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규 의사'? 나는 도무지 그를 용서할 수 없다

[주장] 10·26이 없었으면 박근혜도 없다

등록 2012.10.26 11:53수정 2012.10.26 1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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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30년이 지난 일이지만 그날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교련 학점을 이수하지 못해 학업을 중단하고 고향집에 내려가 강제징집에 대기하고 있던 때 뒷집 사촌형이 전해준 소식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대통령 죽었대."

도무지 믿겨지지가 않아 몇 번을 되묻자 형은 직접 라디오를 틀어주었다. 라디오는 모든 정규방송을 중단하고 대통령이 만찬장에서 총격을 당해 사망했음을 전했음에도 여전히 실감은 나지 않았다. 내 말문이 트이기 시작할때부터 대통령이었고, 언제까지고 권좌에서 내려오지 않을 줄 알았던 그의 시대가 이렇게 허망하게 종말을 고한 것이다.

만찬, 오발, 총격 등 여러 얘기가 오고 갔지만 17년간을 군림해오던 절대권력의 갑작스런 공백은 우리 모두에게 엄청난 불안감과 불확실한 희망감을 동시에 가져다 주었다. '혹시 북한이 남침해오진 않을까?' 하는 우려와 유신체제의 종말로 인한 민주주의 회복에 대한 희망이 급작스레 눈앞에 전개된 것이다.

계엄령이 선포되고, 김재규 당시 중앙정보부장이 대통령 시해범으로 체포되었으며,  다시 정승화 계엄사령관이 체포되는 12·12군사반란과 80년 '서울의 봄', 광주민주항쟁과 전두환정권 출범 등으로 정국은 회오리 치듯 이어졌다.

박정희 정권 평가와 심판 기회를 박탈한 '10·26'

10·26의 역사적 의미를 함축하면 단지 '박정희시대의 종말'이라고만 정의할 수 있다. 어떤이는 이 사건을 '유신시대의 종식'이라고 하지만 우리 사회는 그 후에도 유신과 흡사한 전두환 독재를 겪었으니 유신시대를 종식시켰다거나 '김재규가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는 일각의 찬사에 추호도 동의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표피주의에 편승한 이런 주장들이 우리 사회가 10.26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하는 것을 오히려 방해하고 있다고 본다.


그렇다면 10·26이 '박정희시대의 종말' 외에 어떤 역사적 의미가 있을까? 그것은 '기회의 박탈'이란 간단한 말로 요약할 수 있다. 10·26은 박정희시대에 대해 우리 사회가 올바른 가치판단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했으며, 재임기간 중 자행된 반민주·반인륜적 범죄와 권력형 비리에 대한 진실규명기회를 박탈했다. 박정희와 그 추종자들이 자행한 범죄에 대해 응분의 책임을 물을 사법적 기회를 박탈한 것이다.

만약 10·26이 없었다면 박정희는 어떻게 됐을까. 1979년 당시 박 정권은 이미 심각한 권력 말기적 증상을 보이고 있었다. 민심이반이 심각해 대통령 직선제를 포기하고 국민의 기본권을 깡그리 무시한 유신개헌을 단행하고도 여당인 민주공화당은 1978년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신민당에 크게 패했다. 설상가상으로 도덕외교를 앞세운 미국의 지미 카터 행정부는 박 정권의 민주주의 탄압에 대히 사사건건 우려를 표하고 박정희가 퇴진할 것을 압박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위기를 느낀 박 정권은 공안사건을 조작하며 민주인사를 탄압하며 권력유지에 안간힘을 쏟았지만 1979년 8월 YH사태가 터졌고, 당시 신민당 총재 김영삼의 국회의원 제명 그리고 10월 부마항쟁 등 시국사건이 꼬리를 물고 이어져 유신독재에 대한 국민의 저항이 전국으로 확산 폭발하는 것은 시간문제에 불과했었다. 김재규의 거사의 가장 중요한 동기로 알려진 차지철과의 갈등, 박정희의 신임에 대한 의심 등 권력 내부의 반목과 불신은 이미 정권이 붕괴 직전에 이르렀음을 방증한다.

당시 상황에서는 10·26이 없었더라도 단지 시간이 필요했을 뿐 박 정권의 붕괴는 기정사실로 예고되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시정에는 '최규하를 후계자로 낙점했다'든지 '박정희가 퇴진 후에 영남대학교 이사장으로 갈 것'이라든지 여러 설이 공공연히 나돌 정도였으니 아마도 박정희는 수족처럼 부릴 수 있는 허수아비를 후계자로 세우고 막후에서 권력을 조정하는 퇴임 후의 구도를 나름대로 구상한 것으로 추측된다.

하지만 훗날 노태우를 후계자로 세운 전두환이 '국가원로자문회의'라는 기구를 통해 노태우를 막후에서 조정하려 했다가 실패한 사례가 말해주듯 절대권력이 붕괴하면 후계자는 스스로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전임자에게 불거진 의혹들을 파헤칠 수밖에 없는 것이 권력의 속성이다. 하물며 당시 시국상황은 설사 박정희가 후계구도를 통한 연착륙을 고려했을지라도 민심이 이를 용납할 상황이 아니었으니 10·26이 아니더라도 박정희는 국민의 저항에 의해 하야할 수밖에 없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비운의 지도자'로 만들어준 사건... 그 때문에 박근혜가 있다

박정희가 살아서 하야했다면 우리 사회와 역사는 그에게 어떤 책임을 묻게될까? 첫째, 5·16군사반란의 정당성이 가장 먼저 도마 위에 올랐을 것이다. 물론 이것이 군사반란으로 인정됐다면 그는 반란의 수괴로 사형형에 해당한다. 둘째, 인혁당 사법살인, 장준하 의문사, 민청학련 사건, 김형욱 납치살해사건 등과 같은 반민주·반인륜적 범죄에 대해 책임을 묻게 되었을 것이고, 그는 교사범에 해당하는 처벌을 받게 되었을 것이다.

셋째, 스위스 비밀 계좌설, 부일장학회(지금의 정수장학회) 강탈, 영남대학교 강탈 등과 같은 권력형 비위에 대한 진상조사가 진행되었을 것이고, 그가 재임 중 갈취한 기업이나 개인 재산에 대한 반환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넷째, 그의 마지막 모습이 그러했듯이, 안가에서 저질러진 수많은 여성들에 대한 성적 착취 역시 심판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33년 전 오늘 김재규의 총격으로 우리 사회는 이 모든 일들에 대한 진상을 규명하고 책임을 물을 기회를 잃고 말았다. 결과적으로 김재규가 박정희의 숱한 의혹들을 묻어버린 셈이다. 박정희가 살아서 실각하고 그가 자행한 숱한 범죄들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면 법의 심판으로 사형에 처해졌을 것이다. 설사 사회가 관용을 베풀어 목숨을 부지했을지라도 '기껏해야 29만 원 재산이라더니 골프나 친다'며 국민의 조롱거리로 전락한 전두환 신세를 면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리 사회 절반에 가까운 국민의 의식을 지배하는 '박정희 향수', 그리고 유력한 대통령 후보로서 박근혜가 있게 한 출발점은 바로 김재규의 10·26이었다. 부인 육영수가 그랬던 것처럼 적지 않은 국민의 뇌리에 박정희 역시 '부하의 흉탄에 맞아 죽은 비운의 대통령'으로 각인되어 있기에 오늘날 더 이상 미화할 수 없을 정도로 미화된 박정희 향수가 망령처럼 떠도는 것이다. 김재규를 용서할 수 없는 이유이다.
#10.26 #김재규 #박정희 #박근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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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음악 오디오 사진 야구를 사랑하는 시민, 가장 중시하는 덕목은 다양성의 존중, 표현의 자유 억압은 절대 못참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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