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해방전선에서 도망자가 나오다니..."

[박도 장편소설 <어떤 약속>] (27) # 8. 탈출(2) ①

등록 2013.08.13 09:48수정 2013.08.15 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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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군들이 뙤약볕 속에 새 전투지를 향해 행군으로 이동하고 있다(1950. 8. 1.). ⓒ NARA


# 8. 탈출(2)

신문


1950년 9월 초순, 구미국민(초등)학교는 전란으로 성한 건물이 없었다. 학교 교실 지붕이 전파 또는 반파된 채 불에 탄 서까래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학교운동장에는 위장망을 잔뜩 뒤집어쓴 천막 막사와 역시 위장망을 뒤집어쓴 소련제 T-34 전차, 그리고 122미리 곡사포 포문이 남쪽을 향하고 있었다.  배종철 상위는 준기와 순희를 한 천막 막사에 의자에 앉힌 뒤 신문을 시작했다.

"내레 묻는 말에 조금이라도 거짓이 있으면 더 이상 신문을 하디 않구 즉결 처분하가서(하겠어)."
"……"
"간밤에 동무들은 야간통행이 금지된 작전지역을 지나가서. 전투 시에는 민간인이라두 통행이 금지된 지역을 함부루 통행한 자는 리유 여하를 막론하고 총살하도룩 상부 디시가 이미 발쎄 내렸디. 내레 묻는 말에 동무들이 거딧없이 바로 답하기오. 알가서!"
"네."
"이름은?"
"최순희입니다."

"또?"
"김준기입네다."
"직업은?"
"학생입니다."

"또?"
"학생입네다."
"어느 학교?"
"서울 적십자간호학교…."
"동무는!"
"넹벤 농문둥학교…."

배 상위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순희와 준기를 노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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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란으로 폐허가 된 춘천 시가지로 멀리 봉의산이 보인다(1951. 4. 4.) ⓒ NARA


신발 벗어!

"서울에서, 펭안도에서 학교 다니던 학생들이 왜 너기까디(여기까지) 와서?"
"……"
"야! 이 쌍노무 새끼와 간나들, 어서 신발 벗어!"


갑자기 군관의 말이 거칠었다. 준기와 순희는 신발을 벗었다.

"이 쌍, 이 신발은 둘 다 우리 조선인민군 군화가 아냐? 내레 더 이상 묻지 안카서(않겠어). 포승 풀어줄 테니 여기 백지에다가 자술서를 쓰라. 너들 태어난 뒤부터 오늘까지 일들을 하나두 숨기디 말구. 동무는 이쪽, 여성 동무는 데쪽(저쪽)에 가 쓰는데, 서로 묻거나 테다(쳐다)보면 안 돼. 알가서?"
"네."
"알가시우."

배종철 상위는 준기와 순희에게 종이와 연필을 나눠주었다. 그들은 그가 지시하는 자리로 가 자술서를 썼다. 배 상위는 잔뜩 찌푸린 낯으로 담배를 꺼내 물었다. 그런 뒤 큰소리쳤다.

"내레 자술서를 보디 않아두 두 동무가 우리 조선인민군 도망병이라는 걸 알가서!"

준기는 변명이나 거짓 진술이 오히려 비굴하다는 것을 알고 담담히 지난 일들을 모조리 썼다. 순희도 솔직하게 그동안의 일들을 모두 썼다.

잠시 후 배 상위는 두 사람의 자술서를 훑어가면서 물었다.

"왜 전선에서 도망텠나(도망쳤나)?"
"미제 쌕쌕이도 무섭고, 배도 고프고, 그냥 살고 싶어 도망갔어요."

순희가 담담히 대답했다.

얼씨구 잘들 노네

"동무는?"
"내레 마찬가집네다."
"기래? 누가 먼저 도망가자구 했나?"
"제가."
"여성 동무가 꼬리를 텠구만(쳤구먼)."
"아닙네다. 서로 말없이 동의했습네다."
"얼씨구 잘들 노네. 아무튼 전시에 도망병은 어드러케 되는 건지 너들은 이미 알구 있디?"
"알고 있습니다."
"예, 알고 이시요."

두 사람은 담담히 말했다.

"이 동무들, 아주 간뎅이가 고래등만큼 부었군 기래. 조국해방전선에서 도망자가 나오다니…. 너들은 총알도 아까워! 기저(그저)…."

배종철 상위는 권총을 뽑아들고 준기와 순희의 가슴을 '쿡 쿡' 찔렀다.

"동무들이 엊그제 밤에 도망쳤다는 보고는 내레 이미 받아서. 우리 공화국 부대를 벗어나면 사는 줄 아는 모양인데, 그동안 도망친 자들은 죄다 붙잡헷디(붙잡혔지). 우리 공화국 군대가 기렇게 허술티 않아. '뛰어야 베룩(벼룩)'이란 말 몰라. 이제 곧 너들 부대 장 상사가 올 거야. 기러믄, 두 동무는 원대루 돌아가 여러 동무들 앞에서 처형될 거야."

배 상위는 준기와 순희를 각각 포승줄로 묶은 뒤 막사 좌우 구석 기둥에 다시 묶어놓았다.

F-84 전투기

그날 오후 느지막히 배종철 상위는 장남철 상사를 데리고 준기와 순희가 묶여 있는 막사로 왔다.

"장 상사, 저 동무들 알디요?"
"예, 잘 압네다. 우리 부대 위생전사들입네다."
"간밤에 김천으로 가는 길목 초소에서 붙잡헷디요(붙잡혔어요). 둘 다 탈영병이니끼니 원대에 데려가 모든 동무들이 보는 앞에서 처형하시우. 더 이상 조국해방전선에서 도망치는 전사들이 나오지 않게 말이우."
"알가습네다."

장남철 상사는 기둥에 묶인 포승줄을 푼 다음 준기와 순희의 몸에 묶인 포승줄을 확인한 뒤 트럭 뒤 짐칸에 태웠다. 그런 뒤 그는 운전병 옆자리로 올랐다. 트럭 짐칸 한편에는 유학산 전방부대로 보내는 양곡과 수류탄, 탄약 등 각종 무기상자와 기타 보급품들이 쌓여 있었다. 준기와 순희는 앞자리와 바로 유리로 통하는 자리에 각각 묶였다. 장 상사는 허리춤에 찬 권총을 두들기며 말했다.

"이동 중에 허튼 수작하문 가다가 차를 세우구 그 자리에서 처티하가서."

준기와 순희는 모든 걸 체념한 듯 담담히 듣기만 했다.

장 상사가 탄 트럭은 날이 저물 무렵에야 구미초등학교 인민군 제3사단 임시보충대 겸 보급창고에서 유학산 쪽으로 달렸다. 장 상사는 미군 폭격기의 공습을 피하려고 일부러 그 시간에 출발했다. 구미초등학교에서 유학산으로 가자면 광평과 신평 등 구미평야를 지나고 낙동강 수중교를 건너야 했다.

트럭이 막 신평 들판을 들어서려는데 하늘에서 갑자기 비행기 소리가 나더니 미 공군 F-84 전투기가 저공비행으로 날아왔다. 운전병은 때 아닌 시간 전투기의 갑작스런 출현에 화들짝 놀라 트럭을 후다닥 길옆 과수원 안으로 돌진시켰다.

장 상사와 운전병은 트럭을 팽개치고 잽싸게 과수원 사과나무 밑 콩밭에 엎드려 숨었다. 전투기가 과수원에 폭탄을 떨어뜨렸지만 그들은 피폭 지점과는 다소 거리가 떨어져 있어 트럭은 흙먼지만 뒤덮어 썼다.

F-84 전투기가 사라진 뒤 장남철 상사와 운전병은 옷에 묻은 흙을 털면서 트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장 상사가 다소 겸연쩍게 두 사람에게 물었다.

"동무들, 일 없소?"
"네."
"예. 일없습네다."
"미제 쌕쌕이가 동무들을 살레뒀디만 내레 대신 죽여주가서(죽여주겠어). 동무들, 도락구에서 날래 내리라!"

즉결처치

준기와 순희는 트럭에서 내렸다. 장 상사가 운전병에게 말했다.

"더 반동들을 태우구 가다가는 우리까디 죽가서(죽겠어). 내레 데(저)들을 과수원 깊숙한 곳으로 데리구 가 즉결처티(처치)하구 오가서, 기동안 동무는 도락구를 도로로 빼놓구 대기하라."
"네, 알가습네다."

장남철 상사는 허리춤에서 권총을 뽑아들고 준기와 순희에게 말했다.

"이 반동들, 날래 과수원 한가운데루 가라야."

준기와 순기는 포승줄에 묶인 채 뚜벅뚜벅 과수원 한가운데로 걸어갔다. 그 뒤를 장 상사가 뒤따랐다.

"어느 나라 군대나 전쟁터에서 도망자는 모두 총살이디."

준기와 순희는 등 뒤로 곧장 총알이 날아오는 것 같았다. 그들은 몹시 긴장한 탓인지 장남철 상사의 식식거리는 숨소리까지 들렸다. 하지만 그들은 그 순간에도 비굴치 않고 담담히 과수원 한가운데로 걸어갔다.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여기에 실린 사진은 대부분 필자가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서 3차에 걸쳐 일일이 검색하여 수집한 것들과 답사 길에 직접 촬영하거나 수집한 것입니다. 본문과 사진이미지가 다를 경우 한국전쟁의 한 자료사진으로 봐주십시오.
#어떤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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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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