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에 임시로 자리잡은 고 최강서씨의 관. 유가족과 최강서열사대책위는 경찰과 사측의 침탈 등에 대비해 주변에서 관을 지키고 있다.
정민규
- 42일 만에 고인의 시신을 영도조선소로 옮겼다. 어떻게 된 것인가?
부인= "40일 넘도록 사측은 교섭 한번 안 하고 조문 한번 안 온 채 말로만 애도를 표했다. 유가족과 협상할 마음이 있다면서 한 번도 행동은 보이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그렇게 조문을 오던 국회의원들도 올 때만 조속한 해결에 힘쓰겠다 했지 이루어진 것은 없었다. 새정부를 기다렸는데 그쪽에서 아무런 답변을 들을 수 없었다.
인터넷 포털사이트에서도 남편의 죽음은 언급이 안 되고 있고 언론은 사측의 입장을 받아서 편파적인 보도를 한다. 대책위와 노조 분들이 서울까지 가서 상경 투쟁을 벌이는데 유가족도 가만히 있을 수 없겠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유가족이 다른 분들의 짐을 덜어주어야겠다 생각했다. 남편은 4살, 5살 아이와 부인을 두고 갈 만큼 회사가 우선이었던 사람이다. 유가족 뜻뿐 아니라 남편의 뜻이라고 생각했다. 김주익 열사의 이야기를 죽기 일주일 전쯤에 한 것으로 봐서는 마음을 그때부터 먹은 듯했다."
누나= "가족에게 남긴 유서보다 회사를 상대로 남긴 유서가 더 길었던 동생이다. 그렇게 오고 싶어 했던 회사였고, 출근하길 원했던 회사였다. 목숨을 끊은 것도 회사였다. 회사로 오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다."
- 어제(30일) 운구 과정에서 발생한 경찰과의 충돌을 어떻게 바라보나?누나= "경찰이 너무 심했다. 약간의 충돌은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최루액을 뿌리고 폭행까지 할 줄은 몰랐다. 나는 처음 최루액이란 것도 모르고 경찰이 호스로 물을 뿌리는 것으로 생각했다."
부인= "2013년도에 이런 일이 벌어질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런 모습은 영화에서나 보고 70~80년대에나 있던 일인 줄 알았다. 유가족이 원했기 때문에 대책위와 합의하고 남편을 회사로 옮기자고 한 것이었고, 합법적인 절차로 행진을 한 것인데 경찰이 과잉진압을 한 것은 이해할 수 없다"
"사측! 대화하자면서요? 새벽이고 밤이고 언제든 기다리겠습니다"- 충돌 과정에서 고인의 아버님도 다쳤다고 들었다. 상황을 설명해달라?부인= "어제 제가 방송차에 올라서서 경찰에 '길을 비켜달라, 장례를 치러야 한다'고 애원해도 경찰은 길을 비켜주지 않았다. 오히려 우리를 에워싸며 압박해 들어왔고, 시신마저 경찰에 빼앗길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던 중 서문을 열었고, 우리도 조선소 안으로 들어왔다. 그 상황에서 선두에 계시던 아버지는 들어오지 못했다. 경찰은 아버지를 유족으로 알고 있음에도 단추가 모두 떨어질 만큼 멱살을 잡고, 머리채까지 잡아끌었다. 안으로 끌려간 아버님을 경찰이 방패로 내리찍고 엄청 때렸다. 아버님은 지금 입원한 상태다. 머리를 너무 맞아서 눈도 아프다고 말씀하신다. "
(이런 주장에 대해 부산 영도경찰서 경비작전계 관계자는 <오마이뉴스>와 한 통화에서 "최씨의 아버지가 폭행 당했다고 하던 시점 전에는 최씨의 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지만 이후에는 보지 못했다"며 "이후의 상황은 알지 못한다"고 말했다.)
누나= "우린 원래 이곳에 들어올 생각도 없었다. 조중동은 우리가 계획적으로 난입하기라도 한 듯 보도했던데 우린 동생을 운구해서 회사 앞으로 빈소를 옮기려고 했던 것뿐이다. 유가족들이 지낼 집까지 회사 앞에 다 봐놓고 보일러에 기름까지 다 채워놓았는데 경찰이 막으면서 이렇게 사태를 만든 것이다."
- 대책위가 요구한 냉동탑차와 드라이아이스의 반입을 사측이 막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