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지슬>의 한 장면
지파리 필름
그들은 '빨갱이'에서 벗어나기 위해 58년을 기다렸다
4·3 사건이 '빨갱이 소탕 작전'에서 '국가권력의 불법 사용에 의한 무고한 양민 학살'로 바뀌기까지 무려 58년이 필요했다. 그동안 진보 진영과 민간 차원에서 이루어지던 진상규명 요구를 받아 안은 것은 김대중 정부 시절인 2000년이었다.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고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가 설치된 후 3년만인 2003년, 사건 발생 55년 만에 정부차원의 진상보고서가 채택된다.
진상규명위는 제주도민 및 피해자에 대한 정부의 사과와 추모기념일 지정, 4·3평화공원 조성 등 7대 건의안을 제출하고 노무현 전 대통령은 이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드디어 2003년 10월 국가 차원에서 공식 사과했다. 노 전 대통령은 2006년 4월 3일 대한민국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4·3 위령제에 참석해 추도사를 하게 된다. 제주 도민과 유가족들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손을 잡으며 눈물을 흘렸다.
이후 4·3사건에 대한 명예회복과 거기에 걸맞은 대우가 이어질 줄 알았다. 이명박 대통령은 후보 시절, 제주 첫 방문지로 4·3평화공원을 택했다. 이 자리에서 그는 "한나라당이 집권하더라도 역사적 사건에 대한 평가는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 대통령이 공약을 뒤집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17대 대통령 인수위에서 4·3위원회 등 과거사 위원회 폐지를 거론한 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2008년은 4·3사건이 60년을 맞는 해였다. 당연히 위령제 또한 뜻깊은 자리였다. 제주도와 정치권, 시민단체들은 '대통령이 반드시 참석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이명박 대통령은 이념 논쟁을 불러올 우려가 있다는 이유를 불참하기 시작해 임기 5년 내내 단 한 번도 위령제에 참석하지 않았다. 61주년 기념식에는 제주 4·3 위원회 위원장인 한승수 총리마저 서울모터쇼 참석을 이유로 불참해 논란이 일었다. 대통령과 총리의 이 같은 행보는노무현 정권하에서 이루어진 진상보고서 뒤집으려는 의도와 무관치 않다.
2008년 구 한나라당 임해규 의원은 MBC 라디오에 출연해 "남로당 계열 등 좌익이 제주도에서 경찰들을 습격함으로써 남한의 단독정부수립과 이후의 일련의 과정에 대한 저항의 성격으로 게릴라전을 했던 것이 역사의 사실"이라고 주장했다. 또 참여정부에서 국방부 장관을 역임했던 김장수 전 한나라당 의원은 2008년 9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국방부가 4·3사건에 대한 평가가 좌익 성향 위주로 돼 있다는 판단에 따라 국무총리 소속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에 객관적인 평가가 이뤄졌으면 좋겠다는 취지의 공문을 올해 초 보낸 바 있다"고 밝혀 논란을 빚기도 했다. 여기에 이상희 전 국방부장관은
2008년 10월 열린 국정감사에서 "제주4·3사건은 남로당의 사주를 받은 무장폭동 사건"이라고 말해 4·3 유족회 등에 극한 거센 반발을 부르기도 했다.
노무현의 대통합과 박근혜의 대통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