들어오고, 주변 내사산과 그 사이 협곡 넘어 이어지는 부도심이 일목요연하게 파악됩니다. 물 흐름, 산 이어짐 모두가 오묘합니다.
여행자들은 자기 사는 곳과 이웃마을 그리고 여기저기를 살피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호들갑입니다. '저기 어디야?', '저게 광화문이야', '아니, 그럼 저긴 숭례문?', '애고, 우리 동네는 뵈지도 않네.' 서울 구석구석을 머릿속에 담은 여행자들은 하산을 시작합니다.
독립문 쪽으로 이어진 곡장(曲墻, 구불구불한 성곽). 넋 놓고 한참을 응시했습니다. 그 너머 신비한 계곡. 국사당과 선바위·얼굴바위·모자바위·해골바위 등 범상치 않은 모습들을 보며, 토속 신앙인들이 모여 사는 이유를 알아챘습니다. 남산의 '목멱신사'가 일제강점기 '조선신궁'에 자리를 내주고 이 골짜기로 강제 이주당한 역사가 애처롭습니다.
서대문 쪽으로 내려가는 성곽 바깥 길. 옥잠화, 싸리나무, 소나무, 회화나무 등이 빼곡한 도심 숲길을 걸으며 여행자들은 감탄사를 연발했습니다.
"세상에 서울에 이런 길도 있네." 성곽여행에 나선 즐거움 중 하나. 사직터널 위까지 이어진 한적한 길, 시골 어디선가 한 번 지나친 듯 '기시감'을 부르는 길...
권율장군 집터와 그가 심었다는 은행나무,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도왔다는 이유로 옥살이에 강제 추방된 UPI통신사 한국특파원의 집 '딜쿠샤'(이상향, 힌두어), '울밑에 선 봉선화'로 유명한 작곡가 홍난파 가옥을 돌다 여행자들은 문득 허기를 느낍니다. 오전 11시에 시작해 오후 2시를 넘기고 있었으니까요.
'치마바위' 슬픔 절절한 인왕산

▲ 인왕산을 내려와 무악동 어딘가 성곽 바깥으로 난 길. 여행자를 감탄케 한 아늑한 숲길입니다. 도심에 어울리지 않게 자연의 생명이 살아 숨쉬고 있었거든요. 꼭 어디선가 본 듯한 ‘기시감’에 사로잡혀 일행은 고된 줄도 모르고 걸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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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몰래 지원했다는 이유로 옥살이를 하고 결국에는 추방당한 UPI통신사 한국특파원이 살았던 집. 그는 이 곳을 ‘딜쿠샤’(이상향, 힌두어)라 불렀답니다. 진실을 알리고 공정보도의 꿈을 키웠을 외국 언론인의 낡은 집을 보며 기자는 부끄러워 낯을 들 수가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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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교육청 담(성곽)을 돌아 나와 바로 음식점을 찾아들었습니다. 시원한 물부터 찾는데, '목을 축이는 덴 막걸리가 제격'이라며 장수막걸리 주문소리가 우렁찹니다. 시원한 냉면이나 콩국수 주문이 다수일 줄 알았는데, 비빔밥·국밥·찌개더군요. 그렇지, 이열치열.
강북삼성병원 마당 한가운데 포위된 경교장. 김구 선생이 해방 뒤 4년여를 머물다 안두희 총탄에 쓰러진 현장. 돌보는 이 없어, 담배 피고 커피 마시는 의사 휴게실로 전락했다. 최근 역사유적으로 재단장을 하고 있다니. 역사바로세우기는 말만 요란했던 모양입니다.
흔적조차 찾을 길 없는 '돈의문'. 그냥 '여기 있었다'는 설명말고 덧붙일 게 없어 멍하니 한참을 서 있다 정동길로 들어섭니다. 태종 때 폐쇄했다가 세종 때 다시 문을 열어 '신문'·'새문'으로 불렸던 서대문. 일제가 1914년 파괴해버린 뒤 터조차 알길 없이 오늘에 이른 세월이 야속하기만 합니다.
미국과 영국을 등에 업고 친일내각을 앞세운 일본제국의 횡포를 피해 고종 황제가 아들 순종을 데리고 1년여 피난(아관파천, 결과 러시아 횡포에 시달림) 왔던 구러시아공사관. 일제가 사주한 깡패들에게 아내이자 어머니인 명성황후를 잃고 이 좁고 낯선 곳에 숨죽여 가슴 아파 했을 고종·순종 부자의 눈물이 그려집니다.
곁의 중명전. 덕수궁에서 잘려 독립가옥처럼 느껴지는 을사늑약의 아픔을 간직한 곳. 궁궐 도서관 수옥헌(漱玉軒)으로 건립됐으나 화재로 정궁이 불타 이를 대신해야 했던 전각. 야수 같은 일제의 총칼 앞에 군대해산령을 내리고 국권을 넘겨줘야 했던 황제 고종의 통곡소리가 서려 있습니다.
거기선 해설사 도움을 받았습니다. 땀을 뻘뻘 흘리며 들어서는 여행자가 안쓰러웠을까요? 마감 시간을 넘겼는데도, 이방 저방 옮겨 가며 역사이야기를 정성스럽게 들려줬습니다. 전시대 속 '을사늑약' 협정서에선 눈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
지친 일행은 마지막 발걸음을 재촉했습니다. 이화학당, 배제학당, 서울미술관(경성재판소에 이은 대법원을 거쳐), 정동극장(국립극장 분원), 정동교회. 근대역사유물을 살피고, 흔적조차 없는 소의문(소덕문, 서소문) 자리 어딘가를 거쳐, 중앙일보 앞길로 숭례문까지 걸었습니다.
돈의문·소의문 찾을 길 없는 곳

▲ 중명전. 덕수궁이었건만 이제는 따로 떨어져버린, 을사늑약의 아픔을 간직한 전각. 일제의 총칼앞에 대한제국의 군대를 해산하고 주권을 넘기지 않을 수 없었던 고종의 통곡소리가 들리는 곳. 애초 이름은 구슬을 닦는 다는 수옥헌(?玉軒). 덕수궁의 부속 도서관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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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행자들은 자취를 감춰버린 돈의문(서대문, 새문, 신문)자리 앞에서 한참을 넋 놓고 있었습니다. 병원 의사들의 끽연휴게실로 사용돼 온 경교장을 나와 흔적조차 찾을 길 없는 도성 4대문 중 곳에서 일제의 야만을 되새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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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제국의 황태자가 문 아래로 식민지 조선에 들어갈 수는 없다고 해 성문만 남겨두고 주변성곽을 모두 헐어버린 파괴의 현장. 친일 MB정부 드러남은 한양도성의 정문마저 불타 사라져버린 거기 숭례문 곁에 서 있자니, 통곡소리에 귀가 먹먹해지는 듯합니다.
서울성곽여행 세 번째는 거기서 그쳤습니다. 남대문시장 골목 어느 선술집에서 막걸리 한 잔 따라놓고 수다를 떨며 곤한 여정을 마쳤습니다. 8월 땡볕이 조금 누그러진 어느 토요일 한적한 오후는 그렇게 지나갔습니다.
그간 쭉 여행에 참여하다 이번에 불참한 프랑스인 다비드. 시골출장으로 못 온다던 그가 이틀 전 보낸 이메일을 뒤늦게 봤습니다.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고 파리에서 정치연구소를 운영했고, 일본으로 건너가 일 도쿄 중앙정치권 자문을 했다는 그는 2년 전 일본생활을 청산하고 한국에 왔습니다.
한국에 딱 한 번 와보고 바로 짐을 쌓다고 했습니다. '그래 이거야', 감흥을 가졌다더군요. 기자와 몇 번 만나 한국 음식과 막걸리를 먹으며 '최고'를 연발했던 게 수사가 아님을 조금은 알겠습니다. 그가 찾은 곳은 샹그릴라도, 딜쿠샤도 아니었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한국이었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한국을 찾았다"그는 메일에서 "최고의 기억 하나를 남겼다"고 언급했습니다. 인사동의 한 음식점에서 저녁을 먹고 임순례 감독이 운영하는 술집 '여자만' 2층 다락(1층이 내려다보이는)에서 막걸리 한잔 마신 뒤 헤어졌는데, "고맙다"며 감흥을 표현했더군요. 일본에선 아무런 느낌을 갖지 못하다 한국에 와서 그 감흥이 살아났는데, 오래전 일본문화를 공부할 때 좋아했다던 인물 이름 하나를 써놨습니다.
오즈 야스지로(小津 安二郞). 지난 63년 60세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서민영화'라는 새 장르를 개척한 일본인 영화감독입니다. 주위를 둘러보지 않고 무작정 달리는 산업화·핵가족화시대. 무한경쟁에 빠져 삶의 가치를 상실한 현대인. 모두가 환상과 일탈로 탈출구를 찾을 때, 삶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려 애썼던 예술인. 줌인·줌아웃 기법을 삼가고 고정된 시선으로 관심을 끌었던 <강원도의 힘> 홍상수, <오발탄>의 유현목, <고양이를 부탁해>의 정재은을 생각하면 좀 쉬울 듯. 그가 시대의 균열과 이해 그리고 치유를 그린 가족풍경화, '도쿄이야기'는 꼭 한 번 봐야겠습니다. 2012년 여름, 서울에 사는 나와 가족 그리고 이웃을 다시 한 번 생각하면서요.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인터넷저널에도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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