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아오를 듯한 마차 조각... 이게 국회의사당이라고?

[불혹 배낭여행기 22] 쓰레기소각장도 예술품 같은 도시 비엔나

등록 2013.03.07 19:15수정 2013.03.22 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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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비엔나의 의사당. ⓒ 홍성식


놀라움은 익숙하지 않은 것을 만났을 때 온다. 그것이 예술작품일 경우 이 놀라움은 경악 혹은, 정신적 공황상태까지 이어지기도 하는데 그걸 '스탕달 신드롬'(Stendhal Syndrome)이라 한다. 그런데, 이 스탕달 신드롬이 반 고흐나 구스타프 클림트의 그림이 아닌 겨우(?) '국회의사당 건물'을 보고도 올 수 있다면 믿을 수 있겠는지.

2011년 8월. 오스트리아 비엔나에 머물던 일주일은 행복했다. 그해 5월 터키 여행 중 만난 한국인 A씨는 고맙게도 자신이 살고 있는 비엔나의 조그마한 아파트를 아무런 대가 없이 통째로 빌려주었다. 나와 유럽을 여행 중이던 카이스트 학생 3명은 그곳에서 오랜만에 한국 음식을 해먹고, 편안한 잠을 잘 수 있었다. 한국어로 실컷 수다도 떨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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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베데레 궁전. 정원이 근사했다. ⓒ 홍성식


오스트리아와 비엔나는 모차르트와 하이든, 슈베르트가 태어난 나라이며, '키스'의 구스타프 클림트, '추기경과 수녀'의 에곤 실레가 활동했던 도시. 세계를 들었다 놓았다 했던 음악가과 미술가들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고, 거리에 침을 뱉거나 전철에서 큰 소리로 떠드는 사람을 찾아보기가 매우 힘든 도시. 사람들의 매너는 내가 여행해본 유럽 국가 중 최고였다.

비엔나에서의 7일. 느지막이 아침을 먹고 교외선 전철을 타고 시 외곽의 강변을 느린 걸음으로 산책하거나, 시내 중심가로 나가 노천카페에서 차를 마시며 도처에서 벌어지는 길거리 연주회와 공연에 무심한 눈길을 던지며 유유자적했다.

사실 마흔 살쯤 먹으면 어지간한 것에는 감동하기가 힘든 법이다. '미술관의 도시'라 불리는 비엔나이니 왜 거기에도 가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미술에 관해선 문외한인 탓일까? 루벤스나 클림트의 그림을 봐도 별다른 감흥이 일지 않았다. 우습게 들리겠지만, 깜짝 놀라 자주 발걸음을 멈춘 공간은 미술관인 아닌 거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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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 테레지아와 마리 앙투아네트가 살았던 쇤부른 궁전. ⓒ 홍성식


서울에는 왜 이런 건물들이 없는 걸까?

"서울은 콘크리트와 통유리로 축조된 살벌한 도시"라고 말한다면 누군가가 펄쩍 뛰며 이를 부정할까. 하지만 엄연한 사실이다. 고가의 주상복합아파트와 랜드마크 역할을 하는 수십 층 건물을 보라. 이른바 '잘 먹고 잘 사는' 강남지역을 벗어나면 콘크리트와 통유리는 가난한 자들의 눈물로 대체된다. 판자로 이어붙인 철거 직전의 빈민촌들이 서울에는 아직도 숱하다.


바로 그 도시 서울에서 20년 가까이 살고 있는 나는 부러웠다. 오스트리아 비엔나의 '예술적인' 건축물들이.

피 뜨거운 열아홉 살 세르비아계 보스니아 청년 가브릴로 프린시프가 망하게 만든 합스부르크 왕가. 오스트리아와 독일, 거기에 헝가리와 슬로바키아에까지 영향력을 행사했던 페르디난트 황태자의 갑작스런 죽음은 '제1차대전'을 불렀고, 패배한 합스부르크가는 대가 끊겼다. 이건 역사책을 읽으면 다 나오는 이야기이니 이쯤에서 그만두고.

2011년 여름. 바로 이 합스부르크 왕가의 숨결이 곳곳에 묻어있는 거리와 궁전을 부지런히 쏘다녔다. 그리고는 어쩔 수 없는 열패감과 부러움에 시달렸다. 누구나 알고 있고 그렇기에 비엔나를 찾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방문하게 되는 슈테판성당과 국립 오페라하우스, 쇤부른과 벨베데레 궁전만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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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아름다운 석조건축물들이 비엔나의 밤을 매력적으로 만들어준다. ⓒ 홍성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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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을 향해 달려가는 듯한 슈테판성당의 위용. ⓒ 홍성식


저건 쓰레기 소각장이야? 예술품이야?

도심에 있는 시청 건물은 물론, 국회의사당까지 멋들어지기 짝이 없었다. 의사당 분수에 석회암으로 만든 조각상은 그 표정 하나하나가 진짜 사람처럼 섬세했고, 지붕 위의 조각된 마차는 곧 하늘로 날아오를 듯했다. 앞서 언급한 스탕당 신드롬과 유사한 감정이 나를 흔들었다. 시청사의 첨탑 역시 고딕미술의 절정을 과시하고, 심지어 쓰레기소각장까지 모던한 예술품 같았으니.

살풍경한 콘크리트 더미에서 살아온 '서울 촌놈'인 나는 맥이 탁 풀렸다. 합스부르크 왕가에서 가장 유명한 두 여자, 마리아 테레지아와 그녀의 막내딸 마리 앙투아네트가 살았던 쇤브른 궁전의 정원에 이르러선 부러움을 넘어서 감동까지 먹었다. 한국의 오뉴월은 오스트리아에서도 오뉴월. 그날의 더위로 보자면 평소 거의 먹는 경우가 없는 감동이 아니라 냉수를 먹어야 했는데.

사실 나는 오래 전 지어진 성당이나 궁전에서 아름다움을 느끼기보다는 그걸 짓기 위해 흘려야했던 핍박받는 이들의 땀과 눈물을 먼저 떠올리는 '멋없는 인간'이다. 천성이 낭만주의자보다는 설익은 민중주의자에 가깝기 때문이다.

헌데 그날은 평소와 달랐다. 심지어 프랑스 왕가로 시집가 1789년 혁명 당시 "오스트리아에서 온 매춘부"라 조롱받았던 앙투아네트가 불쌍하다고 느꼈으니. 그녀를 단두대에 올려 목을 자른 프랑스혁명의 주도자들에게 서운한 마음까지 들었다. 그건 대체 무슨 감정의 뜬금없는 기복이었을까?

주말 밤엔 시청사 벽면에 거대한 스크린을 걸고 상영하는 야외 오페라를 봤다. 왜 오스트리아에서 우리가 '클래식'이라 부르는 대부분의 음악이 탄생했는지 짐작이 갔다. 수천 명의 사람들이 모였음에도 제 사연을 떠드는 이 하나 없이 벽면에 투사되는 오페라에 집중하는 장면은 그 자체로 장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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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내린 비엔나. 주말이면 시청사 벽면에 영사막을 설치해 오페라나 클래식연주회를 상영한다. ⓒ 홍성식


겉보다 속이 더 예술적이고 인간적인 도시 비엔나

비단 비엔나의 외양만은 아니었다. 속에 담긴 내용은 더 근사했다. 필요 없는 쓰레기를 태우는 공간조차 그토록 아름답게 만든 비엔나 사람들은 오후 6시만 되면 슈퍼마켓과 담뱃가게, 채소가게, 공장과 사무실을 모조리 닫고 자신만의 시간을 즐긴다.

한적한 여유 속에서 오페라를 보거나, 클래식을 듣는다. 아무도 그 이후 시간에 일하지 않는다. 24시간 편의점과 새벽까지 문을 여는 식당 따위는 비엔나에 없다. 여름이 되면 '가족과 휴가 갑니다'라는 간단한 메시지를 가게 앞에 내걸고 1개월을 쉰다. 한국 상황에서 보자면 터무니없이 과도한 그런 휴식을 당연시하는 사회적 인식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정승처럼 일하고 정승처럼 쉴 줄 아는 것이다. 사회적 약속으로 굳어진 '일보다 귀한 건 인간적인 삶'이란 명제. 거리 곳곳에 산재한 예술품에 가까운 건축물보다 사실은 이게 더 감동적이고 부러웠다.

다들 알고 있겠지만 이 글은 '한국이 오스트리아보다, 서울이 비엔나보다 못하다'는 걸 주장하려 쓰는 게 아니다.

서울에 옛날 건축물이 많이 남아있지 못한 건 석조건물이 대다수인 비엔나와 달리 나무와 종이가 집을 만드는 주재료였던 탓이다. 그것들은 불에 약한 소재고, 한국은 고래로부터 전쟁의 화마를 수십, 수백 차례 겪었던 나라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목조건물 중엔 멋들어진 것도 적지 않은 게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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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엔나 의사당 앞 분수에는 매력적인 조각들이 즐비하다. ⓒ 홍성식


긴 휴가도 자연스레 받아들이는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됐으면...

오스트리아 사람들이 즐기는 1개월의 여름휴가도 그렇다. 한국은 노동집약적인 산업에 집중된 정책으로 압축 성장을 이룬 케이스.

우리들 의식 속엔 여전히 '열심히 일하고 부지런히 저축해 안락한 노후를 준비하자'는 성장시대의 슬로건이 희미하게 남아있다. 게다가 국가가 국민의 노년을 보장해주는 시스템도 아직은 미약한 수준. 나중을 생각해서라도 휴식보다는 일에 집착할 수밖에 없는 구조인 것이다.  

비엔나. 국회의사당 분수 앞에서 밀어를 속삭이던 금발머리 여대생과 아침마다 담배를 사러 가며 친해진 구멍가게 아저씨의 노래하는 듯한 "당케 쉔" 발음이 아직도 가끔 떠오른다. 그늘 없는 얼굴과 환한 미소. 그럴 때면 인간의 삶 속에서 일과 휴식의 적절한 배분을 이뤄낸 그들의 여유가 내심 부러운 건 어쩔 수가 없다.

그런데 이어지는 생각 하나. 오늘날 우리가 오스트리아 비엔나 사람들보다 더 많이 일하고도 턱없이 짧은 휴가에 불만을 느끼는 상황인 건 고려 왕조나 조선 왕조가 합스부르크 왕가보다 무능해서일까? 곰곰이 생각해보면 꼭 그것만이 이유는 아닌 것 같다.
#오스트리아 #비엔나 #긴 휴가 #국회의사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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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꽃> <한국문학을 인터뷰하다> <내겐 너무 이쁜 그녀> <처음 흔들렸다> <안철수냐 문재인이냐>(공저) <서라벌 꽃비 내리던 날> <신라 여자> <아름다운 서약 풍류도와 화랑> <천년왕국 신라 서라벌의 보물들>등의 저자. 경북매일 특집기획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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