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둑이 물은 한 마디 "어디로 나가는 겁니까?"

[영원한 자유를 꿈꾼 불온시인 김수영 32] <폭포>

등록 2013.05.20 15:21수정 2013.05.20 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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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포는 곧은 절벽을 무서운 기색도 없이 떨어진다.
규정할 수 없는 물결이
무엇을 향하여 떨어진다는 의미도 없이
계절과 주야를 가리지 않고
고매한 정신처럼 쉴 사이 없이 떨어진다

금잔화도 인가도 보이지 않는 밤이 되면
폭포는 곧은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곧은 소리는 소리이다
곧은 소리는 곧은
소리를 부른다

번개와 같이 떨어지는 물방울은
취할 순간조차 마음에 주지 않고
나타(懶惰; 나태의 뜻-기자 주)와 안정을 뒤집어놓은 듯이
높이도 폭도 없이
떨어진다

(1957)

이 시에 딸린 시작(詩作) 노트 한 구절을 보겠습니다.


"살아가기 어려운 세월들이 부닥쳐올 때마다 나는 피곤과 권태에 지쳐서 허수룩한 술집이나 기웃거렸다.
거기서 나눈 우정이며 현대의 정서며 그런 것들이 후일의 나의 노트에 담겨져 시가 되었다고 한다면 나의 시는 너무나 불우한 메타포의 단편들에 불과하다.
우리에게 있어서 정말 그리운 건 평화이고 온 세계의 하늘과 항구마다 평화의 나팔소리가 빛나올 날을 가슴 졸이며 기다리는 우리들의 오늘과 내일을 위하여 시는 과연 얼마만한 믿음과 힘을 돋구어 줄 것인가. (<김수영 전집 2> '산문' 286쪽)


"피곤과 권태에 지쳐서 허수룩한 술집이나 기웃거"린 수영에게 이 시 <폭포>가 스스로를 향한 질타의 노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수영은 1965년에 <연극하다가 시로 전향>이라는 산문을 씁니다. 그 글에서 수영은 이 작품을 "나타(懶惰)와 안정을 배격한 시"로 규정합니다. 그는 이 시를 1956년에 쓴 <병풍>과 더불어 자신의 진정한 현대시의 출발을 알리는 작품으로 평가하기도 합니다.

수영은 예의 산문에서 당시 번역하고 있던 한 글을 인용합니다. 미국 비평가 라이오넬 트릴링이 쓴 <쾌락의 운명>이라는 논문이 그것입니다. 수영의 분석을 빌려 보자면, 트릴링은 쾌락의 부르조아적인 원칙을 배격하고 고통과 불쾌와 죽음을 현대성을 자각하는 요인으로 들고 있습니다. 풍유로운 일상 속의 쾌락이 아니라 고통과 불쾌와 죽음을 문학의 현대성을 보증하는 표지로 본 것이지요.

트릴링이나 수영이 한 말들이 어려워 보입니다. 하지만 조금만 깊이 생각하면 그 속뜻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질문을 던져 보겠습니다. 진실한 문학, 그래서 우리를 감동하게 하는 문학은 어떤 조건에서 만들어질까요. 욕망을 충족하여 기쁨이 흘러 넘치는 곳에서일까요, 아니면 무언가 부족하여 고통과 불쾌가 어른거리는 곳에서일까요.

트릴링은, 그리고 수영은 후자를 선택한 것 같습니다. 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욕망이 좌절될 때, 그리하여 마음속에 결핍감을 느낄 때라야 그 결핍된 무언가를 향해 간절한 마음을 갖게 됩니다. 충족이 주는 즐거움 상태에서는 결코 느낄 수 없는 절실한 마음이 생겨나는 것이지요. 모름지기 문학은 결핍과 불평을 먹고 자란다는 것!


이 시에서 '폭포'는 그런 절실함을 향한 수영의 몸부림을 상징합니다. 그것은 일상의 게으름과 안정을 없애려는 수영의 싸움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시작 노트에서 보이는 자기 비판의 메시지가 그 직접적인 증거입니다. 수영은 그 자신을 향한 채찍질을 결코 멈추지 않았습니다. "고매한 정신"(2연 4행)과 "곧은 소리"(3연 1행)를 내며 "번개와 같이 떨어지는 물방울"(5연 1행)처럼 세상에 가 부딪치려고 했습니다.

이러한 자기 비판은 수영이 생각하는, 시인이 감당해야 할 사회적 책무와 관련됩니다. 시작 노트에서도 말하고 있는 것처럼, 그즈음 수영은 온 세상의 평화를 간절하게 원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위해서 그는 시가, 그리고 시인이 해야 하는 일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했습니다.


언젠가 수영의 양계장에 도둑이 든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수영이 도둑과 대화를 나누게 되는 상황이 펼쳐집니다. 먼저 수영이 도둑에게 쑥스러운(?) 질문을 던집니다.

"집이 어디요?"
"우이동입니다."
"우이동 사는 사람이 왜 이리로 왔소?"
"모릅니다. 여기서 좀 잘 수가 없나요?"
이 말을 듣고 어처구니가 없어진 수영이 꽥 소리를 지릅니다.
"여보, 술 취한 척하지 말고 어서 가시오."
그러자 도둑은 발길을 돌이켜 두서너 걸음을 걸어 나나가다 수영을 향해 뒤돌아보며 묻습니다.
"어디로 나가는 겁니까?"

"어디로 나가는 겁니까?" 나는 도둑의 이 말이 무슨 상징적인 의미 같이 생각되어서 아직까지도 귀에 선하고, 기가 막히고도 우스운 생각이 듭니다. 도둑은 철조망을 넘어왔던 것입니다. "어디로 나가는 겁니까?" 이 말은 사람이 보지 않을 제는 거리낌없이 넘어왔지만 사람이 보는 앞에서 다시 넘어나가기는 겸연쩍다는 말이었을 것입니다. 구태여 갖다붙이자면 내가 양계를 집어치우지 못하는 이유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장면을 바꾸어 생각한다면, 도둑은 나고 나는 만용이(담양에서 올라온, 수영네의 양계 일을 돕던 머슴의 이름. 수영의 도움으로 대학에도 진학하는 등 한가족처럼 지낸다.)입니다. 철조망을 넘어온 나는 만용이에게 "백번 죽여주십쇼. 백번 죽여주십쇼." 하고 노상 손이 발이 되도록 빌면서 "어디로 나가는 겁니까? 어디로 나가는 겁니까" 하고 떼를 쓰고 있는지도 모릅니다.(<김수영 전집 2> '산문' 46쪽)

수영은 술이라도 한 잔 거하게 마시고 온 날이면 아내 현경에게 "시를 쓰는 일은 바로 인류를 위한 일이야. 나는 인류를 위해 시를 쓴다"라는 말을 자주 했습니다. 위의 "도둑은 나"와 같은 구절의 속뜻도 이 말과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봅니다. 이 시 <폭포>를 읽으면서, 나는 세상의 '도둑'이 되지 않기 위해 몸부림친 수영을 떠올립니다. "금잔화도 인가도 보이지 않는 밤"과 같은 어두운 현실을 평화가 넘치는 밝은 세상으로 만들기 위해 기꺼이 자신의 온몸을 내던지려고 했던 수영의 간절한 마음을 상상해 봅니다.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오마이뉴스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김수영 #<폭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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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민주주의의 불한당들>(살림터, 2017) <교사는 무엇으로 사는가>(살림터, 2016) "좋은 사람이 좋은 제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좋은 제도가 좋은 사람을 만든다." -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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