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김이 다른 러시아 기차와 중국 기차 차량.
예주연
안심한 나는 다시 잠을 청했다. 하지만 한 번 깨버린 잠은 쉽게 들지가 않았다. 이제 곧 종착역 블라디보스토크. 이 여행도 끝이 나가고 있었다. 기차가 자신의 일부분을 떼어내고 붙이면서 계속 길을 가듯 나도 이 여행에서 무언가를 버리고 또 배웠을 것이다. 내가 묻은 것은, 새로 얻는 것은 무엇일까.
어릴 적에 본 수많은 만화영화들 중에서도 나는 <은하철도 999>를 가장 좋아했다. 기차를 타고 전 세계, 아니 전 우주를 여행하는 것이 어린 나이에도 멋진 생각 같았나 보다. 한동안 잊고 지내던 만화를 이번 기차여행을 앞두고 다시 찾아보았다. 그리고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여주인공 메텔이 러시아어 눈보라 '미쩰'에서 따온 이름이란 것이었다.
게다가 그녀는 러시아 특유의 옷차림을 하고 있었고, 처음 등장하는 우주도시는 러시아 도시를 닮아있었다. 이렇게 만화의 많은 부분이 시베리아 횡단 열차와 그것이 지나는 러시아에서 모티프를 따온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어쩌면 이런 이미지들이 가슴에 각인이 되어 나를 여기까지 이끌었는지도 몰랐다.
서기 2221년이라는 먼 미래, 기계인간이 지배하는 지구에서 비참하게 살던 소년 철이는 어느 날 그를 기계 몸을 얻을 수 있는 안드로메다의 프로메슘에 데리고 가주겠다는 메텔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만화는 철이가 꿈의 목적지까지 수십 개의 각기 다른 행성을 거치며 성장해가는 여정을 그린다.
그렇게 프로메슘에 도착했을 때, 철이는 이미 자신이 바라던 세상을 바꿀 강하고 올곧은 청년으로 성장해있다. 그리고 영혼 없는 기계인간들의 디스토피아를 목격하고 원래 꿈이었던 기계 몸을 얻는 대신 인간으로 남아 인간을 위해 일하기로 하고 고향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돌아오는 여행은 혼자여야 한다.
"네가 혼자 일어서서 살아갈 수 있을 때가 너와 내가 이별할 때임을 알고 있었어."메텔이 이런 편지를 남기고 떠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