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투하는 청춘들에게 바친다.
문장은 파란 모조지 위에 아름다운 섬처럼 박혀 있었다(옛날 구글어스로 본 적 있는 대서양 위의 몰디브가 떠올랐다). 그 글귀는 눈을 파고 들어 뇌의 어느 한 구석을 푹 찔렀다. 오, 마이갓! 그만 반해버렸다. 유명 기성작가의 화려한 서평보다 작가의 진심이 담긴 담담한 한 문장이 내 가슴을 울렸다.
끝까지 읽고 나면 비로소 읽을 수 있는 소설
<내 심장을 쏴라>는 스물다섯 두 남자의 정신병원 탈출기이자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우리 청춘에 대한 이야기다.
이야기를 끌고 가는 화자이자 주인공인 수명은 자폐증을 가진 청년이다. 수명의 어머니 역시 자폐증 환자다. 수명이 18세 되던 해, 자폐증을 앓고 있던 어머니가 가위로 자신의 목을 찔러 자살하게 되고 그 모습을 본 수명은 이후로 자폐증 환자가 된다. 자폐증은 수명의 어머니가 수명에게 남긴 마지막 유산이었다.
세상을 피해 자기 안으로 끝없이 숨어드는 수명은 정신병원을 전전하다 결국엔 소설의 배경이 되는수리병원에 격리된다. 수명은 자신의 생애에서 세상과 끝내 화해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으나 또 한 명의 주인공인 승민 덕분에 점차 세상으로 나가는 걸음마를 배우고 마침내 정신병원을 탈출하고자 마음 먹는다.
한편, 또다른 주인공 승민은 재벌가의 사생아로 유산 상속 문제에 얽혀 타의로 정신병원에 갇히게 된 인물이다. 어린 시절 승민은 가슴 깊숙한 곳에서 끓어오르는 무언가를 참지 못해 방화를 저지르고(이것이 모든 소설 속 사생아의 삶이란 말인가?), 그 일을 계기로 미국의 프랭클린으로 쫓겨나게 된다.
그곳에서 승민은 '대장'을 만나 하늘을 나는 법(패러글라이딩)을 배우게 되고 하늘을 날 때 비로소 자신은 자신임을 느낀다. RP(망막색소변성증)환자인 승민은 자신이 시력을 완전히 잃기 전에 마지막 비행을 하기 위해, 자신으로 죽기 위해 수명과 함께 정신병원을 탈출하려 한다.
글이 짜임새 있고 흥미진진해 빠르게 읽혔다. 개인적으로 주제나 내용보다는 스토리가 재미있는 소설을 편애(?)하는 경향이 있기에 읽는 내내 즐거웠다. 그런데 마지막 책장을 덮자 불현듯 그럼 나는 누구지?라고 내가 물어왔다.
소설을 덮고 나자 비로소 '정유정의 질문'을 읽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본격 롤러코스터 소설
2009년 제5회 세계문학상 심사위원의 심사평처럼 60쪽만 참고 읽으면 나머지는 단숨에 읽히는 매력적인 소설이다. 공감하는게 앞부분을 읽을 때는 쉽게 읽히지도 않았고 큰 흥미를 일으키지도 않았다. 그런데 웬걸. 나머지 4/5 분량을 읽을 때는 손에서 책을 내려놓을 수 없었다.
밤새 한 권을 다 읽어버렸다. 뒷이야기가 궁금해 마음에 드는 글귀에 밑줄을 긋거나 따로 메모를 할 시간조차 나에게 허락할 수 없었다. 마치 롤러코스터를 타면 철컥철컥 꼭대기로 올라가는 그 시간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길게 느껴지지만 정점에 올라서면 너 잘 만났다는 듯 냅다 달리는 롤러코스터 같은 소설이다.
"책을 몇 백 권을 써낸 작가라도 그 테마는 하나 또는 두 가지로 압축된다. 모든 이야기는 그 테마를 기준으로 변주되는 것이라 들은 적이 있다."
어느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정유정 작가가 한 말이다. 뒤이어 자신의 테마는 '자유의지'로 귀결된다는 말도 덧붙였다. 첫 장편소설인 <내 인생의 스프링캠프>는 인생에서 처음으로 자신의 자유의지를 시험받는 청소년의 이야기, <내 심장을 쏴라>는 자유의지를 향해 좌충우돌 돌진하는 25살 두 청년의 이야기, <7년의 밤>은 모든 것을 빼앗기고 희망을 농락당했을 때 자신의 운명과 드잡이질하는 인간의 이야기로 정리할 수 있겠다.
결국 정유정은 이 두툼한 세 권의 책을 내놓으면서 자유의지에 대한 '발견-구현-확인'의 쓰리스텝을 완성한 것으로 보인다.
내 심장을 쏴라 - 2009년 제5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정유정 지음,
은행나무,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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