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악한 미국, 이겨낸 쿠바

[역사와 함께하는 쿠바 자전거기행 21] 미국의 쿠바 체제 전복 기도

등록 2012.12.13 09:09수정 2012.12.13 09:09
0
원고료로 응원
1959년 카스트로는 쿠바혁명을 달성하여 미국이 20년 동안이나 지지한 쿠바의 독재자 바티스타를 제거했다. 혁명을 완수한 초기에는 카스트로와 미국과의 관계는 그런대로 괜찮았다. 그러나 카스트로는 예전의 독재자들과 달리 미국에 고분고분하지 않았다. 오히려 도전적이었다. 자신의 앞마당 격인 카리브 해에 자기들이 신뢰하지 않는 정부가 들어서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한 미국은 카스트로 암살을 시도하는 등 카스트로 정부를 전복시킬 계획을 수도 없이 세웠다.

미국은 1959년 자신의 꼭두각시나 다름없는 도미니카의 대통령 트루히요로 하여금 쿠바의 반혁명세력에게 무기를 제공하게 하고 아이티와 도미니카에 있는 쿠바 대사관을 습격하게 했다. CIA는 쿠바에 비밀요원을 침투시키며 체제 전복을 기도했고 30여 차례나 카스트로 암살을 기도했으나 모두 실패했다. 1960년 CIA는 벨기에 산 무기와 군수물자를 실고 아바나에 정박 중인 프랑스 선박 라 코브레 호를 폭파시켜 수백 명의 사상자를 냈다.


혁명 당시 쿠바의 경제적 상황은 미국의 다국적 기업과 손을 잡은 일부 자본가들이 모든 경제자원을 독점하여 빈부격차가 매우 심했다. 대부분의 쿠바 인민들은 매우 초라한 집에서 살고 있었다. 혁명정부는 모든 국민이 자기 집을 소유하도록 도시 거주민들은 부동산을 하나만 가지도록 제한하고 그 이상은 정부가 몰수하여 집 없는 사람에게 나누어 주고 월세로 집값을 상환하도록 했다. 외국재단과 대지주가 소유한 토지는 국유화하고 누구도 일정량 이상 토지를 소유하지 못하도록 했으며 모든 기업을 국유화 했다.

쿠바에 엄청난 부동산 자산을 갖고 있는 미국은 당연히 이러한 조치에 불만을 나타냈다. 1960년 5월 미국은 쿠바의 설탕 쿼터량을 대폭 축소하는 등 강력한 경제제재를 가했다. 그러자 쿠바는 대신 쿠바의 설탕을 수입하기로 한 소련과 국교를 맺었다. 소련은 쿠바를 원조했으나 미국과 달리 쿠바를 경제적으로 침략하지 않았다.

오히려 쿠바는 모든 외세로부터 진정한 독립을 달성하게 되었다. 1961년 1월 케네디가 대통령이 되면서 미국은 쿠바와 외교관계를 끊고 쿠바 여행을 금지시켰으며 쿠바 설탕 수입을 아예 중단했다. 무력 침공의 분위기가 조성된 것이다.

미국의 피그스 만 침공과 쿠바 미사일 위기

케네디는 대통령에 취임하고 3개월 후 쿠바를 침공하면서 카스트로 체제의 전복을 꾀한다. 1961년 4월 15일 쿠바 공군기로 위장한 미국 폭격기가 니카라과를 이륙하여 아바나와 산티아고 데 쿠바의 비행장을 공격한다. 이틀 뒤인 17일 CIA가 과테말라에서 훈련을 시키고 니카라과로 이동시킨 쿠바 국적의 미국 용병 1400여 명이 마탄사스 주 남부 해안에 있는 피그스 만으로 알려진 플라야 지롱(Playa Giron)에 상륙한다. 그러나 미국의 공중 폭격에서 살아남은 8대의 쿠바 공군기는 군수물자를 싣고 상륙하려던 함정을 침몰시킨다.


CIA는 눈엣가시 같은 카스트로를 제거하려고 마이애미의 쿠바 난민들을 게릴라로 위장시켜 상륙시킨 후 일정한 지역을 장악하고 새로운 정부를 선언하게 할 예정이었다. 이에 호응하여 거대한 민중 봉기가 일어나면 미국은 이 정부를 인정하고 대규모 병력을 보내려 했다. 그러나 미국이 기대한 민중봉기는 일어나지 않았고 오히려 침공군 대부분이 투항하여 3일 만에 침공은 실패로 끝났다. 쿠바 인민이 미국에 대항해 첫 승리를 한 것이다.

피그스 만 침공은 미국과 소련 사이의 미사일 위기를 낳았고 냉전은 극에 달했다.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바라던 쿠바 혁명정부는 이 침공으로 미국에 대한 모든 기대를 접고 사회주의로 선회했다. 사로잡힌 1200여 명의 포로는 6200만 달러에 해당하는 식량 및 의약품과 교환되어 미국에 굴욕을 안겼다.


11월 케네디는 CIA가 첩보와 군사 공격 및 암살 등을 통해 쿠바를 불안하게 만드는 세계 최대 비밀작전이 되는 '몽구스 작전'에 거대한 예산을 할당한다. 이 작전으로 피그스 만 침공 이후 황폐해진 쿠바 내 지하 저항 네트워크를 재건하는 활동을 한다.

1962년 1월 미국의 지배를 받는 미주기구가 쿠바를 제명하자 피델은 2월에 '남아메리카에 혁명이 불가피하다'는 이른바 제2의 아바나 선언을 발표한다. 6월 카스트로는 당시 도르티코스 대통령과 체 게바라의 묵인 아래 쿠바에 소련의 핵미사일 설치를 수락한다. 바로 이어 7월에 소련은 쿠바에 미사일 기지를 세우고 8월에 핵탄두를 설치한다. 그러자 10월 16일 미국은 쿠바로 향한 모든 선박을 강제로 수색한다고 공표한다. 이는 사실상의 선전포고와 다름없다.

10월 22일 케네디는 확실한 증거를 제시하며 쿠바 해역을 봉쇄하고 소련에 미사일 기지 철수를 요구한다. 핵전쟁도 불사하겠다는 케네디의 강력한 요구에 굴복한 소련은 24일 쿠바와 전혀 상의도 하지 않은 채 선박의 항로를 바꾸었다. 피델과 체는 이 사실에 엄청 분노했다. 28일 소련은 쿠바의 미사일 기지를 철거하는 대신 미국도 아시아의 터키(Turkey)에 설치된 미사일을 철수하고 쿠바에 침략하지 않을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미국은 쿠바를 침공하지 않는 대신 오늘날까지 경제봉쇄를 가하고 있다.

이 사건으로 미국과 소련 사이에는 핫라인이 설치됐다. 후르시초프는 케네디에게 쿠바에 대한 경제제재를 풀고 관타나모 기지를 철수하라고 요구하지만 케네디는 모두 무시했다. 다음 해 카스트로와 회담을 열기로 한 케네디는 회담 직전에 암살됐고 후루시초프도 2년 후 실각됐다. 그러나 최후 승자답게 카스트로는 아직도 건재하다.

미국은 이후에도 카스트로 암살을 계속 시도했으며 각종 군사적 도발행위를 벌여 쿠바 군대와 국민들의 인명피해는 계속됐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1급 전범자인 만주에서 생체실험을 자행한 일본의 731부대와 100부대 관계자들을 사면하고 모든 생체실험 자료를 넘겨받은 미국은 1971년에 아프리카 돼지콜레라 균을 쿠바에 살포하여 돼지 50만 마리를 폐사시켰다고 한다. 이는 미국정부의 도덕성에 대해 생각해 볼만한 일이다.

미국의 쿠바조정법과 '떠날 자는 모두 떠나라'

혁명이 성공하자 기득권을 잡고 있었던 수많은 상류층들은 대대적으로 쿠바를 탈출했다. 그 수는 1962년까지 20만 정도를 헤아렸다. 1963년 케네디는 탈출하는 쿠바인에게 특혜를 주는 쿠바조종법을 만들었다. 이 법은 쿠바 출신 불법이민자에 한해 1년 체류 후 영주권을 주는 내용을 담고 있다. 미국 영주권을 따려고 오랫동안 숨어 지내고 있는 다른 나라 출신과 비교해 보면 얼마나 이 법이 쿠바 불법이민자에 대한 특혜인지 알 수 있다. 이 법은 쿠바 체재를 비난하기 위해 쿠바 인민을 쿠바에서 불법적으로 탈출하게끔 조장하는 법이다.

사회주의를 표방한 쿠바에서 살고 싶은 마음이 없는 많은 수의 사람들이 탈출을 시도하자 카스트로는 1965년 9월에 마탄사스의 카마리오카(Camarioca) 항을 개방해 마음 놓고 떠날 수 있도록 했다. 11월까지 약 15만에 이르는 사람이 떠났고, 미국이 항공편을 제공하자 12월부터 1971년 10월까지 26만여 명이 쿠바를 떠났다.  

1983년 제작된 브라이언 드 팔마(Brian de Palma) 감독의 영화 <스카페이스(Scarface)>의 배경은 쿠바인의 쿠바 탈출이다. 이 영화는 쿠바에서 탈출한 전과자가 마이애미의 마약 범죄단에 들어가 보스를 살해하고 마약계의 대부가 된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결국은 자신도 살해된다. 알 파치노(Al Pacino)가 주연한 이 영화의 처음 도입부에는 1980년 쿠바 서북부에 있는 마리엘 항구에서 벌어진 쿠바 사람들의 쿠바 탈출을 배경으로 보여주고 있다. 처음에 다음과 같은 자막이 흐른다.

1980년 5월, 카스트로는 마리엘 항을 개방했다. 표면상으로는 미국에 거주하는 쿠바인들의 가족상봉 허가였다. 72시간 내에 3000척의 미국 선박이 쿠바로 향했다. 카스트로는 선주들에게 그들의 가족뿐만 아니라 쿠바의 인간쓰레기들도 함께 싣고 가기를 강요했다. 플로리다에 상륙한 12만 5천 명의 난민 중 2천5백 명은 전과자였다.

이어서 다큐멘터리 화면이 흐른다. 카스트로는 말한다.

"그들은 혁명사상에 해가 되는 자들이다. 우리는 그들을 원치 않고 필요하지도 않다."

1980년 4월 쿠바 정부가 아바나에 있는 페루 대사관의 경비 병력을 철수시키자 만 명이 넘는 난민들이 대사관으로 밀려들었다. 그러자 카스트로는 갑자기 '떠날 자는 모두 떠나라'고 선언하면서 쿠바를 탈출하고 싶은 쿠바 인민들을 또 떠나게 했다. 그 시기가 1980년 4월 중순부터 10월 말까지였다. 이때 떠난 쿠바인의 수는 전체 인구의 1%를 상회하는 12만 5천 명 정도였다.

혁명이 성공한 후 미국으로 망명한 쿠바의 기득권 세력들의 수는 1959년에서 1965년 사이에 50만 명에 달했다. 1980년에 떠난 12만 5천명 등 카스트로 정권 50년 동안 총 100만여 명의 쿠바인이 해외로 망명했다. 여기에는 전과자를 포함한 하층민도 많았다. 그러나 미국은 쿠바의 고급 인력에게는 좋은 조건으로 일자리를 제공했으나 하층민은 달가워하지 않았다. 카스트로는 미국이 계속 망명을 부추길 경우 무제한으로 쿠바인을 미국으로 보내겠다고 하자 클린턴은 어쩔 수 없이 이민협정을 체결하여 불법이민을 금지시켰다.

미국에게는 많은 쿠바 사람들이 쿠바를 탈출한다는 것 자체가 정치적으로 쿠바의 사회주의 체제를 폄하할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였다. 하지만 카스트로는 자신 있게 떠날 자는 붙잡지 않는다. 떠나라고 한 것이다. 미국의 쿠바조정법은 많은 쿠바 사람들로 하여금 목숨 걸고 플로리다 해협을 건너게 했다. 그 결과 엘리안 사건이 발생했다.

1999년 11월 쿠바를 탈출하기 위해 고무보트를 타고 플로리다 해협을 건너던 중 어머니는 바다에 빠져 죽고 여섯 살짜리 아들 엘리안 곤잘레스(Elian Gonzalez)는 고무보트에 의지해 있다가 어부에 의해 구조돼 마이애미에 있던 친척에게 넘겨졌다. 쿠바에 살고 있는 아버지는 엘리안을 돌려보내달라고 미국에 요청했으나 거부당했다. 그러나 미국 법원은 엘리안을 아버지에게 돌아가도록 결정했다. 그러자 미연방 특공대가 엘리안을 보호하고 있는 친척으로부터 강제로 뺏어다 아버지에게 데려다 주었다.

이 사건은 2000년 대통령 선거에서 입장을 번복하여 엘리안 송환을 반대한 고어가 패배하고 부시가 승리하는 데 일조했다. 이와 같은 일이 벌어지게 된 계기는 쿠바조정법에 있다. 이 법은 많은 쿠바인으로 하여금 카리브 해를 건너오도록 조장했고 그 결과 많은 쿠바 사람이 바다에 수장됐다.

쿠바 사람들이 불법으로 탈출하는 이유는 이들이 해외여행이 자유롭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혁개방 조치를 추진해 온 쿠바 정부는 2013년 1월부터 자국민의 해외여행 규제를 폐지하기로 했다고 한다. 해외 체류기간도 2년으로 연장한다니 이제 자신감이 생겼나? 같은 공산주의 국가인 북한엔 아직도 여행의 자유가 없으니 왜 이렇게 차이가 날까? 한 나라는 오직 죽은 자만 숭배할 수 있고, 다른 한 나라는 살아있는 자를 숭배하여 그 결과 공화국이 아닌 왕조를 이루어서라고 해석하면 무리일까?

쿠바 민항기 폭파와 미국의 이중성

1976년 베네수엘라의 카라카스에서 쿠바로 출발하는 민항기가 폭발하여 73명의 쿠바인이 사망했다. 범인은 루이스 포사다 카릴레스(Luis Posada Carriles)로 베네수엘라 정부에 체포되었으나 1985년 탈옥했다. 그는 2000년 파나마에서 열린 정상회담에서 카스트로 암살을 기도한 테러리스트였다.

그는 미국으로 망명했다. 쿠바의 범인 신병 요구에도 미국은 그를 인도하지 않았다. 만일 반대로 미국의 민항기를 폭파한 범인이 쿠바에 망명했다면 미국은 어떠한 태도를 보였을까? 9·11 테러 후 아프카니스탄 사례를 보면 알 것이다. 최고의 민주주의 국가임을 표방하는 미국의 이중성을 엿볼 수 있는 사건이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면서 다음 해 소련이 붕괴한다. 쿠바는 수입과 수출의 길이 모두 막히고 소련과 사회주의 나라에 의존하던 경제는 끝없이 추락했다. 이 기회를 노린 미국은 쿠바에 대해 더욱 경제봉쇄를 강화했다. 이유는 단 하나, 카스트로의 실각이다.

1992년에는 쿠바민주화법을 제정하여 미국의 기업은 물론이고 미국으로부터 원조를 받고자 하는 나라의 기업까지 쿠바와 거래를 금지하도록 했다. 1993년 3월 허리케인이 급습하여 엄청난 피해가 발생해 국제사회에 원조를 긴급히 요청했으나 미국은 인도적인 차원의 원조도 못하게 했다. 1996년에는 쿠바자유민주연대법을 제정하여 부시가 말한 악의 축에도 인도적 차원으로 제공되던 식료품과 의약품을 쿠바에 보내는 것을 전면 금지시켰다.

경제 혼란의 와중에도 1992년의 아바나 폭탄 테러와 1997년 바라데로의 호텔에서 폭탄 테러 등 CIA와 미국에 망명한 반카스트로 조직에 의한 쿠바 테러 행위는 셀 수도 없이 많다. 그래서 쿠바 곳곳에는 '테러를 반대한다'는 슬로건이 붙어 있다.

미국은 자신의 이익에 조금만 반해도 전 세계에 위장된 테러를 수 없이 행하거나 군사쿠데타를 도모하여 민주적인 정부를 전복시키고 친미독재정부를 세웠다. 체 게바라가 그 사실을 직접 목격했기에 반미주의로 나선 것이다. 미국의 끊임없는 군사행위 결과 9·11 테러가 부메랑으로 돌아온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지금도 전 세계를 대상으로 명분 없는 군사행위를 계속하고 있다.

미국은 자국의 이익을 위해, 좀 더 정확히는 자국의 자본가들을 위해 1991년 학생 시위대를 학살한 중국에는 계속 경제 원조를 제공한다. 그러나 유혈적인 억압 기록이 없는 쿠바는 지금도 계속를 봉쇄하는 이중 정책을 펴고 있다. 미국은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중남미의 좌익정권을 모두 궤멸시켰지만 유독 쿠바는 존재할 수 있었다. 그 이유는 쿠바 인민의 단결 때문이라 생각한다.

지금도 제재를 가하는 추악한 강대국 미국의 모든 침략을 약소국 쿠바는 잘 이겨내고 있다.
#피그스 만 침공 #쿠바 미사일 위기 #쿠바조정법 #엘리안 사건 #쿠바 민항기 폭파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수학을 통해 사회를 분석한 <오지랖 넓은 수학의 여행>, 역사가 담긴 자전거기행문 <미안해요! 베트남>, <체게바를 따라 무작정 쿠바횡단>, <장준하 구국장정6천리 따라 자전거기행> 출간. 전 대전환경운동연합 의장, 전 민족문제연구소 운영위원장, 현 배재대 명예교수, 피리와 클라리넷 연주자로 활동


AD

AD

AD

인기기사

  1. 1 어린이집 보냈을 뿐인데... 이런 일 할 줄은 몰랐습니다 어린이집 보냈을 뿐인데... 이런 일 할 줄은 몰랐습니다
  2. 2 "한 번 씻자고 몇 시간을..." 목욕탕이 사라지고 있다 "한 번 씻자고 몇 시간을..." 목욕탕이 사라지고 있다
  3. 3 "2천만원 깎아줘도..." 아우디의 눈물, 파산위기로 내몰리는 딜러사와 떠나는 직원들 "2천만원 깎아줘도..." 아우디의 눈물, 파산위기로 내몰리는 딜러사와 떠나는 직원들
  4. 4 한강 작가를 두고 일어나는 얼굴 화끈거리는 소동 한강 작가를 두고 일어나는 얼굴 화끈거리는 소동
  5. 5 49명의 남성에게 아내 성폭행 사주한 남편 49명의 남성에게 아내 성폭행 사주한 남편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