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1월 26일, 서울 조계사에서 개최한 <장준하, 묻지 못한 진실> 출판기념회. 명진스님과 장준하 선생님의 장남 장호권 선생 등 많은 분들이 함께했다. 이날, 연설을 통해 "장준하 선생의 진실을 밝힐 수 있는 정의로운 권력이 세워질 수 있도록 함께해 달라"고 호소했다.
고상만
하지만 결과는 참담했고 그래서 더 고통스러웠습니다. 무려 100만표가 넘는 패배를 보며 이것이 진짜인가 싶었습니다. 차마 끝까지 그 '참담한 패배'를 지켜 볼 용기가 없어 발작처럼 TV를 껐지만 잠은 쉬 오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뒤척이며 맞이한 아침. 정말 눈뜨기 싫었지만 인기척에 눈을 떠보니 출근 준비를 하던 아내였습니다. 이번 선거에서 저보다도 더욱 문재인 후보의 당선을 기대했던 아내였습니다. 학생운동 선후배로 만나 결혼까지 한 아내는 제가 재야단체에서 인권 운동을 할 당시 매일 도시락에 '콩' 글씨로 사랑을 표현하여 운동권 내에서 이른바 '내조의 여왕'으로 유명한 사람입니다.
그런 아내 역시 마음이 상해 있을 것 같고 저 역시 별로 할 말이 없어 저절로 시선을 피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화장대에서 아내가 돌아앉으며 던진 한 마디가 들렸습니다.
"설마 잡혀가는 건 아니겠지?"뜬금없는 그 말에 '피식' 웃음이 났습니다. 대선 기간 동안 제가 해온 '말과 글'로 인해 혹여 불이익이라도 받을까 정말 진지하게 걱정하는 아내의 말에 웃음이 났습니다. 그러면서 아내가 이런 걱정까지 해야 하는 시대를 다시 만난 것 또한 참담했습니다. 누구를 상대로 사실이 아닌 내용으로 비난한 바도 없고 또한 사익을 추구하고자 한 말도 아니었는데 아내로서는 뭔가 불안한 것 같습니다.
갑자기 미안해졌습니다. 어쩌면 조용히, 그냥 평범하게 공무원 생활하면서 살아도 될 텐데 '스스로 부여한 역사적 소임을 자임'하며 갑자기 사표까지 낸 남편 때문에 저런 마음 걱정까지 하게 된 것이 그냥 미안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하던 그때였습니다. 갑자기 아내가 다시 저를 돌아보더니 또 다른 뜻밖의 말을 꺼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생각해 봤는데…, 정말 당신은 대단한 것 같아."이건 또 무슨 말인가 싶어 다시 아내를 쳐다봤습니다.
"이번에 서울시교육감 보궐선거도 진보가 졌잖아. 그런데 보수 교육감이 당선된 마당에 당신이 그냥 그 밑에서 일하는 것도 말이 안 되고 그렇다고 선거 결과 후에 사표 내고 나오면 다른 사람 보기에 쫓겨나는 것처럼 보이니 그것도 좀 이상하잖아. 그런데 이렇게 사표내고 선거 운동 기간 안 할 말 다하고 후회없이 일했으니 얼마나 좋아. 그런 판단을 하는 것 보면 정말 당신은 참 대단한 것 같아."아내에게 고마웠습니다. 그 마음이 사실이든, 아니든 실의에 빠진 남편을 위해 그렇게 말해주는 아내가 정말 고마웠습니다. 처음 아내에게 공무원 사표내고 정말 중요한 이 시기에 자유롭게 '정권 교체'와 '진보 서울시 교육감 당선'을 위해 기여하고 싶다고 말했을 때 아내의 답변은 간결했습니다.
"그래. 지금까지 살아온 원칙대로 하면 되지 뭐. 나중에 죽을 때 후회하지 않게 지금 마음 가는대로 정직하게 살자구. 어차피 공무원 하려고 지금까지 살아온 것도 아니잖아."1991년에 학생운동을 하다가 감옥에 갔었습니다. 그때 첫 면회 신청이 들어 왔다며 나오라는 것입니다. 당연히 부모님이 오셨나보다 생각하며 면회장으로 나갔습니다. 그런데 나가보니 생각지도 못한 제 1년 여자 후배였습니다. 너무 뜻밖이었습니다. 평소 성실하고 착한 후배였지만 학생 운동 단체에 가입한 지도 얼마 안 되었고 또 여러 사정으로 많은 대화도 나누지 못했던 후배였습니다. 그런데 버스로 1시간이나 떨어진 그곳까지 그 후배가 혼자 면회를 왔다는 것 입니다. 그래서 너무 고맙다며 웃었는데 책 한 권 넣었다며 인사하곤 이내 돌아갔습니다.
방으로 돌아와 차입된 책을 펴보니 그 안에 편지가 한 장 있었습니다. 펴보고 웃었습니다. 편지에는 '오늘의 날씨'가 써 있었습니다. '오늘의 온도는 얼마, 꽃은 어느 정도 폈고 하늘은 무슨 색이며 바다에는 파도가 얼마나 친다.' '이게 무슨 편지인가' 황당했습니다. 그런데 그 후에도 후배는 자주 면회를 왔고 또 그렇게 비슷한 내용의 '오늘의 날씨'를 써서 저에게 넣어 줬습니다. 나중에 물어 봤습니다. 편지를 왜 그렇게 썼냐고. 그랬더니 그 후배의 말이 "선배가 있다는 감방이 일제시대 지하 감방이라고 해서 바깥을 전혀 볼 수 없을 것 같아 날씨를 알려주고 싶었다"는 답이었습니다.
그 사람이 지금의 아내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제 곁에서 제가 하는 일을 지지해 주는 사람. 남들 보기엔 불안하고 걱정도 되며 때로는 실패도 많이 했지만 그때마다 무너지지 않게 늘 저를 믿어주고 함께해 주는 사람. 그런 아내가 있어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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