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준하 선생님 가신 길에 부쳐보는 평화의 소망

다시 읽는 장준하의 <민족주의자의 길>

등록 2013.03.31 13:48수정 2013.03.31 1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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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8일, 서울광장에는 장준하 선생님의 분향소가 설치됐다. 지난 8월, 37년 만에 공개된 선생의 유골은 그동안 의혹이 끊이지 않던 선생의 죽음이 유신정권에 의한 타살이었음을 명백히 했다. 참으로 극적인 우연이었고,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다. 유골이 37년 동안 분해되지 않고 잔존해있었던 것도, 때마침 폭우로 묘소의 옹벽이 무너져 이장을 해야만 했던 것도, 그리고 유골이 모습을 드러낸 시기도, 모두 우연치고는 너무 극적이고 필연적이라는 느낌을 주었다. 이 모든 것이 돌아가신 선생께서 우리 민족에게 무언가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다는, 강렬한 의지가 반영된 일들이 아니었을까?

지난 28일부터 3일 동안 선생의 장례는 '겨레장'으로 치러졌다. '겨레!' 사실상 이 말 속에 선생이 평생 동안 사랑하고 추구하던 뜻이 온축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같은 시각, 이 땅 위엔 '반(反)겨레'적인 일들이 남북 및 미국 당국자들에 의해 자행되고 있었다. 너나 가릴 것 없이 이 땅 위 모든 사람들의 절멸을 초래할 수 있는 '핵 공격'이니, '선제타격'이니 하는 무시무시한 언어들이 범람하고, 핵무장이 가능한 폭격기가 한반도 상공에 뜨고, 그에 맞서 미사일이 사격대기상태에 들어가는 일촉즉발의 상황이 초래되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 남북과 미국 당국자들에게서는 현재의 이 상황을 해결하려는 지혜나 의지, 책임의식을 도무지 찾아볼 수 없다. 이 땅 위에 살아가고 있다는 죄만을 지닌 애꿎은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장준하 선생님께서 지금부터 40년 전, 7.4남북공동성명 직후 발표한 <민족주의자의 길>을 보자. 이 글은 민족주의자가 가야 할 길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으로 시작된다. 그럼 진정한 민족주의자는 누구인가? 선생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민족적인 생명과 존재와는 따로 있는 자기, 민족의 생명이 끊어진 뒤에도 살아있는 자기, 민족이 눌리고 헐벗고 있을 때 그렇지 않는 자기는 이미 자기 아닌 자기이며 그렇기에 자기의 생명을 실현하는 인간이 아닌 것이다. 이것이 민족적 양심에 살려는 사람과 그렇지 않는 사람, 자기의 삶을 사는 자와 그렇지 않는 자, 참으로 인간적인 자와 그렇지 않는 자가 살아간 길의 갈림길이었다.

즉, 자기의 주체의식을 민족과 연결시켜볼 줄 알고, 민족적 양심에 따라 인간적인 삶을 살아가는 휴머니스트가 선생이 말하는 민족주의자인 것이다. 과연 지금 이 땅 위에 살아가는 사람들을 '인간'으로 여기고, 민족적 양심에 따라 이 땅 위의 사람들과 자신을 일치시켜보는 당국자가 단 한명이라도 있는 것일까?

1953년 정전협정 이후 남북 간에 수많은 군사적 충돌과 전쟁 위기가 있었지만, 현재와 같은 극단적인 '증오의 기 싸움'은 일찍이 없었다. 더욱이 한반도에 살아가는 사람들을 절멸시켜버릴 수도 있는 핵무기의 사용이 남과 북 그리고 미국의 당국자들에 의해 거리낌 없이 운위된 적도 없었다. 진정으로 이들이 한반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존권과 인간성을 염두나 해두고 있는 것인지 의문에 의문이 꼬리를 문다. 지금 한반도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삶과 생존권을 인위적으로 박탈당할 아무 이유가 없다. 이들은 그저 하루하루 삶을 살아가는, 인간으로서 존중을 받아야 할 '사람'일 뿐이다.


우리의 어제를 돌아보자. 이명박 정권으로 대표되는 보수 정권이 한국에 집권한 이후, 남북관계는 악화일로의 길을 걸었다. 한국의 보수 세력들은 그 이전 10년간의 대북정책은 국민의 혈세를 낭비한 '대북 퍼주기'였고, 친북정책이었다며 맹렬히 비난했다. 하지만 이들은 비난만 할 줄 알았지, 한반도 분단체제와 평화정착 문제에 대한 뚜렷한 현실적 비전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저 '신앙'의 수준에 가까운 '북한 붕괴론'에 기대어 북한 정권을 향해 욕질만 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면서 동시에 안으로는 '종북 좌빨'과 같은 비이성적 언어를 통해 폭력을 일삼았다. 대선 판에서도 이런 언어를 통한 공격이 난무했다. 또 이명박 정권은 남북정상회담 역시 통일로 나아가는 민족적 대의의 차원이 아닌, 정권의 지지율을 높이고 정권의 위기를 타개하는 비즈니스 차원으로 여겼을 뿐이다. 이런 사정이 중첩되어 남북 당국 간의 신뢰는 깨지고, 심지어 무력 대결의 상황으로까지 번졌다.

한반도가 이런 상황에 빠지자 동북아시아에는 신냉전 구도가 형성되었다. 중국, 러시아, 북이 한 패가 되고, 미국, 일본, 남이 한 패가 된 구도가 그 모습을 뚜렷이 드러냈던 것이다. 과연 이것이 우리가 바라는 바이고 추구해야 할 바였던가? 한반도는 강대국에 둘러싸여 있으므로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균형추 역할을 다할 때 대외적 생존을 확보할 수 있다는 담론은 이미 해방 직후 중도파 민족주의자들도 주장한 '상식'이다.

그럼 이에 대해 장준하 선생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을까? 좀 길지만 인용해본다.

우리 민족의 지난 날, 더욱 가까이 최근세는 정말 험난의 연속이었다. 세계의 시궁창이 이리로 흘러 들어왔고, 세계의 모순, 세계사의 범죄가 이 땅을 무대로 일어났다. 산곱고 물맑은 강토에 살던 착한 우리 백성들은 홍수처럼, 악마의 불길처럼 밀려드는 이 세계사의 시궁창물에 휩쓸리지 않을 수 없었다. 세계사의 악중의 악인 제국주의가, 악마 중의 악마인 군국주의가 그 가장 표독한 잇빨을 우리 민족에 들이댔던 것이다. … 하건만 이 표독한 잇빨 앞에서도 끈질긴 항쟁이 있었다. … 이 싸우는 민중에게는 바로 민족적인 삶이 자기의 개인적인 삶이었고 국토가 뺏기는 것은 생활의 터전이 뺏기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광복은 생활의 터전과 자기의 '인간적인 삶을 되찾는 길이었다.'(강조는 필자) 이와는 달리 애국이 자기의 삶과 일치하지 않고 지식과 논리가 삶의 터전에 뿌리박지 못하고 있던 일부 지식인 지도층에서는 민족에 대한 배반도 일어났다.

여기까지는 식민지시기를 설명한 대목이다. 이 땅 위의 선량한 민중들에게 그 자체로 '범죄'인 제국주의와 군국주의는 가장 표독한 이빨을 들이댔다. 이에 민중들은 항쟁했고, 이들에게 있어 광복은 '인간적인 삶'을 되찾는 길이었다.

그러나 이는 민족배반자들에게는 해당하지 않는 것이었다. 이 글에 명시적으로 나타나 있지는 않지만, 문맥상 그렇게 볼 수 있다. 어쨌거나 민족의 주권을 되찾은 것은 이제 이 땅 위의 사람들이 '인간적인 삶'을 누릴 수 있는 조건이 만들어졌음을 의미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후의 상황은 그렇게 이어지지 못했다. 장준하 선생의 이야기를 계속 들어보자.

'우리 민족의 삶'(강조는 필자)을 다시 찾은 이 해방의 순간보다 더한 감격이 어디있겠는가? … 이 벅찬 설레임이 하나하나 실현되고 알차게 영글어갔다면 이에 비길 행복이 어디 있으랴만 세계사의 흐름은 이렇게 쉽사리 우리 민족의 앞길을 밝혀주지 않았다. 압제자 일본군국주의를 무장해제하기 위해 남북한에 나누어 진주한 외국군은 군사적 진주와 점령에 그치지 않고 이것을 정치적 진주와 점령으로 굳혀갔다. 세계사의 새로운 모순, 동서냉전 체제라는 새로운 범죄가 우리의 강토, 우리 민족의 생명 위에서 새로운 운명을 장난질 했다. 세계사의 이와 같은 새로운 모순이 우리 민족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이 새로운 외세에 의한 민족의 양분이라는 것을 분명히 깨닫지 못하고 이를 권력장악의 조건으로 이용한 일부 신생권력층에 의하여 안에서, 밖에서 강요한 양분체제에 대응하였다.

동서냉전 체제에 입각한 새로운 외세가 한반도의 양분을 강요할 때 우리 내부에는 이를 권력 장악의 조건으로 이용한 권력층이 있었다. 이로써 이 땅 위에 분단체제가 굳어졌던 것이다. 사실상 분단체제의 역사는, 강대국인 외세와 조응하며 권력 장악과 유지, 강화의 조건으로 활용해 온 상황의 연속이었다. 작금의 상황도 이러한 점에서 자유롭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러니 어찌 보면 현재 한반도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은 어느 한 쪽에만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분단체제 그 자체의 산물일 뿐이다. 그럼 이런 속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선생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전쟁에 평화보다 이긴 승자는 없다. 하물며 동족과 형제끼리 싸움에 평화보다 더 영광스러운 승리는 없다. … 분단된 민족은 역사의 실천 단위로서는 적어도 하나의 주체적 자기존재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는 없다. 둘로 나누어진 그 한쪽은 어느 쪽도 하나의 주체적 단위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는 강변은 분단의 합리화를 위한 거짓 명분일 뿐이다. … 우리 민족이 해야 할 결단은 스스로 분명해 진다. 그것은 갈라진 하나를 다시 하나의 자기로 통일하는 것이다. 아직도 남아 있는 분단의 외적 조건을 주체적으로 거부하는 것이다.

즉, 현실적으로 '평화'를 추구하되, 궁극적으로는 통일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주체적인 역사적 실천 단위로서의 자아 확보를 의미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최근 동북아시아에서 형성된 신냉전 구도는 분단의 외적 조건으로서 우리 스스로가 거부해야 하는 것이다. 이에 편승하는 세력이 있다면, 그것은 분단의 외적 조건을 활용해 권력을 유지 강화하려는 의도로 볼 수밖에 없다. 그럼 이러한 분단이 이 땅위에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에게 가져온 결과는 무엇인가?

생각해보면 지난 4반세기의 민족분단은 얼핏 말하듯 이념과 제도의 차이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민족 한 사람의 생활의 분단이자 곧 파괴요 나 자신의 분열이요 파괴였다. 남북한에 걸쳐서 민족의 정력은 모두 민족적 적대 자기파괴를 위해 고갈될 지경에 이르렀다. 이 가난과 부자유의 최대의 원인은 무엇인가. 그것은 민족분단에서 찾지 않을 수 없다. … 그러하기에 우리 민족의 양분, 무력대결은 휴전선의 튼튼한 철조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민족 또 개인 한 사람 한 사람의 모든 것의 파괴와 왜곡을 뜻한다.

그렇다. 남북의 소모적인 군비경쟁으로 부담을 떠안고 가난의 고통을 당하는 것은 남북의 주민들이다. 또 분단이 되지 않았다면, 이성적 과학의 시대, 정보화 시대, 지식경제시대라 말하는 21세기에 '종북 좌빨'과 같은 흉포한 언어가 이 땅 위에 넘쳐날 수 있을까? 분단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인권이 유린되었던가? 한반도 위에서 벌어지고 있는 가난과 부자유, 자기 파괴와 왜곡, 인간적 고통의 근원은 따지고 보면 분단체제와 연결되지 않는 것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선생은 "통일은 지배층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민중에게 절실히 요구되는 것이다"라고 호소하고 있다. 이제 선생의 글을 마지막으로 인용해본다.

…전쟁은 참혹하다. 참혹할 뿐 아니라 근본적으로 그것은 통일로 가는 가능한 수단이 아니다. 우리는 무엇으로도 보상받을 수 없는 참혹한 경험을 통해 그것을 배웠다. 전쟁은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모든 것을 잃게 만들었음을 거듭 확인해야한다. … 통일은 처음부터 끝까지 민중의 일이다. 통일은 감상적 절망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하루하루 사는 생활과 직결된 것이다. 통일없이는 가난 부자유 이 모든 현실적 고통은 결코 궁극적으로 해결되지 못함을 알고 알려야 한다. 그러므로 통일 문제는 민중 스스로가 관여하고 따지고 밀고 나가야 한다.

장준하 선생의 언급대로 '해방'은 우리에게 '인간적인 삶'을 회복할 수 있는 기회였다. 하지만 우리는 내외가 상응한 분단체제로 인해 이 기회를 박탈당했다. 그리고 지금 이러한 현실이 더욱 극단화되며 가시화되고 있다. 지금의 이 상황을 타개할 주체는 누구일까? 그리고 이 상황으로 인해 초래되는 결과는 어떤 것일까? 이 상황을 궁극적으로 극복할 수 잇는 방법은 무엇일까? 이러한 질문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를 우리는 위의 인용문에서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장준하 #민족주의자의 길 #평화 #분단체제 #통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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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공부하고 있는 시민. 사실에 충실하되, 반역적인 글쓰기. 불여세합(不與世合)을 두려워하지 않기. 부단히 읽고 쓰고 생각하기. 내 삶 속에 있는 우리 시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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