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폭격기 편대가 폭탄을 염소똥처럼 떨어드리고 있다.
NARA
#5. 다부동전투지루한 소모전
1950년 그해 여름은 예년에 보지 못한 혹심한 무더위가 계속되었다. 7월 하순부터 8월 하순까지 낙동강 다부동전선 일대는 용광로처럼 불볕 더위로 뜨거웠다. 게다가 야포의 포탄과 폭격기의 폭탄으로 지상의 열기는 더욱 뜨거웠다. 장마라도 지면 더위가 한풀 수그러들 테지만 장마는커녕 시원한 소나기조차도 드물었다. 오랜 가뭄으로 낙동강 수심은 깊은 곳이 어른 가슴팍 정도로 낮아졌다. 전선은 이래저래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인민군은 8월로 접어든 뒤 유엔군 측의 낙동강 최후 방어선인 '워커라인'을 뚫지 못한 채 더 이상 남하치 못했다. 유엔군 측이 이 '워커라인'을 마지노선으로 사활을 걸고 물러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자 양측은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서로 치고 받는 지루한 공방전을 계속 벌였다.
그런데 낙동강 다부동전투 초기에는 인민군 측이 유리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전선의 전세는 유엔군 측으로 기울어져갔다. "급히 먹는 밥은 목이 멘다"는 말처럼, 개전 후 인민군은 속전속결 파죽지세로 낙동강까지 내달려 왔지만 그만 낙동강에서 더 이상 남하치 못하고 그만 목이 멘 꼴이 되고 말았다.
이는 유엔군의 후퇴작전에 말려든 꼴로, 인민군은 낙동강전선에서 진퇴양난의 깊은 수렁에 빠졌다. 낙동강전선에서 양측은 한 달 남짓 서로 한 치 양보 없는 지루한 소모전을 벌였다. 인민군은 유엔군 측의 병참선 단절 폭격으로 날이 갈수록 점차 전투력이 약해져갔다. 그런 반면에 유엔군은 병력과 각종 무기 등 보급품이 잇달아 미국과 일본 등, 세계 각지에서 부산항으로 들어와 전선으로 수송되어 전투력이 나날이 증강됐다.
8월 초순부터 미 제2사단, 미 제1임시해병여단 등, 새로운 전투부대가 부산항을 통해 속속 상륙하여 전선에 배치됐다. 8월 하순에 이르자 유엔군 병력은 18만여 명, 전차 600대에 이르렀다. 유엔군은 개천 초보다 병력은 두 배 이상 늘어났고, 한 대도 없던 전차도 신속한 배치로 인민군보다 훨씬 더 많이 보유케 되었다. 이때부터 그동안 전선에서 무소불위의 맹위를 떨쳤던 인민군 전차도 그만 위력을 잃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