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란다가 없는 다세대주택에서는 빨래를 널거나 잡동사니를 놓을 공간이 부족하다.
장윤선
[2년차] 아파트에 살어리랏다
장대비가 마구 쏟아져내리던 그해 여름, 중랑천 때문에 상습 침수 지역이던 우리 동네 역시 물이 차고 넘쳤다. 주인 아저씨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새벽 2시쯤이었던 것 같다.
"어이, 미안하지만 같이 일 좀 합시다. 여기 반지하 부부네 집이 물이 잠겼어요. 서로 돕고 살아야지."주인의 말 그대로였다. 하필 쌍둥이를 낳았다고, 돈도 없는데 이 아이들을 어떻게 키울지 막막하다고 늘 어두운 표정을 짓던 젊은 부부의 방이 물에 잠기고 있었다. 신랑이 옷을 갈아입고 나갔고 곧 뒤따라 나간 나는 하수도에서 물이 콸콸 넘쳐오르고 있는 반지하 방을 보고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비는 미친 듯 쏟아졌고, 초라한 반지하방은 이미 발목까지 물이 차오르고 있었다. 쌍둥이는 잠시 피신한 2층 주인집에서 빗소리보다 더 크게, 악을 쓰고 울어댔다.
우리 집만이 아니었다. 곳곳에 반지하 집들의 세입자들이 여기저기 나와 유령처럼 서 있었다. 우리는 일단 당장 필요한 살림도구들을 끄집어 내어 비가 들이치지 않은 곳으로 옮기고, 일부는 우리 집에 두었다. 아직은 어려 보이는 쌍둥이 엄마는 조금 정신이 나간 듯 일을 도우면서도 간간이 눈물을 훔치는 모습이 딱하기 그지없었다.
눈에서 만 원짜리 지폐가 보일 정도로 열심히 살았건만 그러나 그날 밤의 품앗이는 다음 날 우리 집에 '난리 부르스'가 일어나기 위한 전초전이었다. 장마철 거센 바람에 옥상에 있던 물탱크가 쓰러져 버린 것이다. 천장에서 타고 내려온 물에 온 집 안이 물바다가 된 것은 물론 터진 파이프에서 쏟아져 내린 물로 인해 싱크대의 그릇들이 박살이 나버렸다.
우리는 하루 종일, 이번에는 우리 집의 물을 퍼냈다. 신랑은 연신 "이럴 수가" 소리를 내뱉었고, 나는 울음이 터지기 일보직전이었으며, 주인은 어쩔 줄을 몰라했다. 그날 저녁, 우리는 홧김에 한동안 먹지 않기로 한 한우를 구워먹으면서 이 동네를 벗어나자고 굳게 다짐했다.
'우리의 현실을 보자! 우리는 더 나은 집이 있어야 해!'물난리를 겪고 난 후, 나는 동네에 하나밖에 없는 아파트 단지가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나는 계획했던 박사 논문 쓰기를 미루었고 신랑은 예정했던 박사 시험을 보지 않았다. 그리고 할 수 있는 한 열심히 돈을 벌었다. 쌀이 떨어져도 다시는 하지 말자던 논술 첨삭 아르바이트(이건 안 해본 사람은 정말 모르는 중노동이다)를 집으로 가져와 새벽까지 매달리고, 싼 봉급에도 학원 일자리를 하나씩 더 구했다.
마침 논술이 뜰 때라 고등학교에서 논술 강사로 와달라는 요청들이 있어 여기저기 학교에 논술 강의를 나가기 시작했다. 일단 돈벌이에만 집중을 하니 이전보다는 벌이가 나아졌고 부모님께 용돈도 드릴 수 있어 뿌듯하기도 했다. 한 달에 한 번, 통장을 찍어보는 그날이 우리 부부의 잔칫날이 되기도 했고, 초상날이 되기도 했다. 자동차는 모셔만 두고 웬만하면 대중교통을 이용했으며 그토록 쓰기 싫어하던 가계부도 꼬박꼬박 써나갔다.
하고 싶은 일을 다 그만두고 돈을 버는 것이니, 돈이라도 더 벌어야겠다는 보상심리와 강박관념이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이전에는 생각하지도 않던 먼 곳, 경기도는 물론이고 부산, 순천, 제주도, 거제도와 정선까지도 파견 강의를 나갔고, 항상 새벽에 집에 들어오는 생활이 계속되었다. 로또도 몇 번 샀다. 그렇게, 우리는 이제 서로의 눈동자 속에서 푸른 만 원권 지폐가 보인다고 농담을 할 정도로 열심히, 정말 열심히 생활의 바다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전세 계약 만기일이 점점 다가왔다.
[3년차] 역전세 대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