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령 전 한국원자력연구원 원전사업본부장이 19일 강남구 삼성동 사무실에서 '원전 마피아'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김시연
"원전 마피아는 외국 회사 위해 국익을 훼손하는 세력이다." 국내 '원자력발전 마피아'의 실체를 폭로한 책이 뒤늦게 화제다. 지난 2011년 6월 <무궁화 꽃을 꺾는 사람들>(바름터)을 통해 미국 원전업체인 '웨스팅하우스 배후론'을 제기한 이병령(66) 전 한국원자력연구원 원전산업본부장이 그 주인공이다.
'한국 원자력발전의 대부'로 불리는 한필순 한국원자력연구원 고문이 최근 정부에 제출한 '원전 비리 근원과 근절 대책'이라는 보고서가 발단이 됐다. 한 고문은 지난 17일 "최근 원전 부품 비리는 빙산의 일각"이라며 "1980년대부터 원전기술 자립을 방해하고 외국 의존을 주장했던 원전 산업 마피아 세력이 있다"고 주장했다. 이날 보도자료를 통해 일부 공개한 보고서 내용은 '기술 매판 세력'을 고발한 이 전 본부장 책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70~80년대 웨스팅하우스 장학생들이 한국 원전업계 장악"19일 오전 서울 삼성동 사무실에서 만난 이병령 전 본부장은 "직장 상사로 뜻을 같이해온 한 고문이 '이제 때가 된 거 같다'면서 원전기술 자립에 반대하는 세력과 투쟁하겠다는 뜻을 밝혔다"면서 "보고서에는 70년대부터 활동한 '원전 마피아' 1세대 가운데 3명 정도 실명을 직접 거론한 것으로 추정한다"고 밝혔다.
이 전 본부장은 "국내 원자력계는 푹 썩을 대로 썩은 구렁텅이"라면서 "시험성적서 위조도 이미 10년 넘게 공공연한 비밀이었지만 정부만 몰랐는데 이번에 삐져나왔을 뿐 우연이 아니다"라고 꼬집었다.
이 전 본부장은 2년 전 쓴 책에서도 "원전 분야에서 국익보다 외국 편을 드는 '기술매판' 세력이 있다"면서 "그들은 소수지만 우리 정부 일부 부서, 일부 공기업과 사기업, 연구기관 등 원자력 관련 거의 모든 조직에 포진해 있어 그 힘이 막강하며 원전 수출과 기술 개발을 방해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2000년대 중반 대중국 원전 수출 무산과 지난 2010년 이태섭 전 과학기술처 장관이 추진했던 대미 원전 수출 차질을 꼽았다.
미국 원전 설계업체인 웨스팅하우스는 지난 1978년 고리1호기를 시작으로 한국에 원전을 수출해왔고 그 과정에서 국내 원전업계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왔다. 지난 2006년 일본 도시바가 웨스팅하우스를 인수하고 중국 원전을 수주한 뒤에도 이른바 '웨스팅하우스 장학생'이 한국 원전업계를 좌지우지하고 있다는 게 한 고문과 이 전 본부장의 주장이다.
이 전 본부장은 "그 숫자는 15~20명 정도"라면서 "막연한 숫자가 아니라 누구 누구인지 찍을 수 있을 정도지만 명확한 증거를 확보한 게 아니라서 구체적 리스트를 공개할 순 없다"고 밝혔다. 다만 "지방 발전소엔 가지 않고 본사에서 계약이나 기획 관련 주요 부서에 일하면서 해외 출장이 잦은 부류"라고 지적했다. 또 최근 김균섭 전 한수원 사장 후임으로 거론되는 유력 인사 가운데도 '원전 마피아'가 포함돼 있다고 밝혔다.
90년대 한국형 원전 개발 총책임자였던 이 전 본부장은 대북 경수로 지원 사업에 한국형 원전을 채택하는 데 공헌했지만 95년 석연치 않은 이유로 경질됐다. 이후 정치인으로 변신한 이 전 본부장은 대전 유성구청장을 연임하기도 했지만 2004년과 2008년 자유선진당 후보로 총선에 출마해 연거푸 고배를 마셨다. 지난 2010년부터는 한국형 원전 수출 마케팅회사인 뉴엔파우어 대표를 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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