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말고사보다 대선이 더 중요해요!"

[학생부장 일기 35] 교사를 무릎꿇린 아이, 투표권을 달라!

등록 2012.12.15 09:42수정 2012.12.15 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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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이번 대선이 현행 대학입시와 교육과정의 변화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게 될까요?"

누가 당선될 것 같으냐는 질문에 "그걸 알면 돗자리 깔고 앉지, 왜 여기 있겠느냐"며 대충 눙치고 넘어갔는데, 후보들의 공약을 나름 꼼꼼하게 챙겨본 모양이다. 아닌 게 아니라, 요즘 스포츠 중계마냥 이어지는 여론조사 추이가 초박빙 양상으로 치닫자 아침에 신문을 펼쳐보는 아이들이 제법 늘었다. 시나브로 관심을 끌다보니 숫제 요즘엔 대선 관련 얘기로 수업을 시작하곤 한다.

그러나 여전히 대부분의 아이들은 그런 선거 얘기를 불편해한다. 수업 중 누군가 그런 질문을 할라치면 야유를 보내기 일쑤고, 심지어는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허튼 소리로 학습 분위기를 해친다'고, '시험 앞두고 공부에 방해된다'고 나무란다. 공부 잘 하는 얘가 질문하면 잘난 체 한다고, 공부 못하는 얘라면 수업하기 싫어서 딴청부리는 거라며 손가락질해댄다.

아이들 등쌀에 수업시간을 피해 질문한 아이를 교무실로 따로 불러다 얘기를 나눴는데, 이번 대선에 대해 큰 관심을 보이는 건 물론, 각 후보들이 내놓은 공약의 실현 가능성을 나름 설득력 있게 분석해냈다. 공부를 썩 잘하거나 눈에 띄는 친구는 아니지만, SNS를 통해 다른 지역 친구들과 의견을 교환하고, 자신의 정치적인 입장을 남들 앞에서 당당히 드러낼 만큼 성숙한 아이였다.

점심시간이었기 망정이지 10분짜리 쉬는 시간이었더라면 그 아이의 '진면목'을 못 볼 뻔했다. 교무실에서 사제 간 즉석 대담이 마련됐다. 이번 대선에 관한 가십거리로 대화가 시작됐지만, 나중에는 젊은 세대의 정치적 무관심과 보수성의 원인과 책임을 두고 서로 언성이 높아지기도 했다. 그 누구보다 진보적이라고 여겨왔는데, '물 만난' 그 앞에서는 기성세대의 인식을 대변하느라 쩔쩔매는 '꼰대'일 수밖에 없었다.

우선 '잘난 체 한다'며 그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친구들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그들을 나무라거나 못마땅해 여기기는커녕 기성세대의 '찌질한' 사고방식에 물든 것일 뿐이라며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며 되레 웃어보였다. 또래 친구들 사이에서 '튀는' 건 물론 불편하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그들의 '기성세대스러움'을 깨고 싶다고 말했다.

그의 말과 생각은 과격하고 거침없었지만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요즘 기성세대들, 세월 따라 어른은 되었으되, 나이를 '헛먹은' 거라고 잘라 말했다. 부모님이든 선생님이든 지금껏 기성세대로부터 배울 만한 게 거의 없었다는 거다. 그저 공부해라, 성공해라, 나서지 마라, 눈치껏 살아라, 심지어 사람 믿지 마라 등 차마 입에 담기 부끄러운 얘기들을 처세술이라며 아무런 거리낌 없이 들려주는 사람들이 과연 어른이냐고 반문하기까지 했다.


그러면서 며칠 전 부모님과 크게 다툰 일도 고백하듯 소개했다. "기말고사가 코앞인데 대선 후보 토론회를 본다고? 그거는 봐서 뭐하게. 투표하게?" "학생은 대선에 관심 가지면 안 되나요? 어쩌면 그게 더 중요한 공부 아닌가요?" "투표권도 없는 고등학생에게 낼 모레 있을 기말고사가 중요하니, 대선이 중요하니?" "그럼 어른들이 학생들에게도 투표권을 주면 되잖아요." "이 녀석이 말대꾸는!" "....."

이 일이 있은 후 며칠 동안 부모님과 얼굴도 마주치지 않을 만큼 힘들었다는데, 결국 두루뭉수리 화해는 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자신이 잘못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단다. 지금은 속상하지만 언젠가는 '학생들은 오로지 공부만 해야 한다고 믿는' 부모님이 '학생에게도 기말고사보다 대선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깊이 깨달을 때가 오리라 믿는다고 했다.

그의 학교에 대한 생각도 별반 다르지 않다. 학생들의 대선 얘기를 그저 자기들끼리의 뒷담화 정도로만 여길 뿐, 귀를 기울여주는 선생님들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그저 '학생의 본분은 정치가 아닌 공부'라면서 선거를 '졸업하고 좋은 대학 간 이후'의 일로 여길 뿐이라며 안타까워했다. 학생들의 대표를 뽑는 학생회장 선거를 치기어린 아이들의 장난처럼 여기는 것도 선생님들의 그런 인식 때문이라는 거다.

한번은 요즘 학생들의 대선에 대한 관심을 늘 '겉멋이 든 것'이라 말하는 선생님에게 수업시간 불쑥 이런 질문을 했단다. "왜 우리나라 기성세대들은 선거 연령 낮추는 것을 꺼리는 걸까요?" 답변인즉슨 이랬단다. "너희 같은 학생들은 아직 정치에 대해 잘 모를 뿐더러 정신적으로 미성숙해서 판단력과 책임성이 부족하다고 보기 때문이지."

"정치에 대해 학교에선 제대로 가르쳐주지도 않고, 정작 어렵사리 질문을 꺼내면 쓸데없는 얘기 하지 말라고, 또 나중에 대학에 가서 관심을 가지라고 말씀하셨잖아요. 정치적으로 뭔가를 판단하고, 선택해본 경험이 있어야 그것에 대한 책임성도 생각해보지 않겠어요? 다짜고짜 모른다, 안 된다, 부족하다고만 하시니, 그럼 그런 것들은 대학만 가면 하늘에서 쿵 하고 떨어지는 건가요?"

그의 거침없는 공세에 그 선생님이 학생들 앞에서 난감해졌음은 물론이다. 부모님과 선생님을 머쓱하게 만든 그의 남다른 '반골 기질'이 어디서 비롯됐는지 궁금해졌다. '튀는' 학생이라는 건 스스로 인정했지만, '반골'이라는 말은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저 상식적으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할 뿐이라며 손사래를 쳤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과목이, 예상대로, 역사였다. 어릴 적부터 역사 관련 서적으로 즐겨 읽었다는데, 지금도 국영수 공부를 하다 머리가 아프고 지루할 때면 휴식 삼아 역사책을 꺼내 읽는다고 한다. 그런데, 책을 읽을 때마다 궁금한 것이 어린 나이에도 대단한 업적을 이룬 위인들의 이야기였다고 한다. "지금의 나와 나이는 별 차이가 없는데, 그들은 어떻게 저런 위대한 생각을 하고 실천했을까?"

그는 유관순 열사를 예로 들었다. 3·1 운동 당시 열사의 나이는 고작 열여섯, 지금 그의 나이보다도 더 어렸다. 아무리 처한 사회적 환경이 지금과는 달랐다고 하나, 열사의 숭고한 삶에 비해 자신의 모습이 너무나 초라하게 느껴졌다고 한다. "유관순 열사가 목숨 걸고 조국의 독립을 외칠 때, 나는 두 손 모아 명문대 합격을 기도했다"며 우스개를 건넸다. 부모님도 선생님도 자신조차도 그 바람을 공유했기에 아무런 부끄러움이 없었다고 했다.

그런가 하면 4·19 혁명과 5·18 광주민주화운동, 6·10 민주항쟁 등을 교과서를 통해 배우면서는 지금 기성세대의 '찌질함'을 느낄 수 있었다고 했다. 우리나라 현대사의 굵직한 변곡점이 된 일련의 사건들마다 그 중심에는 대학생과 고등학생이 있었다고 배웠는데, 그때의 그들이 '대선보다 기말고사가 더 중요하다'고 말하는 지금의 기성세대 아니냐는 반문이다.

거칠게 말해서, 파란만장한 역사를 이끌어온 주체라는 자긍심은 모두 어디에다 내다버리고, 자녀들에게 들려주는 삶의 지혜란 게 고작 '닳아빠진 처세술'이나 설교하고 있느냐는 거다. 4·19와 5·18 국립묘지를 찾아 동창이자 선후배라며 빗돌을 쓰다듬는 기성세대는 많아도, 그들처럼 살라고 말하는 이들은 거의 없다는 현실에 대한 자녀 세대로서의 근본적인 회의이자 뼈아픈 조롱이다.

요즘의 10대 청소년들은 오로지 '공부하는 기계'다. 공부하는 목적은 오로지 명문대 합격, 그 외에는 모두 관심을 갖는 것조차 사치이다. 기성세대이자 교사로서, '백년지대계' 교육을 그렇게 만들어놓고 젊은 세대의 정치적 무관심이 심각하다고 투표율이 낮다고 꾸짖는 건, 고백하건대, 제 얼굴에 침 뱉는 격이다.

과거 70년대에는 긴급조치라는 유신 정권의 폭압으로, 80년대에는 이른바 '3S(스크린, 스포츠, 섹스)'라는 우민화 정책을 통해 젊은 세대들의 정치의식 성장을 가로막고 짓눌렀다. 그런데, 민주화 시대라는 요즘엔 외려 학교가 미래 세대의 정치의식 성장을 방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셈이다.

그에게 장난삼아 물었다. 지금 만약 투표권이 주어진다면 누구를 뽑을 것인지를. 한참을 생각하더니 '모범답안'을 내놓았다. 비록 어린 나이지만, 이 시대가 진정 요구하는 유권자'상'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가 말미에 사족처럼 덧붙인 푸념이 '오늘 나눈 대화가 대체 무슨 소용이냐'는 말처럼 들렸다.

"후보라면 공약으로 말하는 법, 그것으로 판단하겠죠. 고등학생이니 누가 공교육 정상화에 적임인지를 눈여겨보겠지만, 개인적으로는 그보다 선거 연령을 대폭 낮추겠다는 공약을 내건 후보를 우선 찍겠어요. 투표권이 주어지면 학생 유권자들을 위한 공약도 마련될 테고, 그런 후라야 실효적인 공교육 정상화 방안이 나올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저희들이 어른들 생각하는 것만큼 미숙하거나 무책임하지 않거든요. 지난해부터 학생들에게 1년에 한 번씩 선생님을 점수로 평가하는 권한을 준 것은 적어도 학생들의 판단력을 신뢰하기 때문 아닐까요? 기실 투표 참여는 가장 좋은 교육이라고 봐요. 일방적인 통제나 훈육이 아니라 스스로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성찰하고 판단할 수 있도록 이끄는 게 교육의 참뜻 아닌가요?

하긴, 저희 학생들의 일상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교육감조차도 제 손으로 못 뽑는데 하물며 대통령은 무슨..."
#학생부장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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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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