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이래놨으면 살인 났을 것이여"

[현장] 태풍이 강타한 나주 배 농가들의 탄식

등록 2012.08.31 11:35수정 2012.08.31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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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일, 전남 나주시 봉황면의 한 배 과수원 풍경. 태풍 볼라벤과 덴빈이 연이어 휩쓸고 지나간 후 70%가 넘는 배들이 땅에 떨어져 피해가 막심하다. ⓒ 김동환


37년 배농사를 해 온 농부는 태풍이 지나간 뒤에도 차마 밭을 찾지 못했다. "보고만 있어도 속이 울렁거리고 우울해진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지난 30일 찾은 전남 나주시 봉황면의 한정태씨 과수원 바닥에는 회색 봉지에 싸인 아기 머리만한 배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지난 28일 최고풍속 59m/s를 기록한 '풍마' 볼라벤이 할퀴고 간 지 이틀 만에 비구름을 동반한 태풍 '덴빈'이 들이닥쳤다.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전날 바람을 맞고 떨어진 배 위로 오늘은 비 맞은 배들이 떨어졌다. 일순간에 70% 넘는 배를 잃었지만 정작 농장주들은 올해보다는 내년이 더 걱정이라고 했다.

"올해야 보험 보상 있지만 내년이 더 걱정"

전남 나주는 당도가 높은 '신고배'로 유명한 배의 고장이다. 매년 한국 배 생산의 15% 정도가 이곳에서 난다. 그러나 당분간은 예전만큼의 명성을 유지하기 어려울 전망이다. 28일부터 이틀간 몰아친 태풍 때문에 전체 생산량의 70% 가까이가 낙과(땅에 떨어짐)될 것으로 예측되고 있기 때문이다. 나주시에 따르면 태풍 볼라벤의 여파로 인한 배 낙과 피해 면적은 1434ha. 전체 재배면적 2391ha의 60%다. 덴빈이 지나간 후의 피해 면적은 포함되지 않은 수치다.

올 추석을 맞아 한참 배의 당도를 높여가는 시기에 벌어진 일이라 농민들의 아쉬움은 한층 더 컸다. 30일 정오, 나주 배 공판장에는 태풍 관련 비상대책을 세우기 위해 나주시 면 단위의 부녀회장과 작목반장 60여 명이 모였다. 회의를 마치고 나오는 한 남성 농민에게 조심스레 과수 피해 규모를 묻자 그는 허리춤에 한 손을 올리고 대번에 삿대질을 했다.

"지금 농민들 심정이 어떤데 취재 같은 걸 하러 왔냐!"

식사 장소로 이동하는 농민들을 따라간 뒤에야 자세한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배 농사를 지은 지 27년 됐다는 김정임(가명)씨는 "27년 만에 이렇게 배가 많이 떨어진 것은 처음"이라며 "일주일만 더 있었으면 떨어져도 내다 팔 수 있는 수준이 되는데 하필 지금 태풍이 불었다"고 말했다.


올해는 특히 배농사가 어려웠던 해였다. 인건비도 20%나 올랐고 심한 가뭄에 흑성병(과실과 잎에 검은 반점이 생기는 병)도 돌았다. 김 씨는 "배 한 개당 원가가 1000원 이상인데 지금 보험 보상 다 해봐야 400~500원 정도밖에 못 건진다"면서 "그래서 지금 농민들이 굉장히 예민하다"고 설명했다. 그는 "사람이 이래놨으면 살인 났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김씨가 말하는 보험이란 '농작물 재해보험'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 보험은 낙과율에 따라 80% 상당의 금액을 보장한다. 정확한 피해량이 나와봐야 알 수 있지만 올해 배 농가들은 배 1개당 600원 정도를 보상받을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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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태씨 과수원의 배나무 줄기. 바람으로 잎이 많이 떨어졌다. ⓒ 김동환


김씨와 동승한 박선희(가명)씨는 "올해야 보험 보상이 있지만 내년이 더 걱정"이라고 했다. 잎도 많이 떨어졌고 생장점이 있는 가지도 많이 부러져 내년 생산에도 차질이 상당할 것이라는 게 박씨의 이야기다.

내년에 피어야 할 배꽃이 올해 가을에 피어버릴 가능성도 있다. 박 씨는 "나무가 지금 스트레스를 받을 대로 받은 상태고 과실도 다 떨어져 버리고 없기 때문에 배꽃이 가을에 필 것 같다"며 "그러면 내년 배농사도 망해버리는 것"이라고 털어놨다.

배 200개 열리는 나무에 붙어있는 열매는 20여 개뿐

오전 내 세차게 몰아치던 비바람은 오후로 접어들면서 잠잠해졌다. 볼라벤의 여파로 배수로가 막혀 도시 곳곳에는 물이 고여 있었지만, 태풍 덴빈이 빠른 속도로 북상하고 있어서인지 빠르게 지나가는 구름 사이로는 간혹 파란 하늘도 보였다. 그러나 봉황면에서 만난 한정태씨 얼굴에는 여전히 그늘이 가득했다.

올해 65세인 한씨는 배농사만 37년을 지은 배농사 '달인'. 약 8250㎡(2500평) 크기의 밭에 배나무 240수를 재배하고 있다. 매년 가을이면 알이 굵은 배 6만3천 개를 거둬들이곤 했지만 올해는 밭이 태풍에 직격당하면서 제대로 된 배 6000개도 건지기 어려운 상황이다.

서울을 비롯한 중부 내륙지방에서는 예상보다 풍속이 빠르지 않아 피해가 적었지만 남부지방을 강타한 볼라벤의 강도는 반평생을 배농사만 지은 한 씨로서도 처음 겪어보는 것이었다. 남자 넷이 겨우 드는 한 씨네 창고 철제 대문은 28일 태풍이 불자 집에서 100여 미터 떨어진 전신주까지 날아갔다.

점점 거세지는 강풍에 배 걱정이 됐지만 바람이 너무 세차 150미터 떨어진 과수원까지는 갈 엄두도 낼 수 없었다. TV 뉴스에서는 노약자는 집밖에 나가지 말라는 자막이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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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태씨가 10년째 작성하고 있는 영농일지. 위 쪽이 지난해 태풍 메아리가 불 때의 일지, 아래쪽은 28일 볼라벤이 나주에 상륙했을 때의 상황을 기록한 일지다. ⓒ 김동환


한씨는 "이런 바람이 27일 저녁 6시부터 24시간 동안 불었다"고 털어놨다. 이런 상황은 그가 10년째 쓰고 있는 영농일지에도 잘 나타나 있다. 그는 28일 자 영농일지에 "바람이 멈추지 않고 동서남북에서 분다"면서 "200개 달리는 나무에 20여 개 정도밖에 남은 배가 없다" "피해가 많다"고 적어놨다.

지난해 불었던 태풍 메아리 때는 어땠을까. 한 씨는 2011년 6월 26일과 27일 영농일지에는 태풍이 있을 것이라는 내용만 언급했고 별다른 피해 내용은 적지 않았다. 피해가 있었더라도 미미했다는 이야기. 올해와 비교가 되는 부분이다.

"당분간 신고배 맛보기가 어려워질 것"

한씨는 과수원으로 이동하면서 "태풍 불고 지금이 두 번째 밭에 가는 것"이라고 귀띔했다. 처음에 피해 정도를 가늠하기 위해 밭을 찾았더니 우울증이 심하게 와서 그다음부터는 갈 생각도 안 했단다. 과수원에 들어서니 종이봉지가 씌워진 채 땅에 널브러진 배 수백 개가 시야에 들어왔다. 한씨가 봄부터 "충성을 다 해" 키운 배들이었다.

반나절 동안 내린 비에 장화를 신은 발은 땅속으로 푹푹 들어갔다. 배 과수원 어귀에 있던 감나무는 이미 뿌리가 반쯤 뽑혀나갔다. 180cm 남짓한 한 씨의 배나무들은 가지를 맞대고 서로를 의지하고 있었다. 한 씨는 과수원 한쪽의 큰 배나무를 지목하며 "300개짜리 나무인데 쓸만한 배는 다 떨어져버렸다"고 지적했다.

그가 지목한 나무에는 53개의 배가 달려 있었다. 나머지 배들은 두 차례 지나간 태풍을 맞고서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떨어지지 않은 배는 대부분 나무 윗부분에 달린 크기가 작은 배들이거나 요행히 가지 사이에 걸린 것들. 한 씨는 "지금 남아있는 배들은 크기가 작아서 상품성이 떨어진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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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에 붙어있는 배들도 태풍의 영향 때문에 봉지가 찢어지고 배에 상처가 생긴 것들이 많다. 배는 표면에 상처가 생기면 상품성이 현저히 떨어진다. ⓒ 김동환


조금 있으면 추석인데 배 생산량이 줄어서 가격이 많이 오르겠다고 묻자 그는 "불황 아니냐"며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한씨는 "추석 선물은 배 말고도 대체품이 많고 제사상에 오르는 배도 수입산이 많아 가격이 크게 오르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그는 "태풍으로 배가 떨어졌다니까 언론들이 추석 장바구니 운운하면서 물가 상승 주범으로 몰던데,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며 불만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땅에 떨어진 배를 주워 맛을 보았다. 껍질에 아직 퍼런빛이 도는 데도 배는 생각보다 단맛을 냈다. 한씨는 "배 농가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는 정부가 적극적으로 낙과 수매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직 당도가 떨어져 정상품처럼 시중에 유통시키기는 어렵지만 배 가공 음료를 만드는 업체에 팔면 된다는 것이다.

다행히 정부는 이날 낙과된 과실 중 가공용으로 쓸 수 있는 것은 20kg당 6500원 선에 구매한다는 방침을 밝혔다. 이날 서울 가락동 농수산물 도매시장에서 거래된 배 가격은 15kg당 4만5000원선. 정상가에 비하면 터무니없는 가격이지만 배를 그냥 버리는 것보다는 농가에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한씨는 나무 사이를 누비며 살펴보더니 하늘 위쪽으로 솟은 배 잎을 가리켰다. 그가 가리킨 줄기에는 잎이 거의 없었다. 바람을 맞고 떨어진 것이다. 한 씨는 "잎이 많이 떨어져서 내년 농사에 막대한 지장을 줄 것"이라면서 "지금 내년 꽃이 필 꽃눈이 만들어지고 있는 시기인데 사실 이게 더 걱정"이라고 말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당분간 신고배 맛보기가 어려워질 것"이라고 덧붙였다.
#나주 #신고배 #배 #볼라벤 #덴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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