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 최고의 '사랑 연속극'은 무엇?

[노래의 고향 18] <서경별곡>

등록 2012.10.18 22:06수정 2012.10.19 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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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 분단 이후 남한에 사는 사람들이 가장 가보고 싶어하는 북한 땅은 어디일까? 중국을 거쳐서라도 가볼 수 있는 백두산을 제외하면, 아마도 금강산과 대동강일 듯싶다. '꿈에 본 금강산'과 '한 많은 대동강'이 눈에 밟히는 사람들, 그들이 바로 남한에 사는 우리 배달겨레이기 때문이다.

대동강이라면 대뜸 생각나는 노래가 있다. <청산별곡>과 더불어 고려가요의 쌍벽으로 평가받는 <서경별곡>이다. '별곡(別曲)'은 본래 신라 이래로 전해져온 속악(俗樂)이나 중국에서 건너온 당악(唐樂), 송악(宋樂)과 다른[別] 노래[曲]를 가리키는 고려의 음악 용어이지만,  <서경별곡>만은 제목에 '헤어질 別(별)'을 쓴 노래답게 '이별 노래'의 절정을 보여준다.


<서경별곡>은 <가시리> 수준의 격조 높은 내용만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세속적인 가치관까지도 고스란히 드러낸다. 그렇다고 <쌍화점> 수준으로 떨어져 '막장' 드라마로 추락하지도 않는다. 그런 점에서 <서경별곡>은 현대사회의 '사랑' 연속극을 떠올리게 한다. '노래하는' 재미가 쏠쏠하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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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강 ⓒ 평화통일대구시민연대 김두현


현대사회의 사랑 연속극 수준인 <서경별곡>

<쌍화점>은 장덕순이 <한국문학사>에서 '망국의 노래'로 평가한 고려가요다. 온 나라에 신하들을 파견하여 미모와 미성(美聲)을 갖춘 여인들을 뽑아오게 한 다음 노래와 춤을 가르쳐 궁중의 기생으로 삼아 밤낮으로 향연에 빠져 산 충렬왕은 이 노래를 가장 좋아했다고 한다. 왕이 그 모양이었으니 나라 안 문화 수준이 어떠했을지는 따져보지 않고도 바로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쌍화점(몽고 빵집)에 쌍화떡을 사러 갔더니 회회아비(외인부대)가 내 손목을 잡더라. 삼장사 절에 불공을 드리러 갔더니 중(성직자)이 내 손목을 잡더라. 우물에 물을 길러 갔더니 용(권력가)이 내 손목을 잡더라. 술집에 술을 사러 갔더니 주인(일반백성)이 내 손목을 잡더라.

<쌍화점>의 가사는, 산문으로 바꿔 읽으면서 축약하면, 대충 위와 같은 내용으로 되어 있다. 신분과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당시 사회의 모든 구성원이 성적으로 문란했다는 사실을 극단적으로 증언해준다. 사회풍자적 요소는 강하지만 그렇다고 문학성이 뛰어난 노래는 아니다.


조선 시대가 <만전춘> 등 상당수 고려가요를 남녀상열지사(男女相悅之詞) 또는 음사(淫辭)라 하여 배척했지만 <쌍화점>만은 '억울하다'고 항변할 처지도 못 될 듯하다. 그 탓인가, 내용은 고려가요 <쌍화점>과 무관하지만 제목만 따와서 만들어진 2008년 영화 <쌍화점>도 결국 '음사' 수준을 뛰어넘지는 못했다.

현대사회의 '막장' 드라마 수준인 <쌍화점>

그에 비하면 <진달래꽃>의 원형으로 여겨지는 <가시리>는 격조 높은 사랑 노래가 어떤 것인가를 멋지게 보여준다. 단 한 자락의 군더더기 수사도 늘어놓지 않지만 사랑을 잃어버린 사람의 애달픔이 곡진하게 표현되어 있다. 

가시리 가시리잇고/ 바리고 가시리잇고                       
날러는 엇디 살라 하고/ 바리고 가시리잇고                      
잡사와 두어리마나난/ 션하면 아니 올셰라
셜온 님 보내옵나니/ 가시난 닷 도셔 오쇼셔                   

가지 말라고 붙잡고 싶지만, 서툴러서 혹여나 님의 마음을 다치면 뒷날 다시 돌아오지 않을까 싶어 보내는 마음! 떠나간 길로 금세 돌아오기를 소망하는 간절함으로 노래를 끝내는 깔끔함! 세상에 그 어떤 남자라 하더라도 이런 여인을 사랑하지 않으리. 떠나가는 남자가 '수준 이하'인 것이다.

결코 '수준 이하'일 수 없는 '민주주의'를 '님'으로 생각하며 기다리고 또 기다렸던 1970∼80년대, 대학가에는 <가시리>가 새로 유행을 했다. 학생들은 민주주의를 희구하며 이 노래를 불렀다. 고려 시대 이후 아득한 세월이 흘렀지만 '님'을 찾는 민중의 희구는 변함이 없었다. '님만 님이 아니라 기룬 것은 다 님이라'고 말한 한용운의 갈파가 완벽하게 적중한 셈이었다.

<진달래꽃>의 원형인 고려가요 <가시리>

그러나 세속적 가치관은 깔끔한 사랑보다 좀 구질구질한 구석이 있는 이야기에 대뜸 귀가 솔깃해진다. 특히 그 사랑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 '불구경'일 때는 완벽하게 그러하다. <서경별곡>은 화자인 여인이 말이 많고, 제3자인 뱃사공도 개입되고, 무대도 이름 높은 대동강이라는 점에서 대중의 흥미를 끌 조건을 두루 갖추었다는 말이다. 아마도 이 노래는 고려 시대에 <청산별곡>이나 <가시리>보다 훨씬 높은 대중적 인기를 누렸으리라 여겨진다. 
 

서경(西京)이 아즐가 서경이 셔울히마르는/ 닷곤 데 아즐가 닷곤 데 쇼셩경 괴오마른
여희므론 아즐가 여희므론 질삼뵈 버리시고/ 괴시란 데 아즐가 괴시란 데 우러곰 좃니노이다.

구스리 아즐가 구스리 바회예 디신들/ 긴히단 아즐가 긴힛단 그츠리잇가
즈믄 해를 아즐가 즈믄 해를 외오곰 녀신들/ 신(信)잇단 아즐가 신잇단 그츠리잇가

서경이 좋은 곳이지만 님이 다른 곳으로 떠나간다면 나는 하던 일 다 버리고 따르리라. 구슬이 바위에 떨어져도 끈은 부서지지 않듯이, 천년을 홀로 지내더라도 님에 대한 내 믿음은 변하지 않으리.

여인은 <가시리>와 엇비슷한 마음을 노래한다. 물론 지명 등 구체적인 어휘들이 많이 등장하기 때문에 <가시리>에 비해 단아한 맛은 많이 모자란다. 특히 3연은 그런 냄새를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이제 '끝'인데 무슨 말인들 못하리. 대중의 언어는 본래가 그렇다.

대동강(大同江) 아즐가 대동강 너븐디 몰라셔/ 배 내여 아즐가 배 내여 노았는다 샤공아
네 가시 아즐가 네 가시 럼난디 몰라셔/ 녈 배예 아즐가 녈 배예 연즌다 샤공아
대동강(大同江) 아즐가 대동강 건넌 편 고즐여/ 배 타들면 아즐가 배 타들면 것고리이다

대동강에 배는 왜 띄웠느냐. 이 넓은 대동강에 배만 없으면 어찌 내 님이 건너갔으리. 사공아, 네가 지금 남의 님 배에 태워 강 건너로 실어줄 형편이냐, 집에나 가 보아라. 너 이러고 있는 동안 네 각시 바람나는 줄도 모르느냐. 내 님은 대동강을 건넜으니 거기서 다른 여자와 놀고 있겠지!

정지상 한시 <송인>, 대단한 이별 절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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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모란대>. 경북대미술관에서 열린 '한일 우키요에전'(2012.5.24.-2012.7.5.)에 전시된 가와세 하스이의 목판화를 재촬영한 것입니다. 따라서 원작과는 여러 모로 다릅니다. ⓒ 가와세 하스이

노래는 아니지만 정지상이 남긴 <송인(送人)>도 대동강을 무대로 지어진 이름 높은 한시다. 김부식은 정지상을 '서경 출신이기 때문에 묘청의 반란에 동조한다'면서 죽였다. 1135년(인종 13)의 일이다. 그나저나 정지상의 한시 역시 대동강이 이별의 무대임을 잘 보여준다.

雨歇長堤草色多
비 갠 언덕에 풀빛 짙어오는데
送君南浦動悲歌
남포로 님 보내니 노래는 슬프구나
大同江水何時盡
대동강 물은 언제 다 마를까
別淚年年添綠波
해마다 이별 눈물 보태는 것을

분단 이후 대동강을 노래한 유행가 중 지금도 가장 널리 애창되는 곡은 야인초 작사, 한복남 작곡의 <한 많은 대동강>일 것이다. 노래는 손인호가 불렀는데, 1957년에 작곡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해방 직후인 1947년 남한으로 내려온 가수 손인호는 본래 평안도가 고향이었던 만큼 특히 이 노래를 부를 때면 더욱 '한 많은' 심정이 되었으리라. 

한 많은 대동강아 변함없이 잘 있느냐/ 모란봉아 을밀대야 네 모양이 그립구나
철조망이 가로막혀 다시 만날 그때까지/ 아, 소식을 물어본다 한 많은 대동강아

대동강 부벽루야 뱃노래가 그립구나/ 귀에 익은 수심가를 다시 한번 불러본다
편지 한 장 전할 길이 이다지도 없을소냐/ 아, 썼다가 찢어버린 한 많은 대동강아

통일 능력과 열망 갖춘 지도자는 누구인가

우리나라는 지구상 유일의 분단국가이다. 과연 지금도 우리나라는 분단국가답게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NLL 논란에 빠져 있다. 역량 있는 국가지도자답게 통일 방안을 국민 앞에 내어놓을 생각은 하지 않고 어떻게 하면 분단상황을 선거에 이용할 것인가 골몰하고 있다. 그러니 서양사람들은 '한국'이라면 '전쟁'부터 떠올린다고 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대동강을 건너가 다른 정인을 사귀어도 좋으니, 통일을 앞당기는 일에 혼신의 마음과 능력을 쏟아부을 수 있는 민족의 지도자가 나타났으면 좋겠다!'

대통령 선거 때마다 해보는 생각이다.
#서경별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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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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