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범죄행위 일본인 잘 몰라...교과서에서 가르쳐야"

[인터뷰] 명성황후 시해 가담 인물 찾는 가이 도시오

등록 2013.05.25 11:42수정 2013.05.25 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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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가이도시오 '명성황후를 생각하는 모임' 전 회장

가이도시오 '명성황후를 생각하는 모임' 전 회장 ⓒ 심규상

다다미방으로 들어섰다. 방안은 명성황후 연구실이다. 바닥에는 명성황후 관련 탁본 자료가 널려있다. 벽에는 '명성황후'와 일본인 이름을 새긴 자료가 붙어있다. 책상 위에도 명성황후 자료가 쌓여있다.

일본 구슈 구마모토현 아소산 기슭에 사는 가이 도시오(甲斐利雄·84)씨 집을 찾은 것은 지난 21일 저녁 무렵이다. 그는 한국인 방문객을 보고 맨발로 뛰어 나왔다. 환하게 웃으며 끌어안았다.

그를 처음 만난 때는 지난 2004년 5월이다. 그는 중학교 교사를 은퇴한 직후부터 명성황후 시해에 가담한 구마모토 지역 관련자를 찾는 일에 몰두해 있었다.

"1997년경 우연히 만난 한국인소녀가 나를 명성황후와 연결시켜 새로운 삶으로 이끌었다. 그 소녀가 명성황후 시해 사건을 처음 알려줬다. 만나고 싶지만 이름도 알지 못한다. 그때부터 명성황후에 사건에 관심을 갖게 됐다. '명성황후를 생각하는 모임'도 만들었다."

모임의 회장을 맡은 당시 그는 기자를 처음 만나 "죽는 날까지 명성황후 시해범을 추적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로부터 꼬박 9년의 시간이 흘렸다. 그동안 그는 일본과 한국을 오가며 명성황후 사건과 관련한 굵직한 성과를 남겼다.

가이씨는 명성황후 시해에 적극 가담한 한 범죄자 후손을 찾아 참배를 제안했다. 그의 제안에 가와노 다쓰미(河野龍巳)씨가 호응했다. 가와노씨는 명성황후 시해 사건을 공모하고 사건 당일 직접 왕궁을 쳐들어간 구니토모 시게아키(1861-1909)의 외손자다.

2005년 당시 84세인 가와노씨는 조부를 대신해 경기도 남양주 홍릉을 찾아 명성황후 묘소에 무릎을 꿇었다. 사죄의 절을 올렸다. 참회를 눈물을 흘렸다. 시해사건 후 110년만의 일이었다. 가와노씨의 역사 인식과 정수웅 감독(당시 다큐서울 대표)의 중재 등 역할에 기인한 것이었지만 가이씨가 없었다면 애당초 가능하지 않는 일이었다.


a  가이도시오씨의 집 방은 명성황후 시해사건 가담자에 대한 자료로 꽉 있다. 벽에 시해사건 가담자의 명단이 붙어 있다.

가이도시오씨의 집 방은 명성황후 시해사건 가담자에 대한 자료로 꽉 있다. 벽에 시해사건 가담자의 명단이 붙어 있다. ⓒ 심규상


a  가이도시오씨의 집 방은 명성황후 시해사건 가담자에 대한 자료로 꽉 있다. 벽에 시해사건 관계자 48명의 명단을 붙어 놓았다. 붉은 원안은 가이씨가 거주하고 있는 구마모토 출신(21명)을 표기한 것이다.

가이도시오씨의 집 방은 명성황후 시해사건 가담자에 대한 자료로 꽉 있다. 벽에 시해사건 관계자 48명의 명단을 붙어 놓았다. 붉은 원안은 가이씨가 거주하고 있는 구마모토 출신(21명)을 표기한 것이다. ⓒ 심규상


- 110년 만에 가와노씨와 명성황후 묘소를 찾았을 때 기억에 남는 일은?
"참배를 위해 홍릉을 찾았을 땐 마침 영친왕(고종의 여섯째 아들)의 기일을 맞아 명성황후 증손자 이충길씨와 우연히 만났다. 앞을 막았다. 가해자 후손이 묘소에 나타났기 때문이다. 순간 공기가 얼어붙었다. 팽팽한 긴장감에 모두가 초긴장했다. 그때 명성황후 후손은 '일본 정부 차원의 사과가 있어야 한다'고 말했고 가와노씨는 '일본 황실이 사과해야 한다'고 답했다.  다행히 명성황후 후손들이 가와노 선생의 진위를 알고 잘 대접해주었다."

가와노씨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외조부의 죄상을 알려왔다. 또 "개인적인 사죄로 그칠 일이 아닌 일본 정부가 나서 사죄하고 교과서에서도 다뤄야 한다고 본다"며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일본 서적'에서 만든 교과서에 유일하게 기술돼 있었는데 우경화 과정에서 삭제됐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오마이뉴스> 인터뷰를 통해 "더 사죄하기 위해 오래 살고 싶다"고 말해온 가와노씨는 지난해 향년 90세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


가이씨는 가와노씨에 대해 "많은 명성황후 시해 후손을 찾아 나섰지만 우리모임의 활동을 끝까지 지지하고 협력한 사람은 가와노 선생뿐"이었다며 "그는 역사적으로도 매우 귀중한 사람"이라고 회상했다.

"시해사건에 가담한 후손들을 만날 때마다 '과거를 들추지 말라', '협조할 수 없다'며 입을 열지 않았다. 어떤 후손은 무죄판결을 받았는데 조상의 죄상을 밝혀 죄인으로 만들려하느냐'고 항의하기도 했다. 반면 가와노씨는 자신의 손자에게 까지 '대를 이어 사죄해야한다'고 가르쳤다."

a  가이씨가 찿아낸  마츠무라 다츠키(松村辰喜,1868-1937)의 기념비. 아소산국립공원 입구에 있는 기념비를 그가 탁본한 것이다. 이 기념비에는  '조선에 머물면서 동지와 민비사건에 관여' 한 일을 치적으로 새겨 홍보하고 있다.

가이씨가 찿아낸 마츠무라 다츠키(松村辰喜,1868-1937)의 기념비. 아소산국립공원 입구에 있는 기념비를 그가 탁본한 것이다. 이 기념비에는 '조선에 머물면서 동지와 민비사건에 관여' 한 일을 치적으로 새겨 홍보하고 있다. ⓒ 심규상


일본에서 시해사건 가담 후손들을 찾는 일은 간단치 않다.

"일본에는 한국의 '족보' 같은 기록물이 없다. 3대가 지나면 조상들이 무슨 일을 했고 무엇을 잘못했는지를 알지 못한다. 가담 후손들을 통해 시해가담자의 행적을 찾는 일에 난관이 많다."

그러던 중 그는 마츠무라 다츠키(松村辰喜,1868-1937)의 기념비에서 명성황후에 대한 기록을 발견했다. 아소국립공원 입구에 서 있는 마츠무라를 기리는 기념비에는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가담한 일을 '치적'으로 새겨 홍보하고 있었다. 마츠무라는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행동대장격이였던 아다치 켄죠우(安達謙藏, 1864-1948)의 요청을 받고 한국으로 건너와 <한성신보>사에 입사했다.

<한성신보>는 일본 외무성이 한반도의 침략을 위해 기밀보조비를 지급해 경영을 도운 신문사로 '명성황후시해사건'의 비밀 본거지로 사용됐다. 명성황후 시해현정에는 마츠무라 등 <한성신보> 전 사원이 가담했다. 마츠무라 등 시해사건 관련자들은 일본 히로시마 재판에 회부됐으나 증거불충분으로 모두 무죄 방면됐다. 하지만 아소국립공원에 들어선 마츠무라 공적비에는 '조선에 머물면서 동지와 민비사건에 관여' 한 일을 치적으로 새겨 놓았다.

a  방안 벽에는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사죄하는 뜻으로 만든 연이 걸려있다. 가이씨가 직접 매년 정성을 들이는 일이기도 하다.

방안 벽에는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사죄하는 뜻으로 만든 연이 걸려있다. 가이씨가 직접 매년 정성을 들이는 일이기도 하다. ⓒ 심규상


"한 나라의 국모를 시해한 일을 '치적'으로 새겨 국립공원에 세운 것은 분명 잘못된 일이다. 잘못된 일이라고 기록해 아소국립공원을 찾는 관광객들 모두가 역사를 제대로 알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국립공원 측에 이를 끊임없이 제기해 왔으나 전혀 변화가 없다."

- 마츠무라 공덕비의 존재를 처음 알리고 문제를 제기했다. 그 후손을 만났나?
"찾아갔지만 만나주지 않고 있다. 우리와 생각이 다르다. 무덤 위치도 가르쳐 주지 않아 어디인지 찾지 못했다. 마츠무라의 사진을 보면 얼굴에 길게 흉터가 있다. 자료를 찾다 본인이 직접 '젊을 때 조선에서 여러 가지 일을 하다 생긴 것'이라고 말했다는 기록을 찾았다. 얼굴 흉터가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연관이 있을 수도 있을 것이라고 본다."

그는 매년 모임의 회원들을 대상으로 방문단을 조직해 명성황후가 시해된 경복궁과 명성황후의 묘가 있는 경기도 남양주시 홍릉을 찾고 있다. 일본인을 대신해 '사죄의 글'을 올리기 위해서다. 오는 10월로 8년째를 맞는다. 방안 벽에는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사죄하는 뜻으로 만든 연이 걸려있다. 가이씨가 직접 매년 정성을 들이는 일이다. 사죄방문단을 모집하는 홍보포스터이기도 하다.

"작년에는 120개, 재작년에는 100개의 연을 만들었다. 올해는 지금까지 24개를 만들었다. 사람들을 만나 연을 전하며 명성황후 사건을 알리고 참여를 독려하고 있다. 일종의 홍보포스터다. 글자 한자 한자를 쓸 때나 대나무살을 다듬을 때마다 열과 성을 다하고 있다."

- 한국 방문 경비는 어떻게 조달하나?
"경비는 모두 개인부담이다. 7년 동안 한 해도 빠지지 않고 가고 있다. 지난해에도 회원 15명이 참여했다. 올해도 갈 예정이다. 하지만 고령으로 걷지 못하거나, 앞을 볼 수 없거나 하는 등 몸이 따라주지 않는 사람들이 갈수록 늘어나 걱정이다."

a  가이씨가 직접 만든  올해사죄방문단을 모집하는 홍보포스터이자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사죄하는 뜻으로 만든 연이 걸려있다.

가이씨가 직접 만든 올해사죄방문단을 모집하는 홍보포스터이자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사죄하는 뜻으로 만든 연이 걸려있다. ⓒ 심규상

그의 향후 계획은 후임을 맡을 젊은 회원들을 찾는 일이다.

"가장 중요한 일은 후임을 맡을 젊은 사람들을 찾아 육성하는 일이다. 50여명의 회원이 활동하고 있지만 대부분 나이가 많다. 다행히 50~60대 회원들이 참여하고 있어 안심하고 있다. 회원들이 명성황후에 대한 역사자료를 공부하며 훈련하고 있다. 젊은 사람들에게 관련 자료와 책을 읽게 하고 소감문과 이어서 이 일을 하겠다는 다짐을 받고 있다."

다른 하나는 명성황후 사건을 통해 일본인들의 역사의식을 깨우치게 하는 일이다.

"구마모토시민들에게 역사적 사실을 제대로 알리는 일을 계속해 나가려고 한다. 올 초 구마모토 내에 있는 퇴직교사 모임에서 우리 모임을 소개하고 활동을 소개했다. 그랬더니 규슈지역 퇴직교사모임에서 또 발표해달라는 요청이 왔다. 지난 3월 규슈지역모임에서 발표했다. 큰 반향을 일으켰다. 앞으로도 이를 확대해 나갈 예정이다. 특히 2년 후에는 명성황후 묘소를 참배해온지 10주년이 되는 해이다. 10주년에 맞는 다양한 행사를 계획 중이다."

같은 시간 일본 내 주요 인사들의 망언소식이 전해졌다. 가이씨는 거듭 교육을 강조했다.

"일본인들은 일본이 행한 범죄행위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학교에서 가르치지 않기 때문이다. 명성황후를 시해한 역사적 사실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들도 드물다. 일본인들이 한국에 가서 관광만 할 것이 아니라 명성황후 묘소를 찾아 참배하거나 서대문형무소, 독립기념관 등을 꼭 둘러보고 느꼈으면 좋겠다."
#명성황후 #가이 도시오 #아소산 #구마모토 #명성황후를 생각하는 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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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보천리 (牛步千里). 소걸음으로 천리를 가듯 천천히, 우직하게 가려고 합니다. 말은 느리지만 취재는 빠른 충청도가 생활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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