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파 김활란가 지은 찬송가 345장 '캄캄한 밤 사나운 바람 불 때'
김동수
"캄캄한 밤 사나운 바람 불 때/ 만경창파 망망한 바다에/ 외로운 배 한 척이 떠나가니/ 아 위태하구나 위태하구나(중략) 모진 바람/ 또 험한 큰 물결이/ 제아무리 성내어 덮쳐도/ 권능의 손 그 노를 저으시니/ 오 잔잔한 바다 잔잔한 바다."찬송가 345장이다. 이 찬송가는 우리나라 여성 박사 1호로 불리는 김활란 박사가 1921년 지은 노랫말이다. 찬송가 아래에는 작사자와 작곡자를 설명한 곳이 있는데 김활란을 이렇게 말한다.
"김활란(1899~1970)은 인천 태생의 여성 지도자·교육가·이화여전 재학시 그녀는 이화전도단을 구성 전국을 순회하며 복음과 민족정신을 고취시켰다. 이에 위협을 느낀 일본 경찰들은 전도 활동을 금지시키고 말았다. 여기에 울분을 느낀 그녀는 조국의 운명을 만경창파의 배 한척으로 비유하는 동시에 나라의 운명을 주님의 자비로운 손길에 부탁하는 본 시를 작시하기에 이르렀다."찬송가 노랫말을 지었고, 민족정신을 고취한 김활란! 일본 경찰이 전도활동을 금지할 정도로 조국을 위해 싸웠던 김활란!을 생각하면서 이 찬송을 부르는 기독인들은 가슴이 벅차오를 것이다. 1921년 이 노랫말을 지었을 때는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김활란은 그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친일부역자'다.
김활란은 1937년부터 조선총독부가 주관하는 친일단체인 방송선전협의회·조선부인연구회·애국금차회 따위에 참여하고, 1941년에는 국민총력조선연맹 평의원 및 참사로 활동하였다. 문인답게 <부인들끼리의 애정과 이해-내선(內鮮) 부인의 애국적 협력을 위하여>(1939.3), <징병제와 반도여성의 각오>(1942.12), <남자에 지지 않게 황국 여성으로서 사명을 완수>를 발표하고, <여성의 무장>(1941.12), <대동아 건설과 우리 준비>(1942.2) 따위 강연을 했다.
이제야 기다리고 기다리던 징병제라는 커다란 감격이 왔다(중략) 지금까지 우리는 나라를 위해서 귀한 아들을 즐겁게 전장으로 내보내는 내지의 어머니들을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있었다(중략) 그러나 반도여성 자신들이 그 어머니, 그 아내가 된 것이다(중략) 이제 우리도 국민으로서의 최대 책임을 다할 기회가 왔고, 그 책임을 다함으로써 진정한 황국신민으로서의 영광을 누리게 된 것이다. 생각하면 얼마나 황송한 일인지 알 수 없다. 이 감격을 저버리지 않고 우리에게 내려진 책임을 다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할 것이다. -<신시대> '징병제와 반도여성의 각오' 일부김활란은 이화여대 초대 총장을 지냈다. 이화여대 학생들이 친일행적에 문제를 제기하며 교내에 설치된 동상 철거를 요구하고 나선 이유다. <연합뉴스>에 따르면, 이대생들은 30일 서울 서대문구 교내 본관 앞에 설치된 김활란 총장의 동상에 철거를 요구하는 쪽지(포스트잇)를 붙이는 플래시몹을 했다. 3m 높이의 동상에는 학생들이 붙인 쪽지가 얼굴 부분까지 빼곡하게 찼다.
학생들은 "당신이 이곳에 있음이 너무나 부끄럽습니다", "김활란동상 철거를 요구합니다", "내가 사랑하는 이화에 부끄러운 딱 한 가지", "김활란 내려오고 유관순을 올리자", "잘못된 것은 자정하는 이화인이 됩시다"는 글귀를 적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