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부가 올해 3월 전국 학교에 보낸 학생부 기재 지침의 표지.
교과부
학교폭력 가해내용을 학교생활기록부에 기재하도록 한 교육과학기술부 지침에 대한 회의를 갖고, 인권침해 소지가 있다는 국가인권위원회의 권고에 따라 학교폭력 사실을 기록하지 않기로 했다. 그러나 입시를 앞두고 있는 고3 학생들의 경우, 학교폭력 사실을 기록하지 않으면 다른 지역 학생들과의 형평성 문제 등 입시에 혼란을 줄 수 있다는 지적에 따라 교과부의 방침을 따르기로 했다. 광주광역시교육청이 22일 오후, 일선 고등학교에 긴급 공문을 내리며 강조한 내용이다. 그런데, 어째 좀 이상하다. 앞 문장은 인권침해의 소지가 있어 교과부의 지침을 거부한다며 강조해놓고, 고3은 입시라는 현실적 여건상 예외로 한다는, 앞뒤가 상반된 내용이기 때문이다.
많은 대학에서 학교폭력 가해 사실을 수시모집 인성 전형에 반영하기로 돼 있어서 따를 수밖에 없었다는, 곧, 불가피한 선택이라는 건데, 이는 교과부의 지침 적용에 따른 폐해가 조금도 해소되지 않은 상태에서 아무런 대안 없이 무기력하게 대응하다 결국 무릎을 꿇은 것으로 해석될 수밖에 없다. 그러면서 멋쩍었는지 1, 2학년은 여전히 '보류'란다.
교과부에 대한 어정쩡한 '투항'은 여태껏 시교육청의 보류 방침을 지지하고 있던 수많은 일선 교사에게 적잖은 혼란과 좌절감을 안겨주었다. 이럴 거였다면 수시원서 접수가 시작되기 전에 공문을 내려보내 업무라도 수월하게 해주지, 수시모집이 시작된 지금 허둥지둥 결정한 이유를 모르겠다는 불만이 높다.
시교육청이 교과부에 맞서서 학생들의 인권지킴이인 양 여태껏 호기롭게 떠든 건 결국 허풍이었냐며 분노하는 목소리가 곳곳에서 들린다. 인권이라는 대의를 지키기 위해 버티던 시교육청이 교과부와 부화뇌동한 여론에 밀린 것은, 명분만 내세웠을 뿐 그에 맞선 아무런 실효적인 대응 방안이 없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입시'의 벽 앞에서 결국... 광주교육청의 멋쩍은 투항 결국 한 발 물러서면서 내놓은 이유가 고작 다른 교육청과의 형평성과 시교육청 관내 해당 학생이 10여 명 정도로 그 수가 적다는 거였다. 시교육청이 각 학교에 기재 보류를 요청한 공문을 내린 지가 넉 달 전이다. 그동안 뭐했나. 다른 일로 전국 시도교육감들이 잘도 모이던데, 교과부 지침을 따르겠다는 다른 교육청을 설득하려는 노력이 과연 얼마나 있었는지 의문이다.
전가의 보도마냥 '국가인권위원회의 권고' 운운하기 전에, 허술하기 짝이 없는 학교폭력 대응 지침과 그로 인해 나타난 비교육적인 상황들을 열거하고 설득하려는 사전 노력이 전제되어야 했다. 적어도 억울한 사례를 막기 위한 세부 조항이라도 개정하는 성과를 냈어야 했다. 그런데 대학 수시모집이라는 코앞에 닥친 현실 앞에 속절없이 '투항'해버렸다.
한편, 기재에 따른 피해 학생 수가 적다는 것 역시 이유가 될 수 없다. 굳이 '길 잃은 양 한 마리' 비유를 들지 않더라도, 학교에서조차 다수를 위해 소수는 배제되고 희생될 수 있다는 그릇된 신호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학교는 피해 학생을 보호하고 가해 학생을 교육하는 곳이어야지, 사법기관처럼 행정적 처분을 하는 곳이어서는 안 된다.
학교생활기록부에 기재된 학교폭력 가해자라는 낙인이 아이들에게 미칠 악영향은 두 말할 나위가 없다. 어느 개그 프로그램에서 말하듯, '어차피 안 될 놈은 안 돼'라는 냉소와 열패감이 우리 사회를 휘감은 채 좀 먹고 있지만, 그럼에도 놓을 수 없는 가치가 있다면 교육에 대한 희망이다.
아무리 '막 나가는' 아이라도 교육을 통해 바로잡을 수 있다는 희망이 없다면, 단언컨대, 학교의 존재 이유는 없다. 일벌백계라는 말도 죄를 저지른 아이에 대한 교정 가능성이 배제된다면, 죄 짓지 않은 대다수 사람들을 겁박하는 효과밖에는 없다. 너무 낭만적이라고? 낙인 찍는 일에 둔감해지는 순간, 학교폭력 가해자로 낙인 찍힐 다음 차례가 바로 내 아이일 수 있다.
과문한 탓인지, 주변에 이른바 소년원에 다녀온 아이들 중 또래 다른 아이들과 정상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살아가는 경우는 거의 없다. 무엇 때문일까? 선천적으로 불량한 DNA를 지니고 태어난 게 아닐진대, 소년원은 일시적 격리와 처벌을 위한 공간일 뿐이며, 우리 사회가 정서적으로 소년원 출신에게 관대할 수 없는 까닭이다. 바로 세상인심에 따른 낙인의 효과다.
반인권적인 교과부와 무능한 교육청은 일선 학교에 혼란을 주는 한편, 한창 인권감수성을 키워가던 교사들을 '멘붕' 상태로 몰아갔다. 상명하복에 익숙하고 매너리즘에 빠진 학교문화에서는 언뜻 대수롭지 않게 보이지만, 이는 그릇된 현실에 적당히 타협하는 부끄러운 모습이며, 나아가 반교육적 행태다.
학교는 '교육' 하는 곳... 사법기관처럼 '행정처분' 안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