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농운동본부 텃밭(자료사진)
김병기
나는 이제 도시에서 살 수 없다 나는 이제 도시에서는 살 수 없다. 정체된 차량 속에서 신호를 기다리는 일이나 푸른 숲도 보기 힘든 콘크리트와 금속, 유리로 둘러싸인 풍경, 신호 아래 길게 줄 선 자동차 사이에 끼어 있는 일도 견디기 어렵다. 출퇴근시간에 사람에 둘러싸여 어두운 터널을 이동하는 지하철, 매일 저녁이면 시커멓게 때가 앉은 소매도 견디기 힘들다.
그때가 그랬다. 7년 전. '한 번 도시를 벗어나 볼까'하고 간절히 생각했다. 그러려면 준비를 해야했다. 인터넷으로 관련 카페나 블로그 등을 통해 공부를 하고 모임이나 교육 등에도 참석해 정보를 나누었다.
도서관에 붙박이하며 <귀농통문>, <민들레>같은 잡지를 섭렵했다. 부안에서 공동체와 시골 출판사를 운영하는 윤구병씨가 쓴 <잡초는 없다>, 후쿠오카 마사노부의 <짚 한 오라기의 혁명> 등을 읽으며 감탄하기도 했다. 지금 그 시절을 떠올리면 쑥스러운 마음이 들기도 한다.
내 나이 30대. 급여가 급속히 오른다면 재테크 등을 통해 운 좋게 목돈을 마련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솔직히 자신이 없었다. 경쟁을 통해 누군가를 누르고 위로 오르고 그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흔히 '사업적 수완'을 발휘하는 것은 내 성격상 불가능했다. 그렇게 나의 삶을 "사는대로 생각하게" 내버려 두고 싶지 않았다. 본래 '한 번 부딪쳐보자' 스타일은 아니다. 신중하게 재고 또 재고 되도록 보수적인 결정을 내려 실천하는 것이 나였다.
생각보다 삶의 전환은 쉽고 빠르게 이루어졌다. 후배가 자기 어머님 집이 비었다며 가서 그냥 살라고 한 것이다. 오래된 한옥에 벽돌을 덧대고 알루미늄새시를 입혀 보완한 집이었다. 일 년간 살았다. 너른 들에는 때때로 제초제를 뒤집어쓴 붉은 풀밭만 눈에 띄었다. 반경 30킬로미터 내에 있는 원자력 발전소와 이웃한 냇가는 원래 내가 생각한 '시골 살이'의 이미지와는 맞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사는 곳을 옮겨야 했다. 전국을 다니며 찾았다. 산골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정착을 위해 땅값이 싼 곳으로 골랐다. 지금 전라북도 산골 진안으로 옮긴 것은 만족할 만한 선택이었다. 대부분 험준한 산지로 이루어진 고원지대로 개발의 영향을 덜 받아 산림이 풍부하고 물도 깨끗했다.
공기의 신선함이 좋았고 공장이나 산업단지도 거의 없는 곳이었다. 정착한 마을의 경우 축사도 없는 곳이었다. 게다가 귀농귀촌 연착륙을 위한 마을간사제도(마을 간사가 귀농귀촌에 도움이 되는 프로그램을 개발, 적용시키는 것)가 막 시작되어 그곳 마을과 주민과 교류하면서 정착을 준비할 수 있다는 점이 좋았다.
매일 마을을 어슬렁거리면서 주민을 만나고 어디서 차를 권하거나 술을 권하면 마다않고 받아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호의적이긴 해도 긴 시간을 할애하여 나와 이야기 나누어줄 이들은 정해져 있었다. 이미 나보다 몇 년 전, 혹은 십년 전에 도시의 삶을 정리하고 내려와 터전을 꾸미며 살아가는 이들이었다. 그들의 위로가 현실을 가리기도 했다.
그냥 흘러가는 구름마냥 사람 만나 이야기 나누며 느리고 천천히 어슬렁거리는 일이 지속되었다. '저 놈 여기 와서 뭐하는 거여' '마당에 풀 좀 봐' '개는 먹지도 않을 것 같은데 세 마리씩이나 키우고' 등의 말이 돌아 내 귀로 들어올 때 즈음 마을 간사를 그만두어야 했다.
그림 같은 집짓기? 아름답지만은 않았다그렇게 귀촌을 결심하고 도시를 떠난 뒤 2년 만에 꿈을 이룰 때가 됐다고 판단했다. 뭐한 김에 쉬어가자고 '저 푸른 초원'은 아니지만 밭을 농지 전용해 '그림 같은 집'을 짓겠다고 말이다. 물론 모아놓은 돈이 없었다. 부모님께서 결혼하면 도시에 아파트 전세라도 얻어 주려고 모아놓은 돈을 받아다가 땅을 사고 집을 지었다. 집짓기. 5년 만에 고백하건대 마냥 아름답지만은 않은 일이었다.
수없이 공간에 관한 고민을 해야 하고 능률과 조화를 고려하지 않으면 살면서 후회가 쌓이기 마련이다. 재료를 무엇으로 하느냐부터 시작해 벽 두께며 화장실과 창의 위치, 크기, 전등의 종류와 콘센트 개수 등을 고민하지 않으면 살면서 끊임없이 불편함을 느끼게 된다.
도시생활 당시 꿈의 공간으로 여겼던 한옥을 짓겠다고 마음먹은 순간부터가 무리였다. 돈이 없어 벽이며 바닥이며 전기, 설비 등을 공부해가며 혼자서 다 했다. 완공을 하지 못한 것은 물론이고, 내부의 마감은 엉성했고 공간도 나누지 못했다. 외부 벽은 3년 만에 미장을 마쳤지만 기단과 조경은 꿈도 꾸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농사를 짓지 않는 난, 30킬로미터 떨어진 직장을 매일 출퇴근한다. 그러다보니 '그림같은 집'은 어디로 가고 "그냥 바람만 막아주면 되지"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집을 지을 당시, 무려 6개월 동안 건축노동자가 되어 새벽밥 먹고 현장 나와 일하고 저녁 먹으러 들어가는 일을 반복했다. 그렇게 터를 다진 지 일년 만에 입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