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도 <고기잡이(어살)>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여하간 이런 방법으로 고기를 얼마나 잡을 수 있을까? 궁금해 할 사람도 있을 것 같다. 책에 의하면 잘 잡히는 곳에선 한 번에 무명 500필에 해당할 정도의 물고기가 잡혔다는 공식적인 기록(세종실록 22년)이 있다. 여러 사람이 함께 나눌 이익이겠지만 조선시대 백성들에게 무명 500필은 대단한 수입이랄 수 있다.
그런데 이처럼 돈벌이가 괜찮다보니 많은 사람들이 눈독을 들이게 된다. 사실 아무나 말뚝을 북북 박아 고기를 잡을 수 있을 것 같지만, 아무나 설치하지 못했다. 땅 한 평 없어도 얼마든지 밥벌이를 할 수 있는 오늘날과 달리 노력만으로는 쉽게 돈을 벌 수 없었던 조선시대 백성들의 생계를 위한 호구지책으로 정해놨기 때문이었다.
'여러 도의 어살과 염분(鹽盆, 소금 굽는 가마)은 등급을 나누어 장부를 만들어서 호조와 각 도, 각 고을에 보관한다. 장부에 누락시킨 자는 장(杖) 80대에 처하고 그 이득은 관에서 몰수한다(어전을 사사로이 점유한 자도 같다). 어전은 가난한 백성에게 주되 3년이 되면 교체한다(<경국대전> 호전 어염조)'라고 말이다.
그러나 법은 있으나마나, 땅 한뙈기조차 가지지 못해 굶기 일쑤인 백성들을 위해 나라가 베푼 이 어살을 노리는 사람들이 많아지게 된다. 그것도 가질 만큼 가져 밥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부자나 권세가들이. 제멋대로 어살을 설치해 이익을 챙기거나, 평민이라 속여 이익을 취하는 무리들까지 생겨나게 된다.
그리하여 성종 1년에 호조판서 구치관이 "어살은 본래 관청과 백성에게 주어서 진상에 대비하게 하고, 또 먹고 사는 방도로 삼게 했는데, 지금 종친과 권세가에서 제멋대로 만들어 관청과 백성의 이익을 빼앗고 있습니다. 법에도 어긋나니 청컨대 금지하소서"라는 보고까지 하게 된다.
이런 보고가 있을 때마다 국왕은 흔쾌히 받아들여 혁파를 시도하지만 백성은 무지하고 법은 멀리 있으니 근처 사는 부자나 권세가들은 끊임없이 이 '황금어장'을 노렸습니다. 이것은 관리들도 마찬가지라서 위에 나온 것처럼 부당한 폐단을 고치라는 소리도 하지만 성종 13년 훈부 당상 노사신과 윤계점은 "묵은 병이 있는 공신이 많은데 약재의 수량이 적어, 모두에게 두루 주기 힘듭니다. 그러니 제도의 어살을 하사하여 부족한 수량을 보태게 하소서"라고 합니다.공신의 병을 치료하는 비용을 여기서 뽑게 해달라는 말인데 뻔뻔하기 그지없죠. 그러나 성종은 "어살은 마땅히 가난한 백성에게 주는 것인데 재상이 어찌 구해서 얻으려 하는가!"라며 거절합니다. 요즘에도 '퇴직 국회의원'에게 '국민의 세금'으로 '종신 연금'을 주자는 법안을 통과시키는데, 요즘에는 성종 같은 임금은 없어서인지 무사통과되더군요. 그래도 양심 있는 관리도 많아서 실록의 기사에 사신의 논평이 달립니다. - <조선의 속사정>에서수입이 꽤 괜찮았나보다. 이 어살을 두고 밀고 당기는 싸움(?)이 계속된 것을 보면. 이 오랜 싸움을 한방에 박살낸 것은 연산군이다. 연산군은 수입이 좋은 어살을 총애하는 후궁이나 마음에 드는 신하에게 마구 나눠줬다. 그런데 반정으로 왕이 된 중종마저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변명까지 하면서 종친들과 왕자들에게 어살을 나눠준다.
그리하여 어살은 이때부터 '법으로는 가난한 백성들의 몫으로 되어 있지만 특별한 계층에게 하사하는 주요 소득원'이 되고 만다. 영조가 재위 26년에 궁가에 퍼져있던 어살을 모두 거둬 균역청으로 소속시킨 후 일부는 세원으로 쓰고 일부는 백성들에게 돌려줄 때까지 몇 백 년 동안 말이다.
참고로 효종실록 6년 11월에 '부안현(지금의 전북 부안) 소재 20개의 어살 중 왕자 소유가 11곳, 성균관 소유가 8곳, 부안군 소유가 1곳인데, 백성들의 유일한 몫인 부안현 소유마저 숙경공주(1648(인조 26)~1671(현종 12)) 집안에 빼앗겼다'고 전라감사 정지화가 보고한 것이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나머지 지역의 어살들이라고 별 수 있을까 싶다.
'어살' 이야기를 읽으며 오늘날 대기업을 떠올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