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과 약식(藥食)과 치유의 삶

여섯 번째 가을의 결산

등록 2012.12.06 10:28수정 2012.12.06 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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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이탈리아 여행을 갔을 때, 로마에서 피렌체로 가는 길에 가이드가 도로 주변의 한 시골 마을을 가리키며 '오르베또'라는 마을인데 '슬로시티'의 원조라고 했다. '슬로시티' 국제연맹이 그곳 사람들이 만든 민간단체인데 신청하는 나라의 슬로시티를 그 사람들이 실사하여 선정한다는 설명을 곁들었다.


가이드의 말이 얼마나 정확한지는 모르지만 우선 '슬로시티'라는 유행어를 만들어 그걸 '브랜드'로 자신들이 주도권을 쥐고 실사를 다닌다는 이탈리아 사람들의 상술에 배가 아팠다. 그리고 그보다는 '슬로시티'로 선정되면 정말 세계적인 관광 명소가 될 것이라고 기대하면서 그런 '슬로시티'라는 브랜드를 빌어 관광지로 선전하려는 우리의 태도가 나를 불편하게 했다. 

한참 '신토불이'와 '웰빙' 말이 유행한 적이 있었다. '웰빙'을 어거지로 '참살이'라고 번역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웰빙'이라는 말은 듣기 어렵게 되었다. 그리고 나온 말이 '힐링'이라는 또 다른 외래어다. 치유라는 뜻을 가진 '힐링'이라는 말이 유행처럼 쓰이는 우리 현실을 보고 들으면서 나는  전통을 담은 장독대의 항아리 틈에 놓인 붉은 고무통을 보는 느낌이 들었다.

굳이 '슬로우'라는 느림의 뜻, '웰빙'과 '힐링'라고 해야만 건강한 삶이 되고 치유 효과가 더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그래야만 더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전원생활에 '슬로우'라는 느림의 뜻, '웰빙'과 '힐링'라는 뜻이 다 담겨 있음을 모르는 것일까?

무서리 내린 아침            거실 창 밖으로 보이는 전원의 나무들. 
자연에 순응하는 듯 하면서도 당당한 모습들이다.
무서리 내린 아침 거실 창 밖으로 보이는 전원의 나무들. 자연에 순응하는 듯 하면서도 당당한 모습들이다.홍광석

개인적으로 텃밭 농사를 하기 전까지 병원에서 인정하는 병만도 심장병, 당뇨, 통풍, 혈압, 지방간 등 많은 병을 안고 살았다. 병원의 경고 후, 하얀 쌀밥보다는 현미가 섞인 잡곡밥으로, 육식보다는 채식으로 식단을 바꾼 것은 물론이고 아내는 냉장고 벽에 각종 질명에 해로운 식품과 이로운 식품을 가려 붙여놓고 음식부터 제한했다. 좋아하는 굴 멸치는 통풍에 좋지 않다기에 멀리해야 했고, 젓갈은 짜다는 이유로 밥상에서 밀려났다.

아침에 눈을 뜨면 혈당을 체크하고 검은 잘 말린 생약콩을 날로 삼키는 일로 하루를 시작했다. 홍삼, 삼백초, 누에가루, 오디, 도라지 등 좋다는 약을 많이도 먹었다. 학교 급식소 음식도 도움이 안 될 것 같다면서 1년가량 점심대용의 쑥떡을 싸들고 출근하여 식은 떡을 교무실에 혼자 앉아 먹기도 했다. 밤에는 십리 길을 의무적으로 걸으면서 하루를 마쳤다.  그리고 통풍 치료, 심장병 치료를 위해 침도 맞고 병원도 다녔다. 물론 노력한 만큼 효과는 있었다. 그러나 완전한 정상으로 되돌리기에는 어려운 일이었다.


그 무렵 아내 역시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으로 오랫동안 고생을 했다. 음식을 가릴 병은 아니었는데 몸의 왼쪽 절반이 원인을 알 수 없는 통증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했고 그러다보니 몸이 쇠약해져 정상적인 활동이 어려워졌다.

2006년 2월 말, 결국 30년 직장생활을 어쩔 수 없이 마감했다.  그리고 지역의 대학병원 서울의 유명 병원, 그리고 한방 병원을 두루 거쳤다. 하지만 병원들의 진단과 처방은 각각이었다. 특별한 원인을 잡아내지 못했다고 본다. 그랬으니 치료약이 효과가 있을 것인가. 나중에는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지리산 도사의 기를 받기도 했고, 침과 뜸 등 민간요법에 의존했지만 결과는 나아지지 않았다. 우리가 귀촌을 결단하고 2007년 숙지원 땅을 매입하고 텃밭 농사부터 시작했던 배경에는 그런 사연들이 있었던 것이다.
  
남천      무서리가 내린 날 아침에 잡은 남천의 모습.  시골이 아니고는 보기 어려울 것이다. 서리를 견디는 남천에서 강한 의지를 본다.
남천 무서리가 내린 날 아침에 잡은 남천의 모습. 시골이 아니고는 보기 어려울 것이다. 서리를 견디는 남천에서 강한 의지를 본다. 홍광석

그리고 6년. 이제 나는 심장병을 제외하고는 병원에 다니거나 약을 먹지 않는다. 아내도 많이 좋아져 병원 치료는커녕 한 가지 약도 복용하지 않는다. 물론 우리의 건강회복은 전에 먹었던 약의 효과일지 모른다. 또 알 수 없는 우연한 결과일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의 체질이나 나이 그리고 병의 정도에 따라 다르겠지만, 우리의 건강 회복은 약물이나 병원 또는 민간 치료보다는 자연스럽게 텃밭에서 노동하고 내가 생산한 깨끗한 채소 위주로 밥상을 조절하면서 끊임없이 자가 치료를 했던 성과라고 생각한다.


얼마 전, 지인의 소개로 전원생활을 꿈꾸는 의대 교수가 다녀갔다. 내가 귀촌을 하게 된 배경을 이야기하면서 요즘 건강해졌다는 말을 했더니 내 말을 들은 그 교수는 심적인 스트레스를 적게 받고 적당한 근육운동을 했기에 심장병에도 도움이 되었을 것이라고 했다. 텃밭농사지만 쉬운 일은 아니다. 괭이와 삽만으로 밭을 파고 이랑을 만드는 일은 상당한 중노동이다. 고구마와 야콘을 캐는 일도 허리 아픈 일이다. 고추 밭을 만들고 지지대를 꽂는 일도 어깨 근육운동이다. 나무를 옮기는 일도 완전한 누구나 할 수 없는 일이다.

지금 유일하게 심장병 약을 복용하는데 그 약의 효과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지난 2009년 봄 이래 심장발작으로 인해 응급실에 간 적이 없었고, 금년에도 발작이 일어난 횟수도 몇 번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떠올리니 그 교수의 말대로 적당한 근육운동의 효과라는 말에 일리가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앞으로 육체적인 노동이 정말 심장병을 완화시키는 데 효력이 있는지는 좀 더 관찰해볼 일이라고 본다. 그렇지만 일단은 우리의 귀촌이 잘 된 선택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은 사람과 더불어 사는 세상에서 어디 간들 특별히 다르지 않다고들 말한다. 그러면서도 마음먹기에 따라 세상이 달라진다는 말도 한다. 전원생활도 마찬가지다. 음식물 쓰레기는 자원으로 활용한다지만 태울 수도 묻을 수도 없는 쓰레기를 버리려면 동네 입구까지 들고 가야만 하는 불편이 있다. 시장이 멀다거나 택배 배달이 늦는 등 대부분 지역적인 여건 때문에 겪는 불편도 있다. 난방은 화목 보일러를 사용하기 때문에 하루에 한 번씩 재를 퍼내고 서너 번씩 나무를 넣어야 하는 번거로움도 있다.

그러나 사람으로 인한 갈등과 경쟁이 없는 곳이다. 타인의 간섭도 없고 내가 누구를 감시하고 타박할 일도 없는 곳이다. 복잡한 계산이 필요치 않는 곳이다. 비록 산해진미를 먹지는 못하지만 텃밭에 깨끗한 채소가 자라고 창고에는 거두어 저장한 고구마를 쌓아두었으니 주린 배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곳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나이 들어 자족하며 건강하게 산다는 사실만으로도 전원생활의 불편은 상쇄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가을걷이가 끝난 농촌의 풍경을 보고 있으면 조금은 쓸쓸해진다. 이 시기에는 특수 작물을 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농촌 남성들이 땀 흘릴 일도 거의 없다. 농한기인 셈이다. 그래서 옛날 농촌에서는 일없는 농민들이 모여 투전을 하다가 패가망신하는 경우를 당하기도 했을 것이다.

요즘 나도 한심(閒心)하게 보낸다. 오전에는 책을 읽거나 글을 쓰고 볕이 좋은 오후에는 미루어왔던 나무를 옮기기나 내년을 대비하여 운동 삼아 텃밭을 뒤적인다. 괭이로 땅을 파는 일은 근육운동만이 아니라 쉼 없이 온몸을 움직이는 운동이다. 등에 땀이 나면 멈추고 추우면 양지 쪽으로 피하면 된다. 숙지원을 한 바퀴 돌면서 내년에 어디에 무슨 작물을 심을까 하는 구상도 심심찮은 일이다. 금년에 비해 텃밭이 조금 넓어졌기 때문에 고구마와 고추를 좀 더 심을 작정이다.  

노후를 건강하게 보내는 계획은 개인이 지향하는 목표, 그리고 가치관과 취향 등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적당한 육체적인 노동이 필요하다는 사실에 반대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건강에 관심이 높은 탓인지 텔레비전마다 건강을 다루는 프로그램을 방영하지 않은 곳이 없다. 그런데 그런 프로그램의 결론을 보면 대부분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적절한 운동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끝맺는다.

은퇴자들이 쉽게 늙는 이유 중의 하나가 운동부족 때문이라고 말하는 경우도 들었다. 노년의 건강을 지키기 위해서는 더 운동이 필요하다는 말일 것이다. 수영, 등산, 골프 등 건강 유지를 위한 운동은 많다. 무엇을 선택하건 개인의 형편과 취향에 따른 결정은 존중되어야할 것이다. 그러면서도 지난 6년 자연과 더불어 살아온 개인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슬로시티', '웰빙', '힐링' 이 셋을 한꺼번에 모아 누릴 수 있는 일이 텃밭농사임을 말하고 싶다.

귀촌은 전원생활이다. 텃밭농사는 전원생활의 중요한 부분이다. 자주 했던 말이지만 텃밭농사는 일과 놀이다. 다른 놀이보다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노동이며 건강을 지키는 운동이다. 도시 생활에 젖은 사람들이 귀촌을 결단하는 것은 쉽지 않는 일이다. 더구나 돈을 벌지 않으면 안 되는 귀농은 더 어려운 결단일 것이다. 때문에 많은 분들이 당장 결단하기를 기대하지 않는다. 거듭 말하지만 우선 전원의 삶 자체가 곧 '슬로시티'요, 약이 되는 음식을 먹는 '웰빙'이요, 몸과 마음의 병을 자연 치유를 경험하는 '힐링'임을 알았으면 싶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한겨레 블로그 등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슬로시티 #웰빙 #힐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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