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들은 '살아남기 위해' 교사들이 원하는 이미지를 '창조'해낸다. '가짜 나'를 만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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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로 학교 선생님들은 조용하고 고분고분한 아이들을 좋아한다. 다른 이가 보기에 편애한다 싶게 그런 아이들을 대놓고 칭찬하는 선생님들도 많다. '평범한' 대다수 아이들 앞에서 '탁월한' 다른 아이를 치켜세우는 것이다. 모멸감도 이런 모멸감이 없다. 나는 그런 선생님들에게 '옆 학교 선생님들은…'으로 시작하는 문장을 들려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기만 하다. 비교를 이용한 말하기는 때론 당사자의 인격을 말살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그래도, 아니 그렇기 때문에 아이들은 '살아남기 위해' 교사들이 원하는 이미지를 '창조'해낸다. '가짜 나'를 만드는 것이다. 그 '가짜 나'를 내세워 선생님을 속이고 친구를 속이고 스스로를 속인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부터 '가짜 나'가 '진짜 나'를 쫓아내고 '진짜' 행세를 한다. 마음의 주인이 뒤바뀌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아이들의 삶은 대체로 '가짜'의 길을 따라가게 된다.
교사도 인간이다. 그러니 고분고분한 아이는 편애하는 대신, '싸가지 없이' 거들먹거리는 아이들에게 화를 내거나, 자신에게 무섭게 대드는 아이들이 두려워(?) 그들을 무관심 속에서 방치하기도 한다. 교사들이 요새 아이들 대하기 힘들다고 하소연하는 이유도 대부분 이런 데 있다.
하지만 교사가 아이들을 차별하는 행위는 죄악이다. 교사의 보람이 바로 그런 아이들을 가르쳐서 '인간'으로 만드는 게 아닌가. 아이들을 편견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은 교사가 할 짓이 아니다. 차별과 편견은 모두 그 대상인 아이들을 병들게 한다.
교사의 편애를 받는 아이는 교사의 시선을 의식해 '가짜' 삶을 살아간다. 이른바 교사에게 '찍힌' 아이들은 자기 존엄감을 갖지 못한 채 열등감이나 모멸감 속에서 분노와 증오를 키워 간다. 교사가 아이들 모두를 공평무사하게 대해야 하는 이유다. 아이들 하나하나와 눈을 마주친 채 이름을 부르며 대화를 나눠야 하는 까닭이다.
주변에서 아이들이 킥킥거려도 화내지 않는 아이형숙(가명)이는 국어를 좋아하는 아이다. 학습 활동을 하기 위해 학습지를 나눠주기라도 하면 그때부터 벌써 눈빛을 반짝거린다. 나는 아이들이 자기 고유의 언어로 자신의 경험과 생각과 느낌을 직접 쓰게 하는 활동을 많이 시킨다. 형숙이는 그런 글쓰기 활동을 다른 국어 활동 중에서도 아주 특별하게 좋아한다.
형숙이가 쓰는 글은 다른 아이들이 쓴 글과 많이 다르다. 형숙이는 거의 항상 칼로 직접 깎아 쓰는 나무 연필을 사용한다. 굵다란 흑심이 들어 있는 나무 연필은 끝을 뾰족하게 깎아도 금방 뭉툭해진다. 그래서 글자를 쓰기 시작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모양이 금방 통통해진다. 그래서 형숙이가 쓴 글을 보고 있으면 무언가 모르게 따뜻하고 풍성한 느낌을 받게 된다.
형숙이는 다른 아이들과 달리 연필을 꾹꾹 눌러 쓴다. 글자들도 휘갈기는 게 아니라 또박또박 정성 들여 쓴다. 형숙이는 덩치가 큰 글자를 즐겨 쓴다. 형숙이가 쓴 글자들은 가로와 세로가 거의 1센티미터에 가까운 '거구'를 자랑한다. 글자 상단이 우상(右上) 방향으로 15도 정도 살짝 기울어진, 형숙이의 글자 모습은 역동적이기까지 하다. 형숙이가 쓴 글자들이 늘어서 있는 모습을 보면, 서로 친한 벗들이 어깨동무를 하고 다정하게 걸어가는 듯하다.
그런데 형숙이는 말이 느리다. 심하지는 않지만 어눌한 느낌이 나게 말을 할 때도 있다. 그래서 몇몇 아이들은 형숙이가 무언가를 발표할 때 소리 없이 킥킥거리기도 한다. 그럴 때 형숙이는 얼굴이 빨개져서 말을 더 더듬거린다. 그런 형숙이를 보고 있노라면 나는 속이 상한다. 그 자리에서 킥킥거리는 아이를 나무랄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그러지 못한다, 아니 안 한다. 그게 형숙이의 마음을 더 상하게 한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래도 형숙이는 얼굴에서 미소를 지우지 않는다. 나는 형숙이가 아이들이 킥킥거릴 때도 얼굴이 빨개지기만 할 뿐 표정이 굳어지거나 화를 내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나는 그런 형숙이가 안쓰러우면서도 대견스럽기 그지없다. 그럴 때 형숙이는 내게 꼭 온화한 부처님 같다는 느낌을 안겨 준다. 가끔, 부끄러운 듯이 내 손에 조용히 사탕을 쥐여주고 가는 형숙이는 정 많고 인간적인 아이다.
'가짜' 탈을 뒤집어쓴 아이들, 누가 만들었나요각 반마다 30명이 넘는 학생들이 있는 대한민국 교실에는 부처님 같은 '형숙'이만 있는 게 아니다. 산만하게 떠들어 여차하면 수업을 방해하는 주범으로 몰리고, 공부를 못한다고 선생님이나 친구들로부터 삐딱하게 눈총을 받는 수많은 '지윤'이가 있다. 어딘가 모르게 특별한 외양이나 인지적 특성을 가졌거나, 특이해 보이는 행동을 해서 눈에 쉽게 띄는 수많은 '형숙'이가 있다. 그런 '지윤'이와 '형숙'이들 한켠에 '가짜 나'가 주인이 돼 '가짜' 삶을 살아가는 평범한 아이들이 또 한 무리를 이룬다.
그들을 그렇게 만든 게 누굴까. 성적과 입시에 다 걸기(올인)하는 대한민국 학교의 현장 교육, 치열한 경쟁과 눈에 보이는 성과만을 강조하는 야만적인 사회 분위기, '내 자식만은'이라고 외치며 욕망을 대물림하는 부모들의 책임이 적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아이들을 그 누구보다 자주 그리고 많이 만나는 교사들의 책임은 그 어떤 변명으로도 피할 수 없다. 교사들의 대오각성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점이다. 아이들은 3년이면 떠나가지만 교사들은 최소 5년, 아니면 거의 평생을 한 학교에 머무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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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민주주의의 불한당들>(살림터, 2017)
<교사는 무엇으로 사는가>(살림터, 2016)
"좋은 사람이 좋은 제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좋은 제도가 좋은 사람을 만든다."
-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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