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도문시 강나루에서 바라본 두만강 너머의 북한땅
정만진
우리나라 최초의 직업 가수는 누구일까? 1935년 <매일신보>가 '애독자가 뽑은 남자 가수 5인'을 선정했을 때 당당히 1위를 차지한 사람은 채규엽이었다. 당시 채규엽의 인기는 그만큼 절대적이었다. 그래서 음악평론가 선성원은 역저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대중가요>를 통해 채규엽을 우리나라 최초의 직업 가수로 인정한다.
우리나라 최초의 유행 가수는 누구일까? 박찬호가 짓고 안동림이 옮긴 <한국가요사 1>은 '1930년 <유랑인의 노래>, <봄노래 부르자>를 노래하고 데뷔한 채규엽'이라고 소개한다. 즉, 선성원의 '최초의 직업 가수'와 박찬호의 '최초의 유행 가수'는 같은 의미로 쓰인 셈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직업 가수는 채규엽채규엽은 도쿄의 주오음악학교 성악과에 재학 중이던 1928년 서울에서 바리톤 독창회를 열었다. 그 후 1930년 서울의 콜럼비아레코드 회사의 파티에 갔다가 여흥 시간에 노래를 불렀는데, 그 회사 경성 지사장인 핸드포드로부터 조선어 유행가를 녹음하자는 제안을 받았다. 그래서 채규엽이 직접 작사, 작곡한 <유랑인의 노래>가 탄생했다.
여름 저녁 시원한 바다를 차저일엽편쥬 둥실 띄워라 달마지 가자저 달마지 내 가심의 이 설음 풀가아 - 나의 일생 고향이 그립기도 하다어이여차 놀 저라 노래 부르며넓은 바다 푸른 물 우에 정처 업시도흘으는 저 달빛 따라 이 몸도 함게아 - 나의 이 배 끗치 난 데 내 고향일까대번에 유명세를 탄 채규엽은 일본까지 건너가 하세가와 이치로라는 예명으로 음반을 취입하게 되었다. 이치로(一郞)는 '첫째'라는 뜻이므로, 채규엽의 일본 이름은 '일본어로 노래를 부른 최초의 조선인 가수'라는 의미였다. 일본에서 채규엽은 <술은 눈물일가 한숨이랄가> 등의 히트곡을 연달아 터뜨리며 인기를 누리다가 1933년 귀국한다.
국내로 돌아온 채규엽은 각지를 돌며 '귀향 환영 음악회'를 연다. 당시 그의 나이는 27세였다. 이후 1939년까지 그의 인기는 식을 줄 모르고 계속 치솟는다. 하지만 채규엽은 일제의 전시 체제를 지원하기 위해 1940년에 만들어진 관제 조직인 대정익찬회 회원 명함을 가지고 다니면서 비행기 헌납 운동에 앞장서는 등 친일 행각을 벌여 사람들을 놀라게 한 인물이기도 했다.
1949년 채규엽은 삼팔선을 넘었다. 자신의 히트곡인 <봉자의 노래> 등을 만든 작곡가 이면상을 찾아 월북했다는 소문이다. 하지만 더욱 안타까운 소문은 그가 두만강 끝 탄광으로 끌려간 뒤 횡사했다는 전언이다. <유랑인의 노래> 2절의 표현을 따른다면 그의 고향은 두만강 끝 탄광이었던 셈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