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와 번역물 놓고 의논하는 자신이 죄수 같다고?

[영원한 자유를 꿈꾼 불온시인 김수영 17] <서책>

등록 2013.04.01 13:11수정 2013.04.01 13:12
0
원고료로 응원
덮어놓은 책은 기도와 같은 것
이 책에는
신밖에는 아무도 손을 대어서는 아니된다

잠자는 책이여
누구를 향하여 앉아서도 아니된다
누구를 향하여 열려서도 아니된다


지구에 묻은 풀잎 같이
나에게 묻은 서책의 숙련(熟練)―
순결과 오점이 모두 그의 상징이 되려 할 때
신이여
당신의 책을 당신이 여시오

잠자는 책은 이미 잊어버린 책
이 다음에 이 책을 여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1955)

수영이 이봉구의 주선으로 <평화신문사>에 들어간 것은 1954년 11월 말쯤이었습니다. 이때 이봉구가 수영에게 제안한 일은 외국 잡지에서 좋은 글감을 골라 번역하는 것이었지요. 직책은 문화부 차장, 월급은 외지 번역료로 하기로 했습니다. 출근 시간도 아침 10시로 했습니다. 보통 회사원들보다는 비교적 자유롭게 일할 수 있는 조건이었지요.

수영은 처음 한 달동안 오전에 3, 4매짜리의 짧은 번역물을 만들어 넘기고, 오후에는 새 번역거리를 찾아 명동 뒷골목의 외국 서점을 뒤지는 생활을 했습니다. 처음에는 번역료가 비교적 잘 나왔습니다. 수영은 하루종일 책상머리에 붙들려 있지 않아도 되는 그 일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하지만 점점 제때 번역료를 받는 일이 드물었습니다. 급기야 두 달째까지 번역료가 나오지 않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담뱃값과 버스값 충당하기도 힘든 상황이 펼쳐졌지요. 그렇다고, 이제는 번듯한 신문사에 다니게 되었다고 반색하던 어머니에게 손을 벌릴 수도 없었습니다.


이때부터 수영은 번역거리를 찾아 잡지사들을 찾아다닙니다. 일종의 프리랜서 번역가가 된 셈이지요. 그래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번역료를 쉬이 주지 않으려는 잡지사의 편집자들은 수영과 실랑이를 벌일 때가 많았습니다. 되도록 매수를 늘리려는 수영과 깎아내려는 편집자 사이에 미묘한 신경전이 펼쳐지는 것이었지요.

수영은 그렇게 편집자와 함께 번역물을 놓고 의논을 벌이는 자신의 모습을 "재판을 받는 죄수"에 비유해 일기장에 써놓기도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번역을 위해 사놓은 책을 즐겁게 펼쳐보는 일은 대단히 어려웠겠지요. 여기서 그즈음의 일기 한 대목을 인용해보겠습니다.


책을 끼고 집으로 와서도 곧 일을 시작하는 것이 아니다. 적어도 일을 시작하기까지는 이삼 일의 시간이 경과하지 않으면 아니된다. 돈을 버는 일에 게을러야 한다는 것이 하나의 의무와 같이 생각이 드는 것이다. 책을 책상 위에 놓는 것도 불결한 일같이 생각이 되어서 일부러 선반 위의 외떨어진 곳에 격리시켜 놓고 시간이 오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전집 2> 487쪽)

수영은 그렇게 "선반 위의 외떨어진 곳에 격리"된 책을 보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이날 일기에 수영은 책을 열어 번역하는 시간이 "제일 불순한 시간", 그리하여 "세상에서 제일 욕된 시간"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 이와 반대로 번역을 하지 않는 시간은 순결하고 명예로운 시간이 되는 것이지요. 이 시에서처럼, "덮어놓은 책"(1연 1행)이 "기도와 같은 것"(1연 1행)이 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돈을 게으르게 버는 것이 나의 '의무'

수영에게는 번역을 위해 "덮어놓은 책"이 "잠자는 책"(2연 1행), 그리하여 "이미 잊어버린 책"(4연 1행)이기도 했습니다. 그 책을 그는 지금 당장 열고 싶지 않습니다. 그가 여는 순간 더럽고 욕된 시간과 세계가 펼쳐지기 때문이지요.

허나 계속 그럴 수는 없습니다. 먹고는 살아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해서이지요. 그러니 책을 열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책을 열지 않으면 안되는 수영은 자신이 부끄럽기만 합니다. "남이 돈을 벌어야 한다고 날뛰니까 나도 덩달아서 날뛰어 보는 것"(<전집> 488쪽)이긴 하지만 "서글픈 회의"(<전집> 488쪽)가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것이지요.

이 시의 마지막에서 화자가 "이 다음에 이 책을 여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5연 2, 3행)라고 말한 배경도 이런 데 있겠지요. 처절한 자기 갱신을 말하지 않으면 지금의 회의감을 떨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지금의 내가 아닌 새로운 나, 신처럼 그 모든 것을 초월할 줄 아는 전혀 다른 나가 책을 열기를 바라는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겠는지요.

일상을 살아가면서 저열하고 비굴한 자신의 모습을 보고 몸서리를 칠 때가 있습니다. 세상의 논리에 맞춰 살면서 자신의 안위만을 챙기는 대신에, 저 깊은 내면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는 단단히 귀를 막는 스스로에게 절망감을 느끼곤 하지요. 그러다가 가끔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자신의 모습을 다짐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해서 그럭저럭 이 세상 잘 살고 있노라고 자위하지요.

이 시에서 수영이 "덮어놓은 책"을 보면서 떠올린 생각도 아마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겁니다. 일상 생활이 주는 강박적 구속과 내면의 날카로운 외침 사이에서 수영은 그때까지와는 전혀 다른 새 삶의 지평을 찾으려 몸부림치고 있지 않았겠는지요. 그런 어느 날 일기에 적어놓은 "나는 협량하다"(<김수영 평전> 235쪽)라는 문장이 통렬한 자기 성찰에 따른 반어로 읽히는 까닭도 여기에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오마이뉴스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김수영 #<서책>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학교 민주주의의 불한당들>(살림터, 2017) <교사는 무엇으로 사는가>(살림터, 2016) "좋은 사람이 좋은 제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좋은 제도가 좋은 사람을 만든다." -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AD

AD

AD

인기기사

  1. 1 '징역1년·집유2년' 이재명 "이것도 현대사의 한 장면 될 것" '징역1년·집유2년' 이재명 "이것도 현대사의 한 장면 될 것"
  2. 2 의사 아빠가 죽은 딸의 심장에 집착하는 진짜 이유 의사 아빠가 죽은 딸의 심장에 집착하는 진짜 이유
  3. 3 남편 술주정도 견뎠는데, 집 물려줄 거라 믿었던 시댁의 배신 남편 술주정도 견뎠는데, 집 물려줄 거라 믿었던 시댁의 배신
  4. 4 보수논객 정규재 "이재명 1심 판결, 잘못됐다" 보수논객 정규재 "이재명 1심 판결, 잘못됐다"
  5. 5 [단독] 조은희 "명태균 만났고 안다, 영남 황태자? 하고 싶었겠지" [단독] 조은희 "명태균 만났고 안다, 영남 황태자? 하고 싶었겠지"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