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만 들어준다면, 박근혜 비난하지 않겠다

[주장] '100% 대한민국' 공약, 철탑농성 해결로 보여주길

등록 2012.12.26 20:19수정 2012.12.26 2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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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 투표 하루 전인 지난 18일 늦은 오후,  <오마이뉴스> 기자로부터 한통의 전화가 왔습니다. 내일 개표가 끝나고 당선자가 발표되면 당선된 대통령 후보에게 인권운동가로서 바라는 요구를 담은 기사를 써서 보내달라는 원고 청탁 전화였습니다.

저는 "문재인 후보가 당선된다면 기사를 보내겠으나 만약 박근혜 후보가 당선된다면 못 쓸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전화한 기자는 "안 된다. 그래도 써서 보내야 한다"라고 주문했고 저는 "박근혜 후보가 당선된다면 내 입장에서 쓸 말이 뭐가 있겠냐. 그냥 '깜깜' 두 글자 외엔 쓸 말도 없다"라고 답했습니다. 제 말을 들은 기자가 웃더군요.

그리고 다음날, 저는 투표가 한창 진행중인 오후 3시부터 약 2시간에 걸쳐 문재인 후보의 당선을 가상한 약 24매 분량의 원고를 미리 작성했습니다. 저는 문재인 후보의 당선을 의심하지 않았고 또한 앞서 제게 원고를 청탁했던 기자가 저의 말에도 불구하고 원고 청탁을 하는 것으로 짐작컨대, '오마이뉴스' 역시 저와 다르지 않은 어떤 정보를 가지고 있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날 오후 6시. 제 예상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오마이뉴스는 '대선 예측조사' 결과 발표를 통해 문재인 50.4% vs. 박근혜 48.0%로 야권 단일후보인 문재인 후보가 18대 대통령으로 당선되는 것으로 예측했습니다. 무려 8600명을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했고 그 결과 문재인 후보가 승리할 것으로 예측한 것입니다. 하지만 아시겠지만 결말은 비참했습니다. 예측은 틀렸고, 오마이뉴스는 결국 다음날 사과 보도를 내야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제가 썼던 문재인 후보의 당선을 가상한 '문재인 당선인에게 바란다'는 제하의 기사 역시 발표되지 못한 채 제 컴퓨터 파일함에 사장되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끝내 기사화되지 못한 그 원고를 다시 읽을 때마다 어쩔 수 없는 비감한 심정에 한숨이 쏟아져 나옵니다. "왜 이렇게 찌질하냐"고 누군가는 비난하기도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도 제가 이렇게 찌질한 줄 몰랐습니다. 그러나 저에게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문재인 후보가 당선된다고 세상이 달라지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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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민주통합당 대선후보가 20일 오후 서울 영등포 당사에서 가진 해단식에서 울먹이는 캠프 관계자들을 다독이며 위로하고 있다. ⓒ 남소연


페북 등에 이런 제 심정을 적어 놓으니 저와 생각이 다른 분들이 말합니다. "문재인 후보가 당선된다고 정말 세상이 달라질 것 같으냐"는 말입니다. 그 분들의 지적도 사실 틀린 말은 아니라는 것, 저도 알고 있습니다. 저 역시 문재인 후보가 그동안 우리 사회에서 제기되는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완벽한 정치인'이라고 생각해서 그를 적극적으로 지지한 것은 솔직히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다만, 적어도 한가지 기대는 있었습니다. 지난 5년간 현 정부하에서 벌어졌던 여러 비상식적인 일들은 중단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도심 한복판에서 벌어진 무모한 강제진압 과정에서 철거민과 경찰 6명이 죽는 참상을 일으키고도 반성하지 않는 권력을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았습니다. 또한 국민 다수의 뜻과 상관없이 밀어붙인 '4대강사업'과 이로 인해 물은 많으나 가뭄에 시달리는가 하면 막힌 물 흐름으로 식수원이 녹조로 가득찬 이른바 '녹조 라떼'라는 신조어가 회자되는 그런 불통의 시대는 끝나기를 희망했습니다.

흔히 '비빌 언덕이 필요하다'는 말이 있지요. 그렇습니다. 문재인 후보에 대한 기대가 그것이었습니다. 이같은 문제를 상식적인 방향에서 해결해 달라고 요구할 수 있는 '비빌 언덕'이 '야권단일후보 문재인의 당선'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매달렸던 것입니다. '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 문제가 그랬고 '쌍용자동차 해고자' 문제가 그랬습니다. 삶의 생명줄을 쥐고 있는 이 땅의 '비정규직 문제' 해법에 대한 것도 그랬고 37년만에 나타난 '재야인사 장준하 선생의 사인 의혹 규명' 역시 이번 기회에 반드시 해결하고 싶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군 당국의 자살 발표에 동의할 수 없다며 20년 이상 아들의 장례를 미루고 있는 '군 의문사 유족의 한'도 해결하고 싶었습니다. 대선기간 내내 저는 이 문제의 해결을 SNS 상에서 언급했고 지난 12월 10일, 세계 인권선언기념일에 문재인 후보가 '군사 옴브즈만 제도'를 도입하겠다는 공약을 제시했고, 거기에 큰 기대를 가졌습니다. 자신이 당선되면 반드시 군 의문사 유족의 한을 풀어주겠다는 문재인 후보의 공약을 저는 믿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모든 기대와 바람이 사라졌습니다. 이것이 위대했지만 결국 선거에서 패배한 48%의 지지 앞에서 제가 절망하는 이유였습니다. 다 얻었다고 여겼다가 한순간에 터져버린 상실과 허탈감은 그래서 잠들 수 없는 이른바 '멘붕의 시간'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희망의 끈 놓아버린 죽음, 너무 미안하다

제가 천주교 인권위원회에서 활동가로 일할 당시 어떤 신부님이 이런 말씀을 해 주신 적이 있었습니다. 새로 신자가 된 사람에게 기도를 많이 하라고 하면 처음엔 '자신을 위한 기도'를 한다고 했습니다. 나를 위해 무엇을 해주고, 우리 가족을 위해 무엇을 해주고, 우리 아들 공부 잘하게 해주고, 내 남편 승진 시켜달라고 하는 등등의 기도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점점 기도의 내용이 달라진다고 합니다. 나보다 우리를 위해, 그리고 타인과 이웃을 위한 기도가 더 많아진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올바른 종교인이, 사회의 일원으로서 가지는 올바른 자세라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저 역시 개인의 이익보다 타인과 사회를 위해 무엇이 더 옳고 정의로운가에 대한 관심으로 삶이 바뀌었습니다. 저에게 있어 투표는 그러한 차원에서 '또 다른 기도'였습니다.

이번에 투표한 이들 역시 모두 그러했을 것입니다. 제각각 다른 목적과 생각으로 출발 지점은 달랐겠지만 '48%에 속한 사람'이든 '51%에 속한 사람'이든 나름의 충심으로 이 나라를 아끼고 염려하는 마음에 투표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어떤 이들은 이 나라가 '종북 좌파에게 넘어가서는 안 된다'는 자기 확신으로 투표했을 것이고 또 어떤 이들은 '더 이상 불통과 독선의 지도자가 대통령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으로 투표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선거는 끝났습니다. 한쪽은 환호하고 다른 한쪽은 저처럼 아파하고 있습니다. 그러는 사이 4명의 노동자가 목숨을 버렸습니다. 참담하다는 말로도 부족한 이들 노동자의 죽음에 많은 이들이 미안해 하고 안타까워합니다. 함께 살자며 호소했지만 연이어 들려오는 비보에 저를 비롯한 많은 이들이 답해 줄 희망의 말을 찾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부당 해고'와 '비정규직 차별', 그리고 이를 항의하기 위한  파업으로 인한 '사측의 재산 가압류'와 생활고 문제로 끝내 희망의 끈을 놓아버린 이 죽음 앞에 뭐라고 말을 해야 할까요.

25일, 노회찬 의원은 자신의 트위터를 통해 "며칠전 자살한 울산 전 현대중공업 비정규 노동자 이운남씨의 영결식에 가기 위해 울산행 심야 고속버스를 타자 마자 또 다른 죽음의 소식을 듣습니다. 멈춰야 합니다. 힘들더라도 살아서 싸워야합니다. 제발!"이라고 호소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이것만이 아닙니다. 지금 눈 앞에 보이는 또 다른 절망에 대해서도 우리는 아무런 말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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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쌍용차 사태 때 직장을 잃은 한상균, 문기주, 복기성 세 사람은 11월 20일부터 경기도 평택시 칠괴동 쌍용차 공장 옆 철탑에서 농성 중이다. 복기성씨가 물건을 올려주는 동료들을 바라보고 있다. ⓒ 박소희


지금 이 시간에도 철탑위에서 농성하는 노동자가 있습니다. 평택의 쌍용자동차지부 한상균 전 지부장과 문기주 정비 지회장, 그리고 복기성 비정규직 수석부회장이 그들입니다. 또한 현대자동차 비정규지회 천의봉씨와 최병승씨는 울산 현대자동차 공장 앞 송전탑에 올라가 26일 현재 71일 넘게 장기 농성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박근혜 당선인에게 부탁드립니다

바깥 창문과 맞닿는 책상에 앉아 밤을 새워 글을 쓰고 있습니다. 방안인데도 창문에서 뿜어내는 한기에 손끝이 시려 옵니다. 그러다가 다시 그들이 생각났습니다. 왜 날씨는 이리 더 혹독하게 추운 것이지 원망스럽기까지 합니다. 이미 패배해 버린 18대 대통령 선거 결과를 두고 왜 이렇게 '찌질하게 구냐'고 어떤 분들은 타박합니다.

한 언론 보도에 의하면 박근혜 후보를 지지한 유권자에게 물으니 TV 토론에서 통합진보당 이정희 후보가 보여준 발언을 보고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답변이 있었다고 합니다. '시어머니에게 대드는 며느리의 모습'을 봤다며 이러한 괘씸한 야권에 대해 응징하고 싶었다는 것입니다. "세상 물정을 모르는 젊은 것들이 적극적으로 투표에 참여하는 것을 보고 가만 있어서는 안 되겠다"고 여겨 15년만에 투표에 참여했다는 어느 50대 주부의 말도 언론은 소개했습니다.

하지만 이번 투표는 저에게 있어 '목숨'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살기 위해' 죽기를 각오하고 철탑으로 올라간 누군가의 아들이, 누군가의 남편이, 누군가의 아버지가 그 가족에게 살아서 온전하게 돌아가기를 원했습니다. 살기 위해 몸부림치다가 해고된 이들이 다시 살기 위해 철탑 위에 올라간 이들 농성자가 다시 땅으로 내려오게 하려면 명분이 필요한데 그 방법이 저는 정권교체라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대선 결과는 허망했고 이제 그들이 지금 다시 땅으로 내려올 명분이 없어졌습니다. 오히려 더 참담한 심정으로 그곳에 남겨지게 된 것입니다.

'추위보다 더 무서운 것은 무관심' 이라는 그들의 말은, 그래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제 마음을 더 찢어 놓습니다. 얼마나 더 가야 할까요. 어느만큼 가야 이들이 땅으로 내려올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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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이 20일 오전 서울 여의도 새누리당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최초의 여성 대통령으로서 새로운 변화와 개혁을 국민 여러분과 함께 반드시 이뤄내겠습니다"며 인사말을 하고 있다. ⓒ 유성호


'100% 대한민국'을 만들겠다는 공약을 내건 박근혜 당선자에게 과연 철탑의 노동자들은 포함되어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당신을 지지하지 않았던 이들을 위해 당신이 보여줄 수 있는 진심이 궁금합니다.  그 첫걸음이 바로 이들 철탑의 농성자가 되기를 희망하는 건 헛된 욕심인가요?

저는 박근혜 당선인을 지지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지지하지 않고 있지만 만약 당신이 이들을 땅으로 내려올 수 있도록 해 준다면 적어도 더 이상 당신을 비난하지는 않겠습니다.

자신의 생각과 다른 48%의 국민에 대해 '반대한민국 세력'이라고 비방하고 '정치적 창녀'라는 혐오적 발언조차 서슴치 않는 이를 중용하는 것으로 앞으로 대한민국을 어찌 끌어갈 것인가를 보여준 당신에게 이런 기대가 가당키나 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지금 이 문제를 해결할 유일한 '비빌 언덕'은 당신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5년 후 대통령 임기를 마친 당신이 누군가로부터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 무엇이었냐"는 물음에 "임기를 시작하기도 전에 철탑에서 농성중인 분들의 문제를 해결하여 안전하게 그들을 가족들 곁으로 돌려 보낸 것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라는 말을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제 2012년도 며칠 남지 않았습니다. 저는 소망합니다. 새해를 맞이하기 전, 철탑의 농성자들이 다시 우리와 더불어 살고 그래서 대한민국의 51%와 또 다른 48%가 새로운 희망속에서 다시 더불어 살아가는 '민주주의 대한민국'이 되기를 원합니다. 이를 위해 여야 정치권을 비롯하여 모두가 힘을 모아주기를 간곡하게 호소합니다. 철탑의 노동자 여러분, 끝까지 포기하지 말고, 죽지 말고 함께 살아갑시다. 우리가 함께 하겠습니다.
#48% #문재인 #박근혜 #철탑 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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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 운동가, 재야인사 장준하 선생 의문사 및 친일 반민족행위자의 재산을 조사하는 조사관 역임, 98년 판문점 김훈 중위 의문사 등 군 사망자의 명예회복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저서- 중정이 기록한 장준하(오마이북), 장준하, 묻지 못한 진실(돌베개), 다시 사람이다(책담) 외 다수. 오마이뉴스 '올해의 뉴스게릴라' 등 다수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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