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농에 대한 섣부른 기대보다는 자신에게 맞는 귀농을 선택하는 것이 중요하다.
오창균
귀농 2년만에 다시 서울로
김선일씨는 16년 전,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귀농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도법스님의 말씀을 품고 귀농학교에 다니면서 착실히 귀농을 준비했다. 정착할 지역을 찾아다닌 지 몇 년, 드디어 강원도 어느 농촌마을에 폐가를 얻어 아내와 갓 돌이 지난 아들을 데리고 서울을 떠났다. 때는 IMF의 검은 망령이 중산층 아래의 삶들을 파괴하던 1999년, 반지하 전세금 2500만 원이 새 삶을 펼칠 종잣돈이었다.
김씨는 품팔이 농사일과 궂은일도 마다않고 나섰다. 동네사람으로 빨리 인정받기 위한 노력이었다. 그러나 농촌의 인심도 각박한 시대를 피할 길은 없었던지 굴러온 돌이 알아서 피해가야 하는 게 현실이었다.
1년 뒤 옆 동네로 집을 옮겼다. IMF로 인해 평탄한 삶에서 튕겨져 나온 노숙자들과 함께 산에 올라가 벌목하는 일을 하면서 살림살이를 꾸려나갔다. 그러면서 농사지을 땅을 알아보았지만, 때마침 펜션 투기바람이 불어닥쳤다. 전세금 2500만 원으로는 어림도 없을 만큼 땅 값이 치솟았다. 안정적 수입조차 없어 경제적으로 쪼들렸던 김씨는 정착이 불가능하리라 보고, 미련 없이 짐을 싸서 서울로 돌아왔다. 2년만의 리턴이었다.
그러나 다시 돌아온 서울에는 전세대란이 기다리고 있었다. 귀농할 때 땅 사려고 가져갔던 반지하 전세금 2500만 원을 그대로 가져왔건만 그 돈으로 전셋집을 구하기란 불가능했다. 선택할 것도 없이 처갓집 방 한 칸을 얻어 다시 서울생활을 시작했다. 다행히 전에 다니던 직장에 취직이 되었고, 아내도 보험설계사로 일을 시작했다.
그토록 떠나고 싶었던 도시로 다시 돌아온 생활이 행복할 리 없었지만 귀농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기에 1년간 직장 생활을 하면서도 휴일이면 다시 정착할 귀농지를 찾아서 전국을 누볐다. 한창 귀농 열기가 뜨거웠던 시기라 귀농을 준비하는 이들의 귀를 솔깃하게 하는 다양한 지원 사업이 쏟아졌고, 지원금 액수를 놓고 정착지를 결정하는 이들이 생겨날 정도로 귀농인구를 유치하려는 지자체의 경쟁도 뜨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