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겉그림〈내가 사랑한 시편〉
포이에마
베니스영화제 최고상인 황금사자상을 받은 김기덕 감독이 <아리랑>을 불렀다고 합니다. 왜일까요? 민족의 애환과 자신의 외로움을 그 노래로 달래왔던 까닭이겠죠. 오랑캐와 왜적의 수많은 침입에 맞섰던 우리 민족의 혼이 그 노래에 서려 있고, 영화에 대해 누구에게도 배운 적도 없고 인정도 받지 못했던 지난날의 고독을 그 노래로 극복한 이유 말이죠.
민요든 동요든 민중가요든, 혹은 가곡이든 대중가요든 그 속에는 나름대로의 깊은 시어(詩語)가 깃들어 있죠. 민족의 아픔이나 대중의 고통을 시로 어루만지기도 하죠. '사랑'과 '이별'이 중심 주제어로 등장하는 대중가요 속에도 때로는 진지한 시어들이 등장하기도 합니다. 시와 노래는 뗄 수 없는 관계죠.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려 보내실 때에 우리는 꿈꾸는 것 같았도다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그 때에 뭇 나라 가운데에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다 하였도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으니 우리는 기쁘도다 여호와여 우리의 포로를 남방 시내들 같이 돌려 보내소서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이는 구약성경에 들어 있는 시편 126편에 해당하는 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이란 대국에 의해 나라를 빼앗기고 70년 동안 포로 생활을 했죠. 그 이후 바벨론을 무너뜨린 페르시아의 고레스 대왕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포로생활에서 해방시켜 주죠. 이 노래는 그 시절의 포로생활을 청산하고 고토(古土)로 돌아가면서 불렀던 노래입니다. 그야말로 우리민족의 아리랑과 견줄만한 노래였겠죠.
시편은 그렇듯, 바벨론으로 유배를 갈 때 불렀던 노래(시137편)도 있지만, 또 앞서 말한 것처럼 해방되어서 불렀던 노래도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72회 가량 등장하는 '다윗의 시'도 있죠. 총 150편의 시가 담겨 있는 시편은 개인적인 시를 비롯하여 국민적인 시, 그리고 제의를 위한 시로 구성돼 있습니다. 그 중심에는 '찬양'과 '탄식'이 밑바탕에 깔려 있죠.
존 스토트의 <내가 사랑한 시편>은 150편의 시들 가운데서 37편의 시를 묵상하고 설교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시편을 즐겨하는 이유를 어떻게 바라볼까요? 그는 시편이야말로 '인간 영혼의 보편적인 언어를 말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하죠. 그만큼 시편은 인간 심장에서 울러 퍼지는 모든 음조들을 담고 있다는 뜻이겠죠. 그리고 그것은 모든 크리스천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제의와 맞닿아 있을 것이고요.
"C.S. 루이스는 이 시편이 '시가서에서 가장 위대한 시이며, 세상에 존재하는 가자 위대한 시어(詩語) 중 하나다'라고 말했다. 기독교적 관점에서 볼 때 이 시는 구약성경에서 발견되는 계시교리, 즉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모든 인간에게 창조주로(1-6절), 이스라엘에게는 율법 수여자로(7-10절), 그리고 개인에게는 구속자로 알리신다는 교리의 가장 선명한 요약이다."(39쪽) 이는 스토트가 시편 19편을 묵상하며 기록한 내용입니다. 그는 자연계시와 특별계시, 그리고 개인적인 계시로 구성돼 있는 이 시편을 통해 여호와의 율법이 가져다주는 효과를 설명합니다. 인간의 영혼을 그만큼 소성시키고, 마음을 기쁘게 하며, 또한 지혜롭게 한다는 게 그것이죠. 그러니 시편 1편에서 고백한 것처럼, 그 율법을 밤낮 묵상하지 않을 크리스천은 없겠죠.
"이 시편은 항상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를 연상하게 한다. 그의 유명한 찬송시 〈내 주는 강한 성이요(Ein' feste Burg ist unser Gott)〉는 이 시편을 의역한 것이다. 마르틴 루터와 필리프 멜란히톤(Philipp Melanchthon)은 지독한 낙담이 찾아왔을 때 이 찬송을 불렀고, 토머스 칼라일(Thomas Carlyle)은 이 시를 영어로 옮겨 영어권에 친숙한 찬송이 되게 했다. 이 시편은 자연과 역사의 격동 앞에 하나님의 주권을 잠잠히 신뢰하는 아름다운 표현을 담고 있다."(110쪽)
시편 46편을 묵상하며 설교한 내용입니다. 이방 침입자들이 예루살렘을 공격했지만 담대하게 그 성을 수복한 사건을 회상한 노래라고 하죠. 이른바 앗시리아 제국의 산헤립이 북쪽 사마리아를 점령하고 남쪽의 유다까지 집어삼키려 할 때 하나님께서 친히 성벽이 되셔서 그 성을 지켜주셨다는 것 말이죠. 1517년, 루터가 교황청의 위협과 회유에도 굴복하지 않고 종교개혁의 기치를 높이 들 수 있었던 것도 이 시편의 노래 때문이었다고 하죠.
"그리스도인 예배자들은 이 시편을 자신들에게 무리 없이 적용할 수 있다. 신약성경이 우리가 사랑스럽게 부르며 갈망의 대상으로 삼는 하나님의 성전의 실체를 분명하게 말해주기 때문이다. 첫째, 성전은 교회이다. 보편적인 교회이며(엡2:21), 지역교회(고전3:16, 고후6:16)이다. 즉, 믿는 모든 무리를 가리킨다. 하나님은 사람의 손으로 지은 건물에 계시지 않고 그 분의 백성 가운데 계신다(행7:48). 하나님을 뵈러 예루살렘에 갈 필요가 없다. 두 세 사람뿐이라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인다면, 그 분은 우리 가운데 계신다(마18:20)."(145쪽)시편 84편을 묵상하며 고백한 내용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유대인들에게 가장 신성한 곳이요, 하나님 임재의 가시적인 표출 장소라고 하죠. 그것이 1년 중 세 절기에 성전을 방문하려 한 이유였다고 하죠. 물론 경건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예루살렘 성전에만 계신 분이 아니라 모든 곳에 편만하게 존재하는 분임을 알고 있다고 하죠. 그것이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면, 두 세 사람이 있어도, 그곳이 교회임을 명시한 이유겠죠.
물론 스토트도 그 부분을 힘주어 강조합니다. 이른바 요한계시록에 나와 있는 천상의 성전, 곧 '새 예루살렘' 말이죠. 지상의 예루살렘, 곧 지상의 교회가 천상의 모형이라면 진정한 예루살렘은 곧 하늘나라에서 성취된다는 것이죠. 오늘날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을 목말라 하며, 하늘로 향하는 힘든 순례를 끝까지 걸어갈 수 있는 것도, 모두 그날의 희망 때문이라고 말하죠.
베니스영화제 최고상인 황금사자상을 받던 날 아리랑을 불렀던 김기덕 감독도 과연 그렇지 않았을까요? 지금까지 숱한 어려움과 고독을 맞이하면서도 끝까지 굴하지 않고 영화인의 길을 당당하게 걸어올 수 있었던 것, 바로 그 날을 바라본 희망에 있었겠죠. 비록 한국 인들에게는 따뜻한 각광과 전폭적인 지지를 받지 못했어도 머잖아 자기 작품을 인정해 줄 세계인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그 소망 말이죠.
모름지기 크리스천들은 빛과 소금의 사명을 다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욕심이나 이기심이나 높은 자리를 탐하기보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을 이롭게 하는 삶을 선택해야 한다고 말이죠. 그 과정 속에 오해를 받거나 비판을 받더라도 악으로 악을 갚아서는 안된다고 하죠.
그리스도인이 과연 그런 삶을 선택할 수 있는 이유가 있을까요? 바로 '그 날'에 소망을 두는 까닭이겠죠. 지금 눈물을 흘린다고 해도, 고통스럽다고 해도, 사랑의 씨앗을 뿌려야하는 이유도 '그 날'을 바라보는 까닭이겠죠. 그리고 '그 날'에 대한 밑그림은 시편의 고백들을 통해 더 확고하게 붙잡을 수가 있겠죠. 김기덕 감독이 아리랑을 불렀을 때 시편이 떠오른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었습니다.
내가 사랑한 시편
존 R. 스토트 지음, 김성웅 옮김,
포이에마,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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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덕 감독이 '아리랑' 부를 때, 시편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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