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달 문자메시지 3000건, 소녀는 왜 그랬을까

[서평] 지그문트 바우만의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2012, 동녘)

등록 2013.01.18 11:34수정 2013.01.18 1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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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스북에 있는 그 수많은 '친구'(들) 중에 외로움에 아파하는 내 마음을 진심으로 어루만져 줄 수 있는 이는 과연 몇 명이나 있을까? 트위터의 '팔로잉'과 '팔로워'에 찍혀 있는 아라비아 숫자가 내 삶의 깊은 지혜를 깨닫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까? 오늘날 우리는 왜 그토록 고독(외로움)의 아픔을 '혐오'하게 된 것일까?

2010년, 한참 트위터에 빠져든 적이 있었다. 어떤 생각이 날 때마다 (왜 올리는지에 대한 특별한 자각도 없이 마치 새가 재잘거리는tweeting 것처럼) 글을 올리고, 여기저기 유명한 이들이 올린 '멘션'을 리트윗 하는 과정이 낯설면서도 흥미로웠다. 하루하루 쌓여가는 '팔로잉'과 '팔로워'의 숫자를 보는 재미도 제법 쏠쏠했다. 나는 거대한 네크워크 세상의 한복판에서 조그마한 주인공이 되어 첨단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그 이상은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 해 가을, 유럽 교육 연수를 준비하면서 나름대로 중요하고도 급한 정보를 구하는 요청을 트위터에 올린 적이 있다. 모 시사주간지 기자 말마따나 트위터는 실생활에 유용한 정보를 쉽게 얻을 수 있는 곳이라 하지 않았는가. 하지만 내게는 그 행운(?)이 찾아오지 않았다. '팔로잉'과 '팔로워'의 적은 숫자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SNS를 하지 않으면 사이버 오지에서 사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말을 들으면서 마냥 태평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인맥이 중요한 이 대한민국에서 SNS처럼 쉽게 인맥을 쌓을 수 있는 곳이 또 어디 있겠느냐는 말을 들으며 트위터나 페이스북에 솔깃해하지 않을 사람이 또 어디 있겠는가? 2010년에 내가 빠져든 그 거대한 트위터의 세계는 아마 이런 배경 속에서 나에게 다가왔었던 것 같다.

하지만 이제 나는 트위터를 향한 발길을 끊은 지 오래다. 몇 년 전 뭣 모르고 가입한 페이스북에는 아예 접근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졸업한 몇몇 제자들의 성화(?)에 힘입어 얼마 전부터 일주일에 한 번 정도씩 접속해 녀석들의 근황을 확인한다. 대선 전 투표 독려와 그 이후 며칠 간의 멘붕 모드 때문에 조금 자주 들락거리기는 했지만 말이다.

트위터나 페이스북이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맺기를 좀더 용이하게 해주는 측면은 분명히 있다. 140자 이내의 짦은 글이 주는 속도감 있는 문체로 나를 수많은 다른 이에게 순식간에 알릴 수 있으니 얼마나 효율적인가. 트위터 신봉자라면, 최근 몇 년 간 놀라운 속도로 급증해 온 트위터 가입자 수가 그 효율성의 정당성을 방증한다고 말하지 않을까.

급변하는 이 세계의 현실을 실시간으로 알게 되는 경우도 없지 않을 것이다. 운이 좋다면 역사의 현장을 실시간으로 목격하고 그 최초의 기록자가 될 수도 있다. 트위터를 통해 사회적으로 강력한 이슈가 만들어지고, 사건과 사고의 현장을 전달하는 전통적인 미디어를 트위터라는 1인 미디어가 대체하고 있다는 주장 등도 이와 관련될 것이다.


하지만 트위터를 통해 맺어지는 관계가 과연 얼마만큼 진정한 소통으로 이어질 수 있을까? 트위터를 통해 세상을 안다는 사실이 실제 자신의 삶(행동 영역으로서의)에 영향을 준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될까?

보다 빠르고 쉽고 문제 없는 '만남'을 주창하며 이에 열광하는 사람들은, 그러한 만남이 결국에는 '연결되어 있음'을 재확인하는 것에 불과할 뿐인데도 마치 우리들에게 잃는 것보다 얻는 게 더 많다는 점을 납득시키려 한다. (50쪽)

우리는 그저 가상 세계의 관계 그 자체를 소비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세계의 현실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핑계로 그 현실의 비참을 바꾸는 행동에는 빠지려는 자기 나름의 명분을 쌓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이도저도 아니면, 너무나 마음이 외롭고 현실이 비참한 나머지 그저 나 자신이 여기에 이렇게 존재하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한 가닥 위안을 삼으려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제 언젠가는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그 유명한 '존재 증명'의 명제는 우리들의 이 매스커뮤니케이션 시대에 맞게 새로운 버전으로 업데이트된 "나는 보여진다. 따라서 나는 존재한다."라는 명제에 밀려 쫓겨나버리고 말 것이다. 사람들이 나를 보면 볼수록, 즉 사람들이 나를 보려고 선택하면 할수록 점점 더 내가 여기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납득시켜주는 증명처럼 여기게 되는 셈이다. 이런 삶의 방식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람들이 유명인들이다. (중략) 그[대니얼 부어스틴(Daniel Boorstin, 미국의 역사가)]에 따르면 "유명인이란 바로 그가 유명하다는 사실이 알려진 사람"이다. (51, 52쪽)

한 달에 문자메시지 3000여 건, 소녀는 왜 그랬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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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을 잃어버린 시간>(지그문트 바우만, 2012, 동녘)의 표지 사진. ⓒ 동녘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2012, 동녘)은 근대성에 대한 깊은 천착과 성찰로 유명한 폴란드의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Zygmunt Bauman, 1925~현재)의 책이다. 이 책은, 2000년대 이후 '유동하는 근대'라는 개념으로 널리 알려진 그가 이탈리아의 한 여성 주간지(<여성들을 위한 라 레푸블리카>)에 2008년부터 2009년까지 썼던 편지 형식의 기고문들을 수정, 편집해서 엮은 것이다.

모두 44편의 편지글이 실린 이 책에서 바우만은, '액체 근대'로 비유하고 있는 이 불확정성의 시대에 넘치는 지식과 정보와 관계를 우리가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한 통찰을 제공해 준다. 44편의 편지글에 등장하는 제재들은 삶의 근본 철학에서부터 공포에 대한 공포, 해고되는 사람들, 세대 차이, 신용카드, 신종 플루 공포, 건강 불평등에 이르기까지 정치, 사회, 문화 등의 전 영역을 아우른다.

책의 표제이기도 한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은 '편지 2'로 실려 있지만, 그러한 바우만의 주제 의식을 가장 압축적으로, 그리고 역설적으로 보여 준다는 점에서 실질적인 첫 번째 편지로 볼 수 있다.* 이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에 등장하는 한 소녀가 매우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미국 고등교육신문의 웹사이트에 올라와 있다는 그 소녀는 주변 사람들에게 한 달에 3000여 건의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고 한다. 계산을 해 보면 그 소녀는, 문자 메시지를 매개로 하여 그 한 달 간 매일 같이 10분 이상은 결코 혼자 있어 본 적이 없었던 셈이다. 대체 그 어떤 것이 소녀를 그 무지막지한 문자 메시지의 세계로 인도한 것일까?

아마도 소녀는 이제 다른 친구들이 없을 때, 과연 사람들이 자기 혼자 어떤 식으로 살아야 하는지, 혼자 어떤 생각을 하고 무엇을 하며 웃거나 울어야 하는지 거의 잊어버렸을지도 모른다. (24, 25쪽)

그 소녀처럼, 우리는 고독을 잃어버리면 혼자서 지낼 수 있는 '기술'(?)을 배울 기회조차 가질 수 없다. 아니 '기술'이 아니라 '태도'나 '자세'라고 해야 할까? 실상 우리가 진정으로 깊은 외로움에 빠져 보아야, 그리고 그 외로움에 홀로 당당히 맞서 보아야 진정으로 외로움을 이겨낼 수 있는 능력을 가질 수 있을 것이겠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외로움에 빠질 시간이 없다. 여유가 없다. 아니, 그럴 마음이 애시당초 없는지도 모르겠다. 세상이나 타인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수많은 연결 통로가 컴퓨터와 휴대 전화기 속에 널려 있으니 말이다. 지금 우리가 타인이나 세상으로 향할 수 있는 관계의 통로는 말 그대로 범람이다.

그러면서도 많은 이가 외롭다고 아우성이다. 삶의 외로움과 현실의 팍팍함에 상처를 입었다며 위로와 도움을 청한다. '제발 제게 위로와 도움을 주세요. 상처 받은 저에게는 따뜻하고 평안한 힐링이 필요해요. 혼돈스러운 이 세상에서 저를 이끌어줄 멘토가 되어 주실 분은 어디 안 계신가요?'

이렇게 넘쳐나는 관계의 한켠에서는 서로 좀 더 소통하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는 참된 인간적 소통이 없기 때문일 터.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소통조차도 강박으로 다가올 때가 없지 않다. '민주주의'와 '국민'과 '교육'이라는 말들이 그랬던(혹은 그렇게 되어가고 있는) 것처럼, '관계'와 '소통' 또한 머지않아 우리 사회에서 가장 타락한 단어들의 목록에 추가될지도 모른다. 말로 관계를 맺고 소통을 해서는 될 일이 아니지 않은가.

교실 문을 열고 몇 발자국만 걸음을 옮기면 된다. 그러면 서로의 눈을 마주 보면서 그 미묘한 표정과 어조의 변화에 눈과 귀의 촉수를 들이댄 채로 서로 온몸으로 소통할 수 있다. 그럼에도 많은 아이들이 휴대 전화로 문자를 주고 받는다. 휴대전화의, 한 뼘이 될까 말까 한 가상의 문을 여는 대신 실재하는 문은 육중하게 닫아 놓는다. 심지어는 가족이나 가까운 이웃을 향한 문조차도!

자,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여기 구순이 가까운 노학자의 사려 깊은 지혜를 참조하자. 그가 즐겨 인용하는 시지푸스와 프로메테우스**와 카뮈(Albert Camus, 1913~1960)가 어려워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그 지혜만큼은 두고두고 우리 삶의 지침으로 삼는다면 정말 좋겠다. 마흔 다섯 해를 살아온 내 무디어진 팔과 등에 순간 길고 굵은 소름을 돋게 한, 시지푸스와 프로메테우스가 등장하는 '편지 44'의 깊은 감동을 여러분도 느껴보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 '편지 1'은 '유동하는 근대 세계에 띄우는 편지'다. 이 글은 책 전체의 서문격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면 될 듯하다.
** 시지푸스(Sisyphus)와 프로메테우스(Prometheus): 시지푸스는 고대 그리스 신화의 인물로, 저승 산의 언덕에서 끝없이 돌을 밀어올리는 벌을 받아 구원받지 못하는 영원한 죄수의 표상으로 잘 알려져 있다. 프로메테우스 또한 고대 그리스 신화 속의 인물로, 신의 명령을 어기고 인간에게 불을 가져다 준 대가로 코카서스 산중의 바위에 묶인 채 독수리에게 간을 쪼아먹히는(그 간은 끊임없이 다시 생성된다) 모진 형벌을 받는다.

지그문트 바우만 저, 조은평 외 역(2012),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동녘.  값 1만6000원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오마이뉴스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 유동하는 근대 세계에 띄우는 편지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조은평.강지은 옮김,
동녘, 2012


#지그문트 바우만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시지푸스 #프로메테우스 #카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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