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이 보이지 않는 숲과 베를린의 서빙고

[베를린 장벽길 160km를 걷다 9] 슈판다우 숲과 아이스켈러

등록 2013.04.12 09:48수정 2013.04.12 0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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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판다우 숲

픽히텐비제와 에어렌그룬트를 지나면 하펠강과 잠시 이별하게 된다. 이제는 슈판다우(Spandau)와 브란덴부르크 주 경계를 따라 계속 이동하게 된다. 이 경계는 지도로 볼 때는 금방 걸어갈 수 있지만 예상보다 시간이 많이 걸리는데다가 비슷해 보이는 길이 많아서 장벽길 표지를 놓치게 되면 잃어버리기 쉬운 곳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이 경계지역의 숲길을 걸으면 특별히 주목할 수 있는 곳이 없다. 마치 미로를 빠져 나오는 기분이라고 할까. 또한 주변에는 마을도 없기 때문에 기나긴 숲을 지나가려면 어느 정도 준비를 하고 다녀야 한다.


이곳을 지나면서 사실 애로사항이 있었는데, 바로 공중화장실이 없다는 점이었다. 중간 지점까지 급한 소변을 어느 정도 참을 수 있었지만 더 이상을 힘들다고 생각했다. 마침 인기척이 없는지라 숲 속에서 몰래 용변을 해결할 수 있었고, 다행히 사람들은 지나가지 않았다. 주변에 마을이 없어서 지난 번 바님 국립공원과는 달리 숲 속에서 사람들을 만나지 못했다. 지금은 오후 4시. 아직은 여유가 있지만 어두워지기 전에 큰 길을 찾아 얼른 이 곳을 빠져나가야겠다는 생각만 들었다.

a 슈판다우 숲 이러한 길들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사실 걷는 동안 용변을 해결하려, 숲이 우거지고 인적이 드문 곳을 찾았었다.

슈판다우 숲 이러한 길들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사실 걷는 동안 용변을 해결하려, 숲이 우거지고 인적이 드문 곳을 찾았었다. ⓒ 최서우


a 슈판다우 숲길 이렇게 초원길도 있지만 사실 삼림에 둘러싸여 있다.

슈판다우 숲길 이렇게 초원길도 있지만 사실 삼림에 둘러싸여 있다. ⓒ 최서우


반복되는 숲길을 걷다가 특이한 망루 하나를 발견하였다. 앞은 나무로 가려져 있어서 볼 수가 없었는데, 호기심을 누르지 못하고 망루 위에 올랐다. 망루에 올라가보니 호수가 보였다. 물론 하펠강가에서 보았던 호수와 비교해보면 상당히 작았지만, 자줏빛 석양 아래 놓여있어서 그런지 아름다워 보였다. 이전에 여행하면서 나름대로 배운 사진 기술로 멋있게 찍어보려고 했다.

a 숲길의 지루함을 달래주는 망루 호기심에 한 번 올라가 봤다.

숲길의 지루함을 달래주는 망루 호기심에 한 번 올라가 봤다. ⓒ 최서우


a 석양아래의 호수 광경이 멋있어서, 이 느낌을 사진으로 담아보려 했다.

석양아래의 호수 광경이 멋있어서, 이 느낌을 사진으로 담아보려 했다. ⓒ 최서우


이제는 오후 6시. 아직은 여름인지라 해는 지지 않았다. 베를린은 서머타임을 적용하기 때문에 여름에는 해가 길다. 특히 하지를 전후로 해서는 오후 10시가 넘어도 날이 밝다. 가끔 시계를 안보고 물건을 사러가는 경우도 있는데, 이미 오후 7시에 업무가 끝나 문을 닫은 상태인 경우도 가끔 있었다. 친구들과 시간 개념없이 해질 때까지 공원에서 놀다가 들어오면 오후 11시인 경우도 여러번 있었다. 그래서 가끔 할 일을 다음날로 미룬 적도 있었다.

기나긴 숲 속을 걸어간 끝에, 오랜만에 마을을 볼 수 있었다. 이 마을의 이름은 쇤발데지들룽(Schönwalde Siedlung). 직역하면 '아름다운 숲 속의 주거지'라는 의미인데, 이곳 지형을 본따서 지은 이름인 것 같았다. 마을 게시판을 보면 자전거길 지도가 눈에 띄는데, 이 주변 근처의 자전거도로를 나타낸 것 같았다. 베를린 외곽지역을 지나다 보면, 여기처럼 자전거 도로 지도를 흔하게 볼 수 있는데, 자전거 마니아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이정표다. 자전거가 있으면, 자전거를 타고 이곳에 산책하는 것도 나름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a 자전거도로 안내판 베를린 교외지역에는 친구들과 같이 즐길 수 있는 생태자전거도로가 잘 구비되어있다.

자전거도로 안내판 베를린 교외지역에는 친구들과 같이 즐길 수 있는 생태자전거도로가 잘 구비되어있다. ⓒ 최서우


이제 해가 저문다. 목적지까지 가려면 이제 2시간 정도 남았는데 고민되었다. 강행할까 아니면 여기서 멈추고 기차를 타고 돌아갈까? 지도를 보고 고민 끝에 강행하기로 결론을 냈다. 왜냐하면 1~2시간 정도 가면, 주거지역이 나온다고 표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스켈러(Eiskeller)

마을을 지나면 초원길과 숲길이 아까처럼 계속 반복된다. 숲길이 언제쯤 끝날까라고 생각할 찰나에 장벽길에서 봐왔던 주황색 표지가 다시 눈에 띄었다. 이 지역의 이름은 아이스켈러(Eiskeller). 지명을 우리식으로 번역한다면 빙고(氷庫), 즉 얼음을 보관하는 곳간이다.


실제로 옛날에 이곳엔 맥주양조장이 있었는데 맥주를 제조하려면 필요했던 것이 얼음이었던 모양이다. 왜 얼음을 필요했는지는 맥주전문가가 아니라서 잘 모르겠지만, 여기 근처에는 팔켄하겐 호수(Falkenhagener See)라고 있는데 필자가 걸어온 슈판다우 숲으로 둘러싸여 있어 겨울에 쉽게 잘 언다. 당시 옛 맥주양조장은 겨울에 이 호수에서 얼음을 조달한 다음 창고에 보관했다고 해서, 현재 지명도 이렇게 이어져오고 있다.

그러면 왜 이곳도 장벽과 연관되어 있을까? 이 지역은 브란덴부르크에 둘러싸인 베를린에서 약간 떨어진 월경지였다. 지난 번 지나왔던 픽히텐비제와 에어렌그룬트와 비슷한 사례라고 볼 수 있는데, 조금 다른 것은 완전히 막힌 지역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아이스켈러 주민들을 서베를린에 연결하기 위해 슈판다우 숲으로 통하는 통로를 장벽시대 이전부터 개통했는데, 당시 장벽은 이 통로을 제외하고 아이스켈러를 완전히 둘러쌌었다. 흥미로운 사진이 하나 있는데, 한 아이가 자전거를 타고 등교할 때 영국제 험버 장갑차(Humber Armoured Car)가 뒤에서 엄호하는 광경을 볼 수 있다. 아무래도 이곳에 주둔한 영국 군인들은 마치 민통선 내부를 지키고 있는 우리나라 수색대대와 비슷한 역할을 했다고 할까나. (사실 슈판다우 지역은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시 영국의 점령지였다.)

집이 아직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아직 일부 주민들이 이곳에 거주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 부분에 대한 기사를 추후에 읽을 수 있었는데, 장벽시대 당시에는 7가구 20여명이 살고 있었고, 현재는 3가구만이 남아있다. 비록 이전보다 인구가 줄긴 했지만, 이곳에 남아 있는 주민들은 장벽시대 아이스켈러의 역사를 직접 경험했던 사람들이다.)

a 현재의 아이스켈러 아직 3가구 정도 거주하고 있다. 주거지역 주변은 모두 천연기념물(Naturdenkmal) 지역이다.

현재의 아이스켈러 아직 3가구 정도 거주하고 있다. 주거지역 주변은 모두 천연기념물(Naturdenkmal) 지역이다. ⓒ 최서우


a 장벽시대 당시 아이스켈러의 사진들 중간 아래의 사진을 보면 자전거로 등교하는 아이를 엄호하는 영국 험버 장갑차를 볼 수 있다.

장벽시대 당시 아이스켈러의 사진들 중간 아래의 사진을 보면 자전거로 등교하는 아이를 엄호하는 영국 험버 장갑차를 볼 수 있다. ⓒ 최서우


아이스켈러 주위를 빙 돌면 숲 대신에 울타리들이 있는 초원을 볼 수 있다. 또 일부 울타리 안에는 승마경기장과 비슷한 분위기인데, 아무래도 말을 사육하는 곳인 것 같았다. 장벽길을 걷다보면 말사육장과 승마연습장을 흔히 볼 수 있는데, 독일이 승마에서 올림픽 메달을 많이 획득하는 이유가 바로 이러한 기초시설을 잘 구비해서 그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올림픽을 20년에 걸쳐 참가하면서 5-6개의 금메달을 획득한 전설의 독일 선수들도 있는데, 라이너 클림케(Reiner Klimke), 이사벨 베어트(Isabell Werth), 한스 퀸터 빈클러(Hans Günter Winkler)가 이에 해당된다. 런던 올림픽 때 우리나라의 효자 종목인 양궁을 독일 TV에서 직접 보기는 쉽지 않았다(사실 인터넷으로 간신히 봤다). 대신 승마나 조정경기는 독일에게 효자종목이기에 독일TV 올림픽 중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단골 메뉴다.

a 승마연습장 베를린 장벽길과 교회지역에서는 승마연습장과 말 사육장을 흔히 볼 수 있다. 일부 장벽길의 경우 말도 통행이 가능하다.

승마연습장 베를린 장벽길과 교회지역에서는 승마연습장과 말 사육장을 흔히 볼 수 있다. 일부 장벽길의 경우 말도 통행이 가능하다. ⓒ 최서우


말 사육장을 지나 어느 정도 걸어가보니 건너편으로 아파트와 베를린의 노란버스가 보이기 시작했다. 날이 어두워진 관계로 여기서 이만 여정을 접고, 며칠 후에 다시 남쪽으로 향하기로 계획을 잡았다.
#베를린장벽길 #베를린 #장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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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시민기자입니다. 독일에서 통신원 생활하고, 필리핀, 요르단에서 지내다 현재는 부산에서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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