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아나키스트 14인이 공동저작한 아나키즘 입문서 <지금, 여기의 아나키스트>이 책은 아나키스트 경제와 정치, 공동체 운동, 장애인 노동, 공동체 대안 교육, 아나키즘 협동조합 공동체, 노동 소외, 일상의 아나키즘 등 다양한 주제와 분야에서 아나키즘의 사유와 원리를 실천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정중규
장애인과 아나키즘과의 만남은 바로 여기서 이루어진다. 아나키즘 자체가 산업혁명을 통한 자본주의가 서구 사회로 전파되었던 19세기 혁명의 시대에 노동자계급에 대한 자본주의적 착취와 권위주의적 국가의 지배를 거부하는 혁명 사상으로 발생하였다면,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장애인의 발생은 산업혁명에서부터 시작된 그 자본주의 체제에서 생산성을 상실하고 배제당하면서 이루어진 것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역사적 과정에서 보면 장애인은 자본주의의 저항 세력이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인지도 모른다. 장애인은 아나키즘의 기본 이념인 개인의 자유를 극대화하고, 자본주의적 착취와 권위주의적 국가를 폐지하기를 바라는 반국가주의, 반권위주의, 반자본주의적 입장에 적극적으로 동조할 수밖에 없는 급진적 위치에 있는 것이다.
자본주의 체제의 작동 원리가 촘스키(Avram Noam Chomsky)가 말한 "단결, 상호부조, 동정, 다른 사람들에 대한 관심 등의 정서" 같은 인간 본성의 핵심 요소들을 포기하도록 만들고, 자본의 이윤 창출에 도움이 되는 생산노동자가 아닌 사람들은 무조건 차별하고 배제시키는 것이라면, 자본주의가 가져다준 위계질서와 권위주의적 지배로터의 해방과 억압의 고리를 끊고 자유를 추구하며 인간에 대한 신뢰와 본래적 인간의 자율적 본성에 대한 믿음에 근거하는 아나키즘이야말로 자본주의 체제라는 암초에 좌초당해 삶을 박탈당했던 장애인의 진정한 해방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특히 독립생활운동의 이념인 자기 결정권, 선택권, 주도권 등은 대단히 아나키적이 아닐 수 없다. 그 실천적인 측면에서도 아나키즘과의 친화성을 다분히 지니고 있으니, 앞에서 언급했듯이 독립생활운동 자체가 미국 사회 전반에 지극히 아나키적 분위기가 새로운 조류로 풍미했던 1960년대에 탄생했기 때문이다.
세계를 거대한 자본주의 시장 체제로 재편하는 이른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따른 병폐가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경제 위기 속에서 드러나면서, 그 세계시장의 경쟁에서 소외된 민중들의 범세계적인 반세계화운동이 고조되고 있다. 월스트리트 점령(Occupy Wall Street)에서 촉발되어 전 세계적으로 들불처럼 번졌던 점령운동(Occupy Movement)은 1999년 WTO에 반대하는 시애틀 시위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이러한 반세계화운동을 미국의 여성운동가이자 <미국의 종말: 혼돈의 시대, 민주주의의 복원은 가능한가(The End of America)>의 저자인 울프(Naomi Wolf)는 "과거의 어떤 전쟁과도 다른 새로운 세계대전이 시작되고 있다. 사람들은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국적이나 종교로 편을 가르는 대신, 전 세계적인 양심과 평화적인 삶, 지속 가능한 미래, 경제 정의, 기본적 민주주의라는 요구로 한데 뭉치고 있으며, 그들의 적은 '기업 지배 체제'이다"라고 갈파했다. 이런 흐름 속에서 그동안 개인의 자유와 자율적 공동체의 건설을 강조해온 반권위주의, 반자본주의, 반국가주의 아나키즘운동 이념이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그와 함께 우리나라 역시 최근 선거에서 드러나듯 트위터를 비롯한 SNS의 활성화로 인하여 유권자들이 정치에 직접 참여하고 다중 지성적 여론 형성을 주도하는 직접민주주의 시대의 도래를 알리는 아나키적 전망이 펼쳐지고 있다.
이러한 시대적 흐름은 장애인 노동에도 새로운 전망과 유용한 통찰력을 제공해주고 있다. 현재의 국가 주도적인 장애인 고용정책의 천편일률적인 행태에서 벗어나 장애인의 개별 특성을 고려하여 장애인들이 각자의 고유한 능력을 자아실현 차원에서 온전히 발현할 수 있게 하는 맞춤형 고용정책이 요구되고 있다. 특히 문화 시대를 맞아 장애인 문인과 예술가 등을 키워내는 등 장애인 문화에 대한 사회적 관심과 제도적 지원과 투자도 절실한 시점이다.
그와 함께 현재 독립생활운동의 첨병 역할을 하고 있는 CIL(장애인독립생활지원센터) 역시 단순히 장애인 서비스 전달 체계의 네트워크적인 활동을 넘어 아나키즘에서 강조하는 자유로운 발전, 탈집중화, 다양성, 자발성 같은 개념을 지역공동체에서 주도적으로 펼치고 심어나가는 지역사회운동의 메카로서의 선도적 역할을 꾀해야 할 것이다. 생래적으로 반자본주의적이고 탈자본주의적인 장애인 노동운동 또한 신자유주의 속에서 위기에 처한 노동운동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데 소중한 역할을 담당해야 할 것이다.
자본주의 체제를 넘어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새로운 문명은 늘 그 사회 속의 마이너리티로부터 창조적 에너지를 공급받으며 활짝 피어났다. 산업혁명 시대가 종말을 고하고, 탈근대의 흐름 속에 맞는 문명사적 대전환기인 이 시대에 나는 다시 우리 사회의 마이너리티들이 지닌 사회변혁의 잠재적 폭발력에 주목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탈산업화 시대로 접어들면서 산업혁명의 부산물인 공장들이 갈수록 도시 외곽으로 물러나고 있을 뿐 아니라 공장제 노동 현장에서의 노동의 일탈 현상도 가속화되고 있다. 다양성을 존중하는 정보화 시대를 맞아 장애인들이 고유한 특성을 살리면서 자신의 삶을 영위할 수 있는 다양한 영역도 속속 개척되고 있다.
이러한 시대적 흐름 속에서 장애인운동 역시 단순한 사회 통합이나 정상화 차원을 훌쩍 뛰어넘어, 장애인을 발생시킨 자본주의 체제가 근본적으로 안고 있는, 무한 경쟁을 통한 착취와 억압의 구조적 모순의 위기를 극복하여 온전한 인간 해방을 이루는 길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여기에 아나키즘의 기본 이념인 탈중심적인 공동체연합, 국가주의의 거부, 직접민주주의, 자유주의적 공동체 사회 건설 등을 장애인운동에 실천적 이념으로 내면화시켜 볼 필요가 있다.
이런 시대 현상을 주목하면서 효율과 성장을 최우선으로 여기며 노동생산성에 따라 인간의 가치까지 결정짓는 비인간적 자본주의 체제를 근본적으로 뛰어넘는 새로운 공동체 사회 출현이 멀지 않음을 기대한다. 어쩌면 역설적으로 장애인이야말로 다가올 새 시대를 여는 사회변혁의 첨병이 아니겠는가. 그 가치에 사회와 장애인들이 눈을 떠야 한다. 장애인 노동의 르네상스 시대는 그렇게 오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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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의힘 정권교체동행위원회 장애인복지특별위원장, 대구대학교 한국재활정보연구소 부소장, 한국장애인자립생활센터총연맹 수석부회장, 지방분권운동대구경북본부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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