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먹고 계산하려니, 그냥 가라고?

히말라야 랑탕·코사인쿤도 트레킹에서 만난 따뜻한 가족

등록 2012.12.06 15:08수정 2012.12.06 1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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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설산의 모습은 멀어지고, 마겐고트를 지나며...

설산의 모습은 멀어지고, 마겐고트를 지나며... ⓒ 신한범


2012년 1월, 히말라야 3대 트레킹 코스 중 하나인 쿰부(우리가 알고 있는 에베레스트) 트레킹을 위해 카트만두에 갔습니다. 쿰부 트레킹을 하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지리(Jiri)까지 버스로 이동한 다음 트레킹을 시작하는 방법과 해발 2800m 루클라(Lukla)까지 항공기로 이동하여 시작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대부분 트레커는 일주일이 단축되는 항공기를 이용하여 트레킹을 시작합니다.

항공기를 이용한 트레킹의 문제점은 기후 변화로 인해 결항이 잦다는 것입니다. 트레킹을 준비하면서 내내 고심한 것이 결항에 대한 우려였습니다. 기우는 기우로 끝나야 하는데 가끔씩 현실로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카트만두 국내선 공항에서 기약없이 항공기를 기다렸습니다. 공항 내 전광판에 "Delay(지연)"가 몇 번 반복 되다가 마침내 "Cancel(취소)"이라는 표시로 바뀌었습니다. 루클라행 항공기가 3일째 이륙하지 못하고 있다고 합니다.


한참을 고민하다가 트레킹 코스를 쿰부에서 랑탕·코사인쿤도 지역으로 바꾸었습니다. 랑탕은 지난 2006년에 이미 다녀왔지만 코사인쿤도 지역은 경험하지 못했기에 트레킹 코스를 변경하였습니다. 세상이 자신의 의지대로만 된다면 무미건조한 일이겠지요.

네팔 마을에서 들린 한 마디 "막걸리 한잔 하고 가세요"

랑탕·코사인쿤도 트레킹을 시작한 지 10일이 지났습니다. 이제 트레킹은 막바지에 접어들었고 3일 후면 세상과 다시 접하게 됩니다. 세상에서는 히말라야가 그리웠지만 히말라야에서는 세상이 그립습니다. 세상을 향한 나의 발걸음은 빨라지기만 합니다.

해발 3000m 아래로 내려오자 마을이 보였습니다. 제법 규모가 큰 쿠툼상(Khutumsang, 2470m) 마을 아래쪽 외딴 롯지(숙소 겸 식당) 앞을 지나는데 "막걸리 한잔 하고 가세요"라는 우리말이 들립니다. 돌아보니 40대 후반 네팔리 아주머니가 웃으면서 인사를 합니다.

시화공단에서 3년간 일하다가 지난해에 귀국했다고 합니다. 오랜만에 들어 보는 우리말이 반가워 아주머니가 운영하는 롯지에서 점심을 먹기로 하였습니다. 아주머니께서 창(네팔 전통주)과 야크커리(안주)를 내왔습니다. 점심과 반주로 술을 몇 잔 들고 나니 얼굴이 불콰해집니다. 사람이 그리운지 아주머니께서 오늘 자고 가라고 하십니다. 그렇지만 오늘 일정이 있기에 자리에서 일어섰습니다.


a  지미네 외딴집

지미네 외딴집 ⓒ 신한범


계산을 하려고 하니 "그냥 가세요"라고 합니다. 다섯 번 네팔 여행에서 처음 듣는 이야기입니다. 제가 만난 대부분 사람들은 여행자들을 상대하는 장사꾼이기에 대가를 지불해야만 잠을 자고 밥도 먹을 수 있었습니다. 무엇인가를 바라는 대부분 네팔리와는 달리 "그냥 가세요"란 말 한마디에 코끝이 찡합니다. 그 집 아이들에게 밥값 만큼의 용돈을 쥐어 주고 출발했습니다.

1km쯤 내려오다 생각하니 뭔가 허전하고 아쉽습니다. 눈치 빠른 포터 인드라가 오늘 그곳에서 자도 우리 일정에 무리가 없다고 말을 합니다. 그는 무거운 짐을 지고 지나온 길을 다시 올라야 하는데도 말입니다.


예기치 않은 곳에서 예기치 않은 인연을 맺는 것이 여행이겠지요. 아주머니는 12살 지미와 20살 락바 두 아들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두 아들은 카트만두에서 공부 중인데 축제 기간이라 집에 와 있다고 합니다.

형 같은 아우, 아우 같은 형 '지미와 락바'

a  형 같은 아우 지미의 단아한 모습

형 같은 아우 지미의 단아한 모습 ⓒ 신한범


a  이벤트를 위해 가죽 자켓과 두건을 착용한 아우 같은 형 락바

이벤트를 위해 가죽 자켓과 두건을 착용한 아우 같은 형 락바 ⓒ 신한범


똑똑하게 생긴 동생 지미와 어설프게 생긴 형 락바입니다. 형 같은 아우와 아우 같은 형인 듯합니다. 생긴 모습이나 하는 행동이 서로 바뀐 것 같지만 두 친구와 유쾌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형 락바는 썰렁한 각종 이벤트로 분위기를 주도하였고 차분한 동생 지니는 유창한 영어로 형을 보좌합니다.

아주머니의 외딴 롯지에는 넓은 잔디밭과 옹달샘이 있습니다. 이곳을 지나는 사람들은 이곳에서 휴식을 취하며 갈증을 해결합니다. 학교가 끝나 집으로 돌아가는 아이들이 마당에서 술래잡기와 텀블링을 하며 시간을 보냅니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책 보따리를 어깨에 메고 맨발에 슬리퍼를 신었습니다. 아이들은 무엇이 즐거운지 한참을 시끌벅적거리다 해가 질 무렵이 되어서야 집으로 향합니다.

a  학교를 파하고, 지미네 집 앞에서 놀고 있는 마을 아이들의 모습

학교를 파하고, 지미네 집 앞에서 놀고 있는 마을 아이들의 모습 ⓒ 신한범


a  화려한 만찬. 지미 가족과 부엌에서 식사 중

화려한 만찬. 지미 가족과 부엌에서 식사 중 ⓒ 신한범


아주머니는 연신 술과 안주를 내왔습니다. 저녁에는 백숙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화덕 주위에 둘러앉아 술과 백숙을 함께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아주머니 가족과 저와 포터 인드라는 오랜만에 만나는 친지같은 모습입니다. 서로 사용하는 언어가 달라도 서로를 이해하는 데 조금의 어려움도 없습니다. 가슴으로 나누는 대화는 언어가 아닌 느낌만으로 소통이 가능하니까요.

아주머니도 사람이 그리운지 가슴 속에 담아 두었던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일찍 돌아가신 아저씨, 아프가니스탄에 돈을 벌기 위해 간 큰 아들, 영국으로 시집가서 살고 있는 여동생 그리고 자녀 교육 문제까지 밤이 깊어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네팔이든 우리나라든 모든 부모의 관심은 자식인 것 같습니다. 자식 교육과 결혼을 위해 자신은 다시 한국에 가고 싶다고 합니다. 3년간 우리나라에서 열심히 일을 해서 카트만두에 조그마한 집을 장만했다는 아주머니의 모습에서 어린 시절 고향에서 행상을 하시면서 가족을 양육하신 어머님의 모습이 겹쳐 나타납니다.

이것 저것 챙겨 주는 마음이 고마웠던 아주머니

아주머니의 "그냥 가세요"라는 한 마디 말이 저를 행복하게 했습니다. 아주머니의 따뜻한 배려와 호의는 히말라야 만큼 크고 넉넉합니다. 낯선 곳에서 낯선 사람들과 따뜻한 마음을 나눌 수 있는 것이 여행이겠지요.

기분 좋은 만남과 적당한 음주로 오랜만에 숙면을 취했습니다. 아침을 준비하며 아주머니는 하루 더 묵어가라고 말했습니다. 호의는 고맙지만 가야할 길이 남았기에 떠날 준비를 하였습니다. 아주머니는 창 한 병과 안주거리를 챙겨 배낭에 넣어 주었습니다. 마치 친정에 온 딸을 보내는 친정 어머님처럼 이것 저것 챙겨 주시는 모습에 무척 감사했습니다.

아주머니 가족과 기념 사진을 찍고 연락처를 주고 받았습니다. 인터넷 사정이 좋지 않은 네팔에서 다시 인연이 되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제가 할 수 있는 마음의 표현이 그것뿐이기에 지미에게 몇 번씩 당부했습니다. "학교에 돌아가면 잊지 말고 꼭 연락하라"고.

a  헤어지기 아쉬웠던 지미네 가족과 기념 사진

헤어지기 아쉬웠던 지미네 가족과 기념 사진 ⓒ 신한범


#랑탕 #히말라야 #쿠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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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3월 자발적 백수가 됨. 남은 인생은 길 위에서 살기로 결심하였지만 실행 여부는 지켜 보아야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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