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석씨는 건물과 건물의 좁은 틈새로 배관을 연결하기로 했다. 성인 한 사람이 지나가기도 힘든 공간에 이씨가 몸을 우겨넣었다.
박현진
도급과 재도급으로 이뤄진 고용구조 "모든 책임은 설치기사에게"배관연결이 끝나자, 고객이 "목이라도 축이시라"며 음료수를 내왔다. 이종석씨가 "잠시 쉬다가 하자"며 바닥에 앉았다. 설치작업을 시작한 지, 2시간만이다. 이씨가 "그래도 오늘 설치작업은 다 주택이라 다행이다"라며 "이렇게 비바람이 몰아칠 때, 높은 층 아파트에서 설치작업을 하면 위험하다"고 말했다.
"보통 에어컨 실외기를 건물 외벽에 걸린 앵글(받침대)에 올리잖아요? 바람이 심하게 불면 아찔하죠. 실제로 안전사고도 꽤 많이 발생해요. 잘 안 알려져서 그렇지, 1년에 2~3건은 사망사고도 발생하고요. 가정용 에어컨 설치기사들은 전부다 도급계약이라고 보면 돼요. 제조사가 자회사에 도급을 주죠. 그럼 그 자회사는 또 도급업체에 도급을 줘요. 마지막으로 도급업체가 설치기사들과 1년 단위로 계약을 하죠. (설치기사들은) 대부분 개인사업자예요. 그래서 안전사고 발생하면 본인이 다 책임을 져야하죠."이종석씨가 고객에게 건네는 명함에는 제조사인 대기업의 로고가 선명하다. 그가 입고 일하는 작업조끼, 제품을 운송하는 2.5톤 트럭에도 마찬가지다. 심지어 이씨가 사용하는 휴대전화에 전화를 걸면, 통화 연결음으로 제조사의 홍보음악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는 고용구조상 제조사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이씨는 제조사가 아닌 도급업체와 1년 단위의 계약을 맺는다.
이러한 고용구조는 대다수 설치기사들에게 동일하다. 제조사들은 국내 굴지의 대기업들이지만, '계절상품 취급'이라는 이유로 직접고용을 하지 않는다. 도급과 재도급으로 이어지는 고용구조의 마지막에 설치기사들이 있다. 기본급이나 4대 보험 같은 노동조건과는 거리가 멀다.
한 업계 관계자는 "직접고용이 아니기 때문에 '설치 건 당 얼마'라는 식으로 설치기사들에게 돈이 지급된다"며 "또 산재보험이 안 되니까 (문제가 발생했을 때) 설치기사들이 개인적인 상해보험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하지만 정작 보험사들은 작업이 위험하다고 상해보험을 거부하는 경우가 많다"며 "결국 설치작업 중에 안전사고가 발생하면, 모든 책임은 설치기사에게 전가되는 구조"라고 덧붙였다.
이종석씨도 "제조사에서 정기적으로 안전사고 예방교육을 하고, 안전띠 같은 장비도 유·무상으로 제공을 해준다"며 "하지만 근본적인 안전망(산재보험)이 없으니, 제대로 된 해결책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직접고용은 꿈도 못 꾸지만, 최소한 산재보험만이라도 지원됐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올해에도 이미 큰 안전사고가 발생했다. 설치기사들에 따르면, 지난 4월 말 경기도 지역에서 일하는 한 설치기사가 실외기 작업을 하다가 건물에서 추락했다. 그는 지금까지도 혼수상태로 병원에 입원 중이다.
이종석씨는 "잘은 모르지만, (안전사고가 난) 그 사람도 상해보험에 가입되어 있지 않은 상태라면 큰 어려움을 겪고 있을 것"이라고 했다. 이어 그는 "밥 때가 안 지켜져서 장염 등을 앓거나, 무거운 제품 때문에 어깨나 무릎이 다친 설치기사들이 많다"며 "그런 것들은 본인이 부담하더라도, 최소한 큰 안전사고는 도와줘야하지 않겠나"고 되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