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온 대성당에서 나를 저울질 한다

[나와 함께 걷는 산티아고 길 27] 엘 부르고-레온

등록 2012.12.01 15:51수정 2012.12.01 1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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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부터 과일을 사려고 모여든 시민들. 가격이 저렴해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다.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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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정의 묘미는 없지만 깔끔하게 거래할 수 있는 과일과 채소 kg당 가격. ⓒ 문종성


카미노 순례 이후 처음 맞는 휴일. 산 마르코스 광장에서 열리는 토요 시장의 활기에 덩달아 달뜬 기분이다. 총천연색의 신선한 과일이 수레마다 가득하고, 한쪽에선 꽃을 든 남자들이 호객행위를 한다. 상인들은 엉너리치는 빈말이 없다. 그렇다고 덤이 있는 따뜻함이 있는 것은 또 아니다. 판매자와 구매자 모두 제 값 주고 제 몫을 취하는 상거래에 충실할 뿐이다. 아침 식사를 대신해 과일 몇 알로 허기를 면한다. 달다. 청춘도 이처럼 스위트하다면 좋으련만.

광장 뒤편으론 만물 시장이 펼쳐져 있다. 클래식한 트랜지스터 라디오에서부터 최신 일안 리플렉스 카메라, 주인과 오래도록 숨을 공유했을 각종 장신구와 생활물품들이 새로운 임자를 기다리고 있다.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가치를 발하는 것과 되레 효용가치가 사라지는 것이 공존하는 장터엔 옅은 긴장감이 서려있다. 입김을 내지 않고 거래되는 법은 없다. 판매자와 구매자의 입김이야말로 커뮤니케이션의 시작이자 본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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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이 간 탁상시계에서 지난 세월의 흔적을 발견한다.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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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 시장에서는 주로 헌 책과 골동품, 중고 생활용품 등을 판매한다. ⓒ 문종성


물건의 가치는 가격에 있지 않다. 보는 사람의 눈과 가슴으로 판단된다. 과일 시장에선 천진난만한 아이였던 문군은 스페인의 유서 깊은 문화와 전통을 향유한 장터에서는 어느 새 노인이 된다. 생경한 모든 것은 순례자의 마음을 끈다. 하지만 이 짐들을 얹어 걸어가야 할 고행을 생각하니 도리질을 하게 된다. 애석해하는 상인의 낯빛에 한 줌 미소를 던지며 다음을 기약한다.

정처 없이 골목을 배회하다 너른 레갈 광장(Plaza Regal)을 만난다. 광장 끝에는 고딕 양식의 무류한 레온 대성당이 자리하고 있다. 머다랗게 보이던 대성당은 가까이 다가갈수록 그 위풍당당함이 더해진다. 외양도 외양이지만 입구에 들어서니 알 수 없는 위엄 앞에 촐싹대던 성정이 곧 시그러진다. 신의 존재 앞에 이곳으로 발길이 끌려온 이유가 평명해지기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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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딕양식의 아름다움이 돋보이는 레온 대성당. 13세기에 지어졌다.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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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함이 극치에 달한 스테인드글라스 창들. 총 125개. ⓒ 문종성


복음삼덕(福音三德). 예수가 복음적인 삶을 위해 가르친 세 가지 덕행이 있다. 청빈하게 살 것, 정결하게 살 것, 진리를 따라 살 것. 그리고 그가 전 생애에 걸쳐 지킨 언행은 단 한 단어만 필요로 한다. '사랑'이다. 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넘어 원수까지도 사랑하라 했지 않던가. 수많은 신자들의 기도와 흐느낌의 이유를 문군은 알 것 같다. 그들이 회개하는 이유는 예수의 가르침을 모르는 무지함이 아니다. 오히려 그 진리를 정말 잘 알기 때문이다.

'먼 곳에서부터 기도하라.'

날라리 크리스천 문군도 이따금씩 경건해 질 때가 있다. 그가 삼는 기도의 방법이다. 나부터 기도하면 사사로운 욕구충족을 위한 기복주의로 흐르기 쉽다. 번영신학의 정점에서 신은 곧 '소원자판기'일 뿐이다. 그래서 멀리부터 기도한다. 물리적인 거리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아프리카나 남미의 소외된 이웃뿐만 아니라 어쩌면 부모, 이웃, 친구가 가장 멀리 있는 사이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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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성당 예배당 한 쪽 벽면에 조각된 성경의 한 장면 중 ‘예수의 수난사’ ⓒ 문종성


그렇게 스스로를 위한 차례가 오면 자신의 문제는 되레 작아 보일 때가 있다. 외롭고, 힘들어 기도하려 했는데 오히려 위로와 감사가 된다. 자신에게 주어진 행복을 다 헤아리지 않은 채 불평과 불만을 토로하는 건 가슴 뛰어야 할 인생의 주도권을 빼앗기고 있는 것 아닐까? 문군은 그런 생각에 기도를 통해 무엇인가를 구하기보다 자신을 저울질(히브리어로 '히트 팔렐') 해본다. 단 한 순간 뜨거운 사랑이었는지 점검해 보는 것이다.

화려함의 극치를 자랑하는 스테인드글라스 창을 통해 빛이 새어 들어온다. 정적과 침묵으로 가득 메워진 대성당에서 유일하게 탄성이 터지는 공간이다. 빛의 따스함이 세심하다. 그 빛은 거룩해서 상한 마음을 만져주고, 교만함을 털어내게 한다. 눈물 없이도 뜨겁게 감동을 주는 힘이 있다. 그 빛을 바라보며 마침내 저울추가 기울어지는 것을 느낀다. 부끄러움으로 점철된 인생에 다시 한 번 사랑할 수 있고, 사랑받을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 신의 은총이다.

따뜻한 여운이 가시지 않은 늦은 저녁, 겨울 칼바람을 헤치고 패스트 푸드점으로 순례자들이 하나 둘 모여든다. 다음 날 여정을 위해 문군은 햄버거에 콜라나 잔뜩 마실 요량이다. 그런 그 앞으로 뜻밖에 쵸코 케이크가 놓여진다. 분위기 파악하느라 잠시 어수선한 틈을 타 누군가 외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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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자들이 깜짝 이벤트로 마련한 쵸코 케이크 ⓒ 문종성


"문군,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정말 축하해요!"
"뭐라고요? 오, 그대들. 맙소사!"

내일은 그의 서른 두 번째 생일이다. 겨울 카미노에서는 작은 슈퍼마켓도 장담하기 어려워 미리 축하하는 것이다. 문군보다 더 신이 난 순례자들은 케이크에 초 대신 감자튀김을 꽂고, 생일 축가를 부르며, 조그만 선물을 증정한다. 꽤 실용적인 건빵 바지다. 카미노 동지들이 서프라이즈 이벤트를 연 것이다. 늘 외로움을 투덜거리던 문군이 쑥스러운지 붉어진 얼굴을 차마 들지 못한다.

문군 몰래 준비한 거란다. 그 진심을 알기에 문군은 코끝이 찡해진다. 지금껏 순례자들은 큰 트러블 없이 하나가 되어 있었다. 쓸쓸하고 적적한 겨울 카미노에 도무지 만날 일이 없을 지구인들이 세상의 한 점에서 만나 길동무가 된다는 것은 깊은 인연이 아닐 수 없다. 축하받는 이보다 축하해주는 이가 더 설레고 기뻐하는 소소한 나눔들, 겨울 카미노가 준 선물이다. 

문군은 하루 종일 따뜻하다. 오랜 걸음으로 지쳤던 영혼에 다시 생기가 넘친다. 스스로가 놀랄 정도로 헤벌쭉 웃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웃음의 근원, 아픔의 치유, 모두 사랑에 있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만큼이나 가치 있는 것은 없다. 그 가치를 경험할 때 깊은 감격의 환희가 밀려온다. 문군은 어찌나 뜨거운 가슴인지 윈드 자켓 지퍼를 올리지 않고 숙소까지 양반걸음으로 걸어간다. 한 손에 콜라가 들려있어서 그런 것만은 아닐 것이다.
#레온 #산티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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