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1월 27일, 늦은 밤에 이루어진 1년 반만의 한밥상 가족식사.
이안수
숟가락을 놓고 각자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얘기했습니다. 귀가 시간이 모두 달라 서울에서도 가족 각자의 일상을 알 지 못한 터였습니다. 그리고 한 해를 어떻게 마무리할 지, 각자의 계획을 말했습니다. 어떤 일은 핀잔을 놓고, 어떤 계획에는 응원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각자 해모를 안아주거나 머리를 쓰다듬고 서울로 떠났습니다. 백일몽처럼 잠시 함께했던 가족들을 보내고 나니 함께 '대이작도'를 거닐면서 나누었던 야초스님의 법문이 떠올랐습니다.
"'잘 사는 날이 올 거야'는 중생의 태도이고 '지금 잘 살아야 돼'는 깨달은 자의 자세입니다." 해모의 33시간 실종은 현재의 실행만이 가장 확실한 것이며, 어떤 이유에서 간에 사랑이 미래로 유보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확신하게 했습니다. 가족과 함께한 저녁식사, 오랜만에 '청맹과니 짓을 면했다'는 안도가 밀려왔습니다.
해모, 동화책의 주인공이 되다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 중에서 '경악'스러운 일의 주체는 대부분 사람인 경우입니다. 사자가, 치타가, 혹은 개가 그 사건의 원인인 경우는 드물지요. '사람의 지혜가 깨서 자연을 정복하여 사회가 정신적·물질적으로 진보된 상태'를 문명(文明)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사람에 의해 저지르지는 깜짝 놀랄 일들을 접할 때마다 '우리가 과연 문명화된 시대에 살고 있는가'란 의문을 풀 방도가 없습니다.
어제(1월 28일) 가족들이 모티프원에 모두 모였습니다. 아내가 휴무일이고, 첫째 딸 나리가 지난 주말로 뮤지컬 공연을 끝냈고, 둘째 딸 주리도 <아리랑TV>에서의 인턴을 마감했습니다. 한 달에 한번씩 모여 '한밥상 가족만의 식사를 하자'는 지난해의 약속은 두 달간 지켜지지 못했습니다. 세 분의 부모님을 갑자기 모시게 된 아내는 카카오톡의 그룹채팅방에 가족의 집합을 명할 짬을 낼 수가 없었습니다.
주리가 집에 도착하자마자 스마트폰을 꺼내 보이며 '도대체 이럴 수가 있는가'라며 흥분했습니다. 딸이 보여 주는 뉴스의 화면에는 불덩이 하나가 도로를 가로지르는 모습이었습니다. 그 불덩이는 '불붙은 개'라고 했습니다. 그 불길로 보아서 인화물질을 뒤집어쓰지 않고는 살아있는 개가 그런 화염에 휩싸일 수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우리사회에도 '반려동물'이라는 용어가 보편화되었습니다. 이 용어는 사람과 더불어 사는 동물을 사람의 장난감이 아님을 인식시키기 위해 1983년 10월 오스트리아 과학아카데미가 주최한 '인간과 애완동물의 관계(the human-pet relationship)'를 주제로 하는 국제 심포지엄에서 처음 제안됐습니다.
인간이 문명화되어 온 그 과정 속에서 치열한 경쟁의 결과로 이성의 통제를 벗어난 사람의 욕망은 오히려 야만성을 증대하는 부작용을 낳았습니다. 반면 본능 그대로의 삶을 지속해온 동물에게서 오히려 사람이 잃어버린 자연 그대로의 상태를 찾을 수 있습니다. 반려동물이 오히려 사람의 스승일 수 있는 요소입니다.
배우자를 '반려자'로 호칭하기도합니다. 부부의 다른 한 쪽을 의미하는 배우자보다 '평생의 짝'이라는 뜻이 포함된 이 반려자라는 호칭에서 오히려 저는 더 숭엄함을 느낍니다. 반려자라는 의미 속에는 동반자로서의 기쁨과 위로 외에도 때로 보호하고 보살펴야할 의무도 포함되어있기 때문입니다.
반려동물은 기름을 붙고 불을 붙여도 괜찮은 물건일 수 없으며, 병에 걸리거나 이사를 해서 함께 살기가 불편하다고 내버려도 되는 장난감일 수는 없습니다. 좋을 때는 물론 불편하고 싫어졌을 때도 여전히 짝으로 살아야하는 반려자인 것입니다. 오늘 두 달 만에 다시 온 가족이 모일 수 있었던 것은 우리가족의 반려견 '해모' 때문이었습니다.
해모는 아들의 동물에 대한 탐구욕을 불타게 했고, 딸들에게 존재하는 모든 생명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갖게 했으며, 아내에게 산길을 걷는 트레킹의 든든하고 안전한 동행이 되어주었으며 제가 갖지 못한 인자(仁者)의 성품으로 저의 스승이 되어주곤 했습니다. 해모는 지금 모 출판사 동화책의 주인공이 되어 페이지 구성의 계획에 따라 몇 개월 동안 몇 차례에 걸쳐 촬영이 진행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