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국대장공주(박세영 분)
SBS
공민왕은 두 곳을 향해 구애 공세를 펼쳤다. 한쪽은 몽골 황실이고, 한쪽은 기씨 일파였다. 몽골 황후인 기황후를 배출한 기씨 집안은 1340년 이후부터 고려 정부에서 실권을 장악한 가문이다. 이 가문은 대표적인 친몽골파였다.
몽골 황실을 향한 구애가 성공했다는 점은, 공민왕이 몽골 황실의 신임을 얻어 몽골인인 노국대장공주와 결혼했다는 사실에서 잘 드러난다. 이 결혼은 공민왕이 등극하기 2년 전에 성사되었다.
기씨 일파에 대한 구애 역시 성공했다는 점은 공민왕이 기황후의 지지를 받고 기씨의 도움을 빌려 충정왕을 몰아낸 사실에서 잘 드러난다. 기씨 집안이 공민왕의 등극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점은 공민왕 즉위 이듬해에 발생한 해프닝에서 상징적으로 반영된다.
<고려사>를 축약한 책인 <고려사절요> 공민왕 편에 따르면, 이때 고려에서는 몽골제국 황제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한 행사가 열렸다. 기황후의 남동생인 기원은 말에 올라탄 채 자신의 말을 공민왕의 말과 나란히 함으로써 위세를 과시하려 했다. 기원의 행위는 불경스러운 것이었지만, 공민왕이 자기 집안의 도움을 받았기 때문에 이렇게 행동할 수 있었던 것이다.
뼛속 깊은 친몽골파로 행동하여 몽골 황실과 기씨 집안의 지지를 받은 공민왕. 그는 얼마 안 있어 본색을 드러냈다. 임금 자리에 앉혀 주기만 하면 평생 몽골과 기씨를 위해 살 것처럼 행동했던 공민왕은 즉위 이듬해부터 그 유명한 반몽골 운동(반원운동)과 기씨 척결운동을 전개했다.
공민왕이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비주류 세력을 결집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그는 개혁세력인 신진사대부를 중용하는 한편, 이성계 같은 변방의 무인세력을 중앙으로 끌어들였다. 이런 노력 덕분에 몽골과 기씨 집안을 몰아낼 수 있었던 것이다.
뼛속 깊은 친몽골파처럼 보였던 공민왕이 즉위하자마자 돌변한 것은, 그의 친몽골이 실은 거짓이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의 친몽골은 '뼛속 깊이'가 아니라 '살갗으로만 살짝' 이루어진 것이다.
이처럼 공민왕의 친몽골 행세는 순전히 쇼에 불과했다. 드라마 <신의>의 최영은 공민왕을 보고 '뼛속 깊은 사대주의자가 아닐까?'라고 염려했지만, 귀국 당시의 공민왕은 이미 몽골을 몰아낼 궁리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드라마 속 최영은 "뼛속 깊이 원나라 물이 들은 분을 모셔서 나라를 맡겨야 하니, 우리 고려 백성이 참 재수가 없겠구나 하고 생각했다"고 고백했다. 하지만 그것은 기우에 불과했다. 공민왕은 즉위하자마자 몽골에 반기를 들고 고려를 위해 살았으므로, 고려 백성은 실은 '재수가 참 좋은 백성들'이었던 것이다.
공민왕의 친몽골 행세는 순전히 '쇼'폭로 전문 사이트인 <위키리크스>가 작년에 공개한 미국 외교문서에 따르면, 이명박 대통령이 취임한 직후인 2008년 5월에 이상득 국회부의장은 전여옥 한나라당 의원과 함께 알렉산더 버시바우 주한미국대사를 만난 자리에서 "궁극적으로 이 대통령은 미국·일본과 잘 협력할 것"이라며 "이명박 대통령은 뼛속 깊이 친미·친일이니까 그의 시각에 대해서는 의심할 필요가 없습니다"고 말한 바 있다.
이런 태도는, 즉위하자마자 '나는 뼛속 깊은 반몽골입니다'고 표방한 공민왕의 태도와 정반대다. 대한민국 경제를 위해 목숨을 걸 것처럼 행동했던 이명박 대통령은 취임하자마자 친형을 통해 '저는 뼛속 깊은 친미입니다'라는 메시지를 미국에 전달했고, 임기 내내 대한민국보다는 미국에 유리한 일을 더 많이 했다. 드라마 속 최영이 말한 '참 재수 없는 백성들'은 대한민국 백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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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시사와역사 출판사(sisahistory.com)대표,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친일파의 재산,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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