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바닥이 '근질근질' 마음은 '두근두근'

[서평] <구본준의 마음을 품은 집>

등록 2013.03.18 16:54수정 2013.03.18 1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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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숨에 읽힌다고 해서 꼭 좋은 책은 아니다. 반대로 중간에 책장을 덮게 만드는 책 또한 꼭 나쁜 책은 아니다. 끝장까지 손을 떼지 못하게 하다가 막상 책장을 덮으면 남는 게 별로 없는 책도 있고, 한꺼번에 읽기가 아까워 야금야금 읽어야 하는 책도 있기 때문이다. <구본준의 마음을 품은 집>은 단숨에 읽히는 책이면서 조금씩 읽는 맛이 일품인 책이다.

집의 마음을 들춰보다


 <구본준의 마음을 품은 집> 표지
<구본준의 마음을 품은 집> 표지서해문집
<구본준의 마음을 품은 집>은 한겨레에서 건축과 미술을 담당하고 있는 구본준 기자의 건축 에세이다. 흔히 건축에 관한 책이라고 하면 딱딱하거나 밋밋하지 않을까 지레짐작한다.

하지만 이 책은 건축학적 지식이 아니라 집이 품고 있는 마음을 들려주고 있어서 독자의 감성을 촉촉하게 물들인다.

왜 이 책은 단숨에 읽히는가? 이 책의 부제는 '그 집이 내게 들려준 희로애락 건축 이야기'이다. 부제가 알려주는 바대로 이 책에 나오는 건축물은 기쁨, 분노, 슬픔, 즐거움 이렇게 네 가지 감정을 보여준다. 독자는 희로애락의 감정을 모두 느끼고 싶어서 16개의 집을 한꺼번에 둘러보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그럴 수가 없다. 어느 건축물에 얽힌 사연이든 읽고 있노라면 집이 간직하고 있는 그 마음에 사로잡혀 책장을 슬그머니 덮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은 조금씩 맛을 보며 읽는 책이기도 하다.

슬픔을 기쁨으로 승화시키는 건축

이를테면 이 책에서 가장 먼저 소개하는 '기쁨의 집'인 이진아기념도서관을 보자. 서대문구 독립공원에 위치한 이 도서관을 한번이라도 본 적이 있다면 '이진아가 누군가?' 하고 생각해보았을 지도 모른다.


<구본준의 마음을 품은 집>을 읽으면 이진아가 누군지, 어째서 도서관에 그녀의 이름이 붙었는지 알게 된다. 그뿐이랴. 건축이 슬픔을 어떻게 기쁨으로 승화하는지 엿보게 될 것이고, 잠시 가슴이 먹먹해짐을 느끼게 될 것이다. 책장을 덮고 숨을 고르게 될 것이다.

'기쁨'에 속한 대한성공회 서울대성당이나 어린이대공원 꿈마루, 순천 기적의 도서관에 얽힌 이야기를 읽고 나면 기쁨으로 충만한 마음이 발바닥으로 전해진다. 이 기쁨의 집들을 보고 싶어서 발바닥이 근질근질하게 되는 것이다. 특히 저자는 건축물의 '귀여움'에 대해서 여러 차례 언급하고 있는데, 바로 그 귀여움을 직접 확인해 보고픈 마음은 두근두근 거린다.


 이진아기념도서관의 이진아 기념물
이진아기념도서관의 이진아 기념물서해문집

분노를 품은 집, 분노를 일으키는 집

'기쁨' 다음엔 '분노'의 장이 펼쳐진다. '분노의 집'인 전쟁과 여성인권박물관은 아직도 아물지 않은 상처를 드러내는 동시에 그 상처의 가해자들에 대한 분노를 촉발하고, 피해자들에 대한 치유를 염원한다. 화를 내지 않고 안으로 삭히기만 하면 마음은 병이 든다. 감추기면 하면 병을 더 키우는 법이다. 건축물은 화를 내기도 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치유에 이르기도 한다. 그것을 전쟁과 여성인권박물관이 보여주고 있다. 이곳도 얼른 가보고 싶어진다.

이어 나오는 도동서원은 연산군 집권 시기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로 희생된 김굉필을 모시는 곳이다. 시대를 잘못 만나 순교자가 되었지만 그는 사림의 우상이 되었다. 도동서원은 우상을 기리는 사림의 헌사가 건축물이 된 것이다. 따라서 서원 자체가 김굉필의 오기와 자존심을 오롯이 담아내고 있어서 '분노의 집'으로 분류되었다. 도동서원은 우리에게 화려함보다는 소박함과 지성을 보여주는 깐깐한 건축물이다.

시드니 오페라하우스는 건축주와 건축가의 전쟁이 어떤 것인지 알려주며, 얄궂게도 그것과 상관없는 건축물의 운명이 따로 있음도 전해준다. 김수근이 설계한 옛 부여박물관은 하도 욕을 많이 먹어서 '분노의 집'이 된 경우다. 왜 욕을 많이 먹었는지 책을 읽고 확인하면 재미있을 것이다.

슬픔의 건축에서 고 노무현 대통령의 운명을 생각한다

세 번째 장인 '슬픔'에서 우리는 봉하마을 묘역을 만난다. 누구도 예상할 수 없었던 고 노무현 대통령의 마지막을 다시금 떠올리는 일은 여러 가지 상념에 빠지게 한다. 봉하마을 묘역은 낮은 비석 하나와 광장으로 이루어졌다. 운명이다. 묘역은 죽음을 담은 공간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삶을 가장 극적으로 드러내기도 한다. 그저 '운명이다'라고 했던 고인의 삶과 죽음은 이 묘역에서 더욱 강렬하게 되새겨진다.

시기리야 요새와 아그라포트는 가려면 너무 먼 곳이기에 발바닥까지 전해지지는 않지만 마음에는 분명한 무늬의 감정을 찍어놓는다. 불멸의 건축물과 불멸의 이야기는 있어도 그 건축물과 이야기의 주인공은 사라지고 없다. 만고에 칭송되는 위대한 건축물은 도리어 인간 존재의 유한함을 극명히 드러낸다.

뒤이어 미국 세인트루이스의 프루이트 아이고와 서울의 세운상가는 불행했던 아파트로 등장한다. 잘못된 도시계획은 인간을 불행하게 만드는 법. 도시계획을 담당하는 이들은 반드시 이 책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구절을 명심해야 한다.

"도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건물과 도시, 건물과 건물, 건물과 인간 사이의 유기적이고 건강한 순환관계이다."(230쪽)

랜드마크 건물 몇 개 만들어놓으면 상권이 형성되고 경제가 발전하리라는 썩은 생각을 버려야 한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건축 이야기

<구본준의 마음을 품은 집> 마지막 장은 '즐거움'이다. 창덕궁, 선교장, 충재 등 한국 전통건축의 명작들이 여기에 담겨 있다. 바라건대 대한민국 모든 초중고교의 소풍으로 위의 장소에 갈 경우, 이 책을 학생들에게 미리 읽혔으면 좋겠다. 고궁을 가든 전통가옥을 찾든 그곳을 그저 슬쩍 훑어보고 오는 경우가 많은데 이 책은 그것이 얼마나 손해인지 가르쳐준다.

맨 마지막에는 건축가 문훈의 사무실인 문훈발전소가 나온다. 그곳을 보면 사무공간이 얼마나 개성적일 수 있는지, 또 얼마나 재미를 추구할 수 있는지 알 수 있다. 엄숙주의와 기능주의를 넘어서 재미를 추구하는 것도 하나의 '가치'이다.

<구본준의 마음을 품은 집>은 집을 짓는 것이 인간이며 그 인간의 마음이 집에 담긴다는, 어찌 보면 아주 당연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 사회에서 집은 사람이 사는 공간이 아니라 사고파는 물건이 된 지 오래다. 건물을 보면 가격부터 매겨보는 사람이 어디 한둘인가. 또 그런 사람 역시 인격이 아니라 스펙으로 가격이 매겨지는 시대다. 그런 점에 비추어 보면 이 책은 건축물조차 마음을 품은 존재로 파악하는 매우 인간적인 책이다. 이 책이 품은 마음을 들춰보기를 권한다.
덧붙이는 글 구본준, <구본준의 마음을 품은 집>, 서해문집, 2013. 값 16,000원.

구본준의 마음을 품은 집 - 그 집이 내게 들려준 희로애락 건축 이야기

구본준 지음,
서해문집, 2013


#구본준 #구본준의 마음을 품은 집 #건축 #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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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소설 씁니다. 문피아에 '천재 아기는 전생을 다 기억함'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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