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교장 부근에 군복청년이 쫙... 백범은 괜찮습니까?"

[김구 암살사건의 진상②] '운명의 날' 현장 스케치

등록 2013.04.07 21:59수정 2013.04.08 2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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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의 말
백범 김구 선생이 시해된 지 어느새 64년이 흘렀다. 그날 사건에 연루된 사람은 이제 대부분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암살범 안두희를 둘러싼 백범 시해사건 배후는 아직도 명쾌하게 규명되지 않았다. 그동안 시계 제로의 컴컴한 암흑 속에서도 암살범을 끈질기게 추적 응징하고, 그 진상을 밝히고자 고군분투한 의인들이 있었다. 이분들은 김용희·곽태영·권중희·박기서씨 등이다.

이미 고인이 된 분도 있지만 나는 기록자로서 2003년부터 곽태영·권중희·박기서씨를 만났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김구 선생 곁을 지킨 선우진 비서도. 그뿐 아니라 <오마이뉴스> 여러 누리꾼의 성원으로 4000여만 원의 성금을 모아 백범 암살배후 진상규명을 위해 2004년 1월 31일부터 그해 3월 17일까지 미 국립문서기록관리청에 40여 일간 다녀오기도 했다.

나는 다큐 작가·시민기자로서 붓을 들고 백범 김구 암살자와 추적자를 더듬은 지 10주년을 맞아 지난 3월 20일에 <백범 김구 암살자와 추적자>라는 이름으로 책을 펴냈다. 나는 그때 성금을 보내준 <오마이뉴스> 1000여 누리꾼과 성원을 해주신 올드팬에게 은혜를 보답하고자 그 일부를 연재한다.

 만년의 백범 김구 선생
만년의 백범 김구 선생백범기념관

Kim Koo was known to every poor farmer in every little Korean hamlet to an extent rivaled by few other leader―perhaps not even President Rhee, against whom he was probably the only non-communist with sufficient popular strength to lead a successful opposition.

김구는 한국의 작은 마을에 사는 가난한 농부들에게까지도 잘 알려진 인물로 그와 필적할 만한 지도자가 거의 없었다. 심지어 이승만 대통령도. 김구는 공산주의자가 아닌 지도자 가운데 유일하게 야당 세력을 이끌 만큼 대중적 지지를 받는 인물일 것이다.

- 미 육군 정보문서(Army Intelligence Documents) 1949년 7월 11일 치 전문 427호(문서번호 895.00/7-1149)

박복한 김구의 혈육들

사건 전날인 1949년 6월 25일 밤, 김구는 이상하게도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날 경찰의 방해만 없었더라면 김구는 그 시간 공주의 건국실천원양성소 10기 개교식에 참석한 뒤 공주 마곡사 선방에서 잠을 청하고 있었을 것이다. 새 나라를 건설하려면 무엇보다 인재가 필요한데 우남이 그걸 방해하다니... 김구는 생각할수록 분노가 치밀었다. 김구는 그날의 일들을 되새겼다.

그날 아침 이병찬씨 등 몇몇 측근들이 경교장으로 찾아왔다. 그들은 김구의 울적한 마음을 헤아리고는 한강에 뱃놀이를 가자고 제의했다. 김구는 마음에 내키지 않았지만 그들 정성이 가상해 따라나섰다. 마포나루에 이르러 한강의 푸른 강물을 바라보자 김구는 출발 전과는 달리 마음이 한결 밝아졌다.

그동안 세파에 찌든 마음이 한순간에 달아났다. 문득 어린 시절 서당에서 배운 <논어>의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하고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한다(仁者樂山 知者樂水)'라는 글귀가 떠올랐다. 물은 부드러우면서도 장애물을 만나면 이리저리 잘도 피하면서 목적지로 흘러가지 않는가. 그와 동시에 그즈음 우남에 대해 섭섭한 마음을 지녔던 자신이 부끄러웠다.


마포나루에서 돛단배를 타고 바라보는 조국 강산은 볼수록 아름다웠다. 그런데 이 아름다운 금수강산이 미·소 두 강대국의 농간 때문에 두 조각으로 분단됐다는 생각이 미치자 김구는 눈앞이 캄캄하고 두 귀가 먹먹했다.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이 모두 내 나라 내 땅인데도 백성들이 마음대로 오갈 수 없다는 생각을 하면 창자가 찢어지 듯 아팠다. 도대체 이 땅의 임자는 누구란 말인가.

어찌 이 원한의 38선을 분단선이 아닌, 한낱 위도상의 38선으로 돌려놔야 하나. 김구는 다시금 끓어오는 분노와 이런저런 시름을 잊고자 측근들과 함께 돛단배 위에서 도시락도 먹고 오랜만에 소주잔도 기울이며 측근들의 창과 노래에 추임새를 넣으며 흥에 젖기도 했다.


그날 측근들과 뱃놀이 화제는 주로 중국의 쑨원(孫文)과 서태후(西太后)의 무덤 이야기였다. 무덤 이야기로 김구는 먼저 세상을 떠난 아내와 어머니 그리고 장남 인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 순간 김구는 속으로 눈물을 흘렸다.

'박복한 사람들...'

 김구 아내 최준례 묘비를 둘러싼 가족들(왼쪽부터 아들 신, 김구, 어머니 곽낙원, 아들 인) 상해 숭산로 경찰서 후면 공동묘지에서. 한글학자 김두봉이 한글로 묘비명을 썼다.
김구 아내 최준례 묘비를 둘러싼 가족들(왼쪽부터 아들 신, 김구, 어머니 곽낙원, 아들 인) 상해 숭산로 경찰서 후면 공동묘지에서. 한글학자 김두봉이 한글로 묘비명을 썼다.백범기년관
당신 옥바라지를 위해 국내에서는 남의 집 부엌데기도 마다하지 않았고, 상해 시절은 밤이면 임시정부가 있었던 마당로 뒷골목 쓰레기 더미에서 채소를 주워다가 김치를 담그거나 우거짓국을 마련하신 어머니...

그 어머니는 일자 무식꾼이지만 서대문 감옥에 갇힌 죄수복을 입은 아들을 바라보며 "나는 자네가 경기감사가 된 것보다 더 기쁘게 생각하네"라고 용기를 주셨다. 그 한 말씀으로 김구는 모든 고난을 이길 수 있었다.

아내 최준례는 늘 별거를 하다가 상해로 온 지 얼마 안 돼 둘째 신을 낳은 뒤 낙상 후유증으로 폐렴을 얻어 상해 홍구 폐병원에 격리 입원 중 사망했다.

그곳은 일본 조계지이기에 김구는 아내가 위독하다는 기별을 받고도 끝내 임종을 지켜보지 못했다. 아내는 남편을 얼마나 보고 싶어 했을까.

장남 인(仁)마저도 광복 5개월을 앞두고 중경에서 광복군으로 항일투쟁 중 폐병을 얻어 먼저 세상을 떠났다. 부모는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고 하는데 김구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 밤 따라 김구는 먼저 떠난 가족들을 그리며 자정 무렵에야 간신히 잠에 들었다.

운명의 날

 백범 김구 국민장 장례 행렬(1949. 7. 5. 한국은행 앞 서울 남대문로). 2004. 2.  27.'Kimkoo Research Team'의 재미동포 주태상 씨가 NARA 2층 문서상자에서 발굴한 사진이다.
백범 김구 국민장 장례 행렬(1949. 7. 5. 한국은행 앞 서울 남대문로). 2004. 2. 27.'Kimkoo Research Team'의 재미동포 주태상 씨가 NARA 2층 문서상자에서 발굴한 사진이다.NARA

김구에게는 운명의 날인 1949년 6월 26일 동이 텄다. 화창한 초여름 6월의 마지막 일요일이었다. 김구는 예삿날보다 일찍 잠에서 깼다. 아들 신이 이른 아침 옹진으로 출전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들은 아버지가 간밤 늦게 잠자리에 든 것을 알고 더 주무시게 하고자 일부러 아침 문안인사를 드리지 않았다. 하지만 김구는 일찍 일어나 거실에서 묵묵히 아들의 출근을 지켜보고 있었다.

예삿날과는 달리 김신은 정문 경호 순경에게 찾아가 그날부터 출입자 단속을 철저히 하라고 이르고는 마당에서 2층 아버지 거실을 바라봤다. 그때 김구는 거실 창을 열고 전선으로 떠나는 아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잘 다녀온."
"네, 아버님."

김신도 아버지에게 손을 흔든 뒤 그의 지프차에 올랐다. 김구는 아들이 떠나자 곧 책상에 앉아 아침 기도를 올렸다. 여느 때처럼 나라의 태평을 먼저 기도한 뒤, 이날은 특별히 아들의 무운장구를 빌었다. 기도가 끝나자 예삿날처럼 거실 책상에 앉아 막 배달된 아침신문을 읽은 뒤 뜰로 나와 꽃밭에 물을 줬다.

그날이 일요일이라 김구는 아침진지를 드신 뒤 예사 주일날처럼 남대문교회에 가고자 채비를 차렸다. 그런데 선우진 비서는 조금 전에 며느리가 승용차를 타고 외출했다고 전했다. 그제야 김구는 간밤에 아들이 당분간 교회 가는 일 등 바깥나들이를 삼가란 말이 떠올랐다.

김구는 이제 자식의 말도 들어야겠다고 교회 가는 일을 단념하고, 2층 거실 책상에 앉아 먹을 간 뒤 줄곧 붓글씨를 썼다. 문득 창암학원 운영이 궁금하여 선우진 비서를 불렀다. 아래층의 선우진이 2층 집무실로 재빨리 올라왔다.

"부르셨습니까?"
"자네 이국태군에게 일러 창암학원 김 선생 별일이 없다면 좀 모셔 오라고 이르게."
"네, 선생님."

그즈음 김구는 심기가 다소 불편했다. 당신이 세운 마포구 염리동의 창암학원과 성동구 금호동의 백범학교가 극심한 경영난을 겪고 있는 데 그 원인이 있었다. 김구는 어머니 곽낙원 여사 유해봉안 때 들어온 조의금과 아들 김신의 결혼축의금으로 두 학교를 세웠다. 이들 학교는 주로 가난한 학생들을 가르쳤다. 하지만 개원 개교 이후 제때에 재정지원을 하지 못해 가슴이 몹시 아렸다.

김구는 창암학원 김 선생을 기다리면서 계속 붓글씨를 썼다. 그런데 이날따라 글씨가 잘 써지지 않았다. 아마도 전날 불편했던 심기가 그때까지 마음에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창암학원 김 선생

김구가 2층 집무실 책상에서 글씨를 쓰고 있는데 이국태 비서가 창암학원 김 선생을 모시고 왔다. 그때가 오전 11시쯤이었다. 김구는 붓을 벼루 위에 놓은 뒤 김 선생을 반겨 맞았다. 창암학원 김 선생은 김구 앞에서 큰절을 드렸다.

"백범 선생님! 부디 만수무강하옵소서."
"어서 오세요. 김 선생님!"

김구도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 숙여 답례를 했다.

"백범 선생님, 지난번에는 풍금을 사서 친히 삯군에게 지어 저희 학원까지 왕림해 주시고, 또 학생들에게 귀한 말씀까지 들려주셔서 뭐라고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백골난망입니다."
"아니올시다. 내가 앞뒤 깊은 헤아림도 없이 창암학원을 불쑥 세워 놓고 운영비를 제대로 지원하지 못해 여러 선생님께 볼 낯이 없습니다."

"이즈음에는 경교장 살림도 어렵다고 듣고 있습니다."
"설마 내가 굶기야 하겠습니까. 무슨 일이 있더라도 창암학원이 문 닫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내 곧 융통되는 대로 다소나마 보내드리지요."

"네, 고맙습니다. 저희 선생님들은 헌신적으로 학생들을 잘 가르치고 있습니다."
"참으로 고맙습니다. 조금만 더 참고 기다려 봅시다. 옛말에 '유지필성(有志必成)'이라 하여 뜻이 있으면 반드시 이룬다고 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가장 시급한 일은 교육입니다. 돌아가시면 어려운 가운데도 학생들을 열심히 가르치시는 여러 선생님께 감사하다는 말씀을 꼭 전해 주십시오."

"네, 선생님. 말씀 꼭 전하겠습니다. 선생님! 창암학원이 결코 문 닫는 일은 없을 겁니다. 선생님의 높고 자애로운 뜻을 어찌 하늘이 돕지 않겠습니까?"

김구는 그 말에 더욱 가슴이 멨다. 그즈음(방북 이후) 경교장을 후원하는 이도 훌쩍 줄어들었다. 김구는 새삼 염량세태를 실감했다.

불청객

그 시간 아래층 대기실(비서실)에는 일요일임에도 선우진·이국태·이풍식 등 세 비서가 일을 보고 있었다. 오전 11시 30분 무렵 경교장 정문에 육군 장교 정복차림의 한 군인이 성큼 다가섰다. 그는 육군 포병소위 안두희로 허리에는 미제 45구경 권총띠를 차고 있었다.

"내레 안두희야요. 두석(주석) 선생님을 뵈오레(뵙고자) 왔습네다."
"들어오십시오."

그날 아침 경호순경은 김신에게 거동 수상자와 낯선 사람은 출입시키지 말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런데 안두희는 그 전에도 김학규 한독당 조직부장과 같이 여러 번 출입해 얼굴도 이름도 익은 데다가 육군 정복차림인지라 별다른 의심을 하지 않고 통과시켰다. 안두희는 경교장 1층 대기실 문을 열고 들어서며 비서들에게 넉살 좋게 인사를 늘어놨다.

"안녕들 하십네까?"
"누구시지요?"

 백범 비서 선우진 선생.
백범 비서 선우진 선생.박도
선우진이 안두희를 얼른 알아보지 못했다.

"내레 안두희입네다. 와 일전에 다녀갓디요."
"그랬던가요. 원체 선생님을 뵙고자 찾아오는 분이 많아서..."

그때 옆자리 이풍식 비서가 안두희를 얼른 알아보았다.

"지난번에 오셨지요?"
"기럼, 와 얼마 전에 김학규 장군이랑 항께(함께) 왔디요."

이풍식 비서는 그때 안두희가 포탄껍질로 만든 꽃병을 가져온 것을 선우진 비서에게 상기시켰다.

"아, 네. 이제야 알겠습니다."

선우진 비서도 그제야 생각났다.

"두석(주석) 선생님께 안부 여쭐라고 왔습네다."
"지금 손님과 담소 중입니다. 여기서 조금만 기다리십시오."
"기러디요."

선우진 비서는 안두희를 비서실 빈 의자로 안내했다. 안두희가 의자에 막 앉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이풍식 비서가 받았다.

"거기 무슨 일이 있소?"

백범 측근 김덕은씨한테서 온 전화였다.

"무슨 일이라뇨?"

이 비서가 다소 놀라며 받았다.

"조금 전 내 친구가 그러는데, 지금 경교장 부근에 정체불명의 군복청년들과 헌병들이 쫙 깔려 서성거리고 있대요. 혹 선생님 신변에..."

(다음 회에 계속)
덧붙이는 글 <백범 김구 암살자와 추적자>(박도 씀 | 눈빛출판사 | 2013.03. | 1만3000원)
#김구 #암살 #안두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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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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